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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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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Menzies, Isabella Belle(1856-1935, AP)

닉네임
조진형
등록일
2017-06-08 10:01:05
조회수
2285
첨부파일
 M0058_2015210060_조진형.hwp (3111936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Menzies, Isabella Belle / 멘지스 / 한국명: 민지사(閔之使)
2. 생몰연도: 1856.6.30.-1935.9.10.
3. 출신 및 소속: 호주, 호주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891.10.12.-1924.
5. 연표 민경배, “멘지즈 Menzies, Isabella Belle,”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제6권(메시야-바이) (서울: 기독교문사, 1982): 65-66.

1856.6.30. 호주 빅토리아주 벨러렛에서 출생
1891. 여성전도회 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 PWMU) 가입
1891.5. 한국선교사로 지원 정병준,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164.

1891.9.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협력으로 한국 선교사 파송
1891.10.12. 부산 도착
1893. 부산지역 최초 고아원 미오라고아원 설립
1894.4.22. 부산의 첫 세례자 심상현(沈相炫) 세례
1895.10.15. 호주 장로교 선교부 첫 교육기관 일신여학교 개교 및 교장취임
1897. 심상현 아버지 심인택(沈仁澤)을 교사로 남자학교인 호신학교 설립 및 교장 취임
1914. 민신복을 양녀로 삼음
1908.12.1. 건강 문제와 연로한 어머니로 인해 선교사직 사임 및 귀국
1911. 어머니 사망
1912.3.12. 한국에 입국하여 12년간 부산에서 선교와 봉사
1924. 은퇴 및 귀국
1931. 양녀 민신복 결혼 주선을 위해 한국 입국
1935.9.10 고향 벨러렛에서 사망


Ⅱ. 선교사 소개: 멘지스(Miss B. Menzies, 1856-1935)

1. 학문과 신앙으로 준비된 선교사

멘지스(Miss B. Menzies, 1856-1935)는 1856년 7월 30일 호주 빅토리아 주 밸러랫(Ballarat)에서 로버트 멘지스(Robert Menzies)의 7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멘지스는 집에 화재가 일어나 자녀들을 구하고 화상을 입어 46세의 나이로 1879년에 세상을 떠났다. 벨레 멘지스는 고향에서 인접한 성앤듀르스교회(St. Andrews)에 출석하며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엘라드 스트릿 공립학교(Errard St State School)를 거쳐 사설 신학교육 기관(private seminary)에서 공부하였다.
벨 멘지스가 살았던 밸러렛의 환경은 그녀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앤드류 교회의 담임 목사는 해외선교위원회 위원장인 토마스 케언즈였고, 케언즈 부인은 여선교연합회의 밸러렛 지부의 창립맴버였다. 신앙생활에 열심이던 벨레 멘지스는 성인이 된 후에는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 에벤에셀 지부 총무로 활동하였다. 한국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광고를 본 멘지스는 선교사를 자원하였고, 호주 빅토리아 주 여전도회연합회(PWMU)의 파송을 받고, 1891년 10월 내한하였다.


2. 호주장로교 첫 여성선교사, 1890년대 호주 선교부의 어머니

멘지스(Miss B. Menzies, 1856-1935)는 첫 호주장로교 선교사로서 부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려고 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데이비스 선교사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땅을 밟은 5명의 호주선교사 중 한 명이었다. 멘지스는 청년 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제임스 멕카이(Rev. James H. Mackay) 부부와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세 명의 미혼 여선교사 페리(Miss Jean Perry)와 퍼셋(Miss Fawcett)과 함께 1891년 10월 12일 미혼의 몸으로 부산 땅을 밟았다.
추운 겨울 이국인에 대한 불신과 의심이 가득 찬 조선 땅에서 거처를 구하지 못한 호주선교사들은 힘겹게 일본인 거주지 내 빈 창고에서 겨울을 보내게 되었고 부산에 온 지 3개월 만에 멕카이 목사의 부인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세 미혼 여성들도 건강이 악화되어 네 사람은 하디 선교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낯선 땅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호주에서 함께 왔던 퍼셋양과 결혼한 멕카이 목사는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1893년 8월 28일 선교사 사임 의사를 통보하고 떠났고, 1894년 페리 양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고아와 맹인들을 위해 독립적으로 사역하기로 하고 서울로 갔다. 결국 1891년 한국에 왔던 다섯 명의 선교사 가운데 오직 멘지스만이 부산에 남게 되었고 그녀가 1890년대 부산의 호주 선교부를 이끌어 나갔다.

