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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Winn, George H.(?-1963, NP) / Essick, Blanche

닉네임
김의경
등록일
2017-06-23 02:00:32
조회수
2189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99_2015210083_김의경.pdf (84129 Byte)
I. 기본사항

1) 윈 선교사
1. 이름 : Winn, George H. / 윈 / 한국명 : 위철친(魏喆治)
2. 생물연도 : ? - 1963. 6. 18.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북 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 1909 - 1918
5. 연표
1909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부산 선교부에 부임하여 전도, 계몽사업
1924 대구선교부
1925 서울 선교부
1929 대구선교부
1937 서울선교부 등지에서 활동, 일제 말 강제 추방, 해방 후 재내한
1948 은퇴 후 기국
1963.6.18. 미국 아리조나주 투스콘에서 사망
6. 가족사항
부인 : Essick, Blanche (1883-1955.6.24.)
자녀 : 3남 2녀

2) 에시크 선교사
1. 이름 : Essick, Blanche / 에시크
2. 생물연도 : 1883-1955. 6. 24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북 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 1909 - 1918
5. 연표
1908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대구, 서울 등지에서 전도, 계몽사업, 일제말 강제 추방,
해방후 재내한
1948 은퇴하고 귀국
1955.6.24. 플로리다주 폴크시티에서 사망
6. 가족사항
남편 : Winn, George H.(? - 1963. 6. 18)
자녀 : 3남 2녀


II. 선교사 소개
1) 윈(Winn, George H, - 1963. 6. 18)
윈은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서 한국명 위철치이다. 미국에서 출생하여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뒤 1909년 미북장로교선교부 파송으로 내한하였으며 곧 경남 부산선교부에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전도사업 및 계몽사업에 힘쓰다가 1924년 대구선교부로 전임되었고 1925년 서울 선교부, 1929년 대구 선교부, 1937년 다시 서울 선교부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일제말 기독교 박해시 강제 추방 당했으며 해방 후 재 내한하여 활동하였으며 1948년 은퇴하고 귀국, 1963년 6월 18일 미국 아리조나주 투스콘에서 별세하였다.
윈에 대한 자료가 많이 존재하지 않음에 따라서 대략적인 그