3.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첫 교육기관 일산 여학교의 설립과 교장 취임

호주의 여선교사들은 호주의 여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어린이와 부녀자 두 계층의 한국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일하였는데 이는 어린아이는 조선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고, “여성을 정복하는 자는 나라를 정복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멘지스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호주선교사들은 첫 사역으로 극심한 가난으로 인하여 부양받을 수 없는 아동, 부모 중 어느 한쪽이나 전부가 사망하거나 이혼함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아동, 혹은 버려진 아동을 위한 보양과 교육을 목적으로 고아원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 고아원이 후일 미오라 고아원(Myoora orphanage)로 불리게 된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첫 자선 기관이자 교육기관이 되었다.
아동의 수가 점차 늘어나 정식으로 교육할 필요가 생기자 3개년의 소학교 과정을 설치하고 1895년 10월 15일 사립 부산진 일신여학교(私立 釜山鎭 日新女學校)를 개교하게 되었다. 일신여학교는 호주장로교 선교부의 첫 교육기관이자 부산·경남지방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기관이 되었고 해방 이전까지 경남지방 최고 최대의 여학교가 되었으며 여성교육이 전무하던 시기의 조선에 여성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멘지스 선교사가 이 일신여학교의 첫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때의 사정을 호주 선교회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1892년 선구적 호주선교부 여자 전도사들이 첫 여학교의 모체를 잉태시켰다. 그들이 부산에 도착한 듬해(1892), 멘지스 양과 페리(Perry)양은 3명의 고아를 자신의 집에 데리고 와서, 한국인을 위한 선교사로 세우기 위해 어린 나이 때부터 교육시키고자 하였다. 그 뒤에 소녀들은 더욱 많이 모여 들었고 1895년에는 주간 학교를 차리게 되었으니, 이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시작이 날로 성장해서 학교 이름을 '일신(日新)'이라 부르기로 했다.”

호주 선교사들은 더불어 부녀자를 위한 성경모임반을 조직하여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한국 부인들에게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호주 선교사들은 멘지스 선교사를 책임자로 하여 남자를 위한 교육도 시도하였다. 일신여학교가 시작된 지 2년 후인 1897년 여선교사들은 부산지방 최초의 신자, 더 정확히 말하면 부산·경남지방 최초로 세례를 받은 심상현씨의 아버지인 심인택씨를 교사로 채용하여 남자학교를 시작하였다.

4. 부산·경남 지방 최초의 수세자(受洗者) 심상현과 교회의 설립

부산 지방에서 첫 세례식이 거행된 것은 1894년 4월 22일이었다. 이때의 첫 수세자는 2년간 멘지스 선교사의 어학선생이었던 심상현과 이도염과 귀주라는 두 여인으로 세 사람이었다. 이 수세자들은 호주 선교부의 첫 결실이자, 부산 지방의 첫 열매였고 부산은 경상도 지방의 첫 선교 지역이었으므로 부산과 경상도 지방에서의 첫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세례식은 호주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한옥에서 이루어졌고, 당시에는 멘지스, 페리, 무어 등 세 사람의 여선교사만 있었기 때문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1891년 이래 부산에서 사역했던 베어드 선교사가 예식을 집례 했다.
첫 세례자였던 심상현은 일신학교의 어학교사로 봉사했을 뿐 아니라 선교부를 위해서도 값진 봉사를 하다가 세례를 받은 지 6개월 만에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의 부모와 동생이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도 남자학교의 한문교사로 봉사하게 되었다. 이처럼 멀고 낮선 땅에서 헌신한 멘지스 선교사의 전도가 맺은 열매는『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부산진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是)에 여선교원 영국인 맨지쓰양이 당지(當地)에 내왕하야 각양의 시험과 박해를 모(冒)하고 전도한 결과 신자가 계기(繼起)하얏고 선교사 왕길지(王吉志)가 내왕하야 교회를 설립하니라”

초량교회와 함께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두 교회 중 하나가 부산진 좌천동에 위치한 부산진 교회이다.

5. 가장 오랫동안 한국에서 활동한 독신 여선교사

멘지스 선교사는 미혼의 몸으로 젊은 나이부터 은퇴할 나이까지 낮선 한국 땅에서 전도와 교육과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그녀는 사역 뿐 아니라 그녀의 삶을 통해 약자를 향한 긍휼과 사랑을 나타냈다. 버려진 아이들이나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미오리 고아원을 시작하였고 가정파탄으로 버려진 부양하며 교육시키고 이들의 후견인이 되어주기도 했으며 1914년 겨울 집 앞에 버려진 ‘민신복’을 입양하여 양육하기도 했다.
멘지스는 은퇴한 뒤에도 연로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귀국한 멘지스는 출신교회의 발라랏의 에벤에셀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봉사하였으며 1911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1912년 다시 4년 만에 부산으로 돌아와 1924년까지 12년간 전도, 교육과 자선사업을 했다.
작성일:2017-06-08 10:01:05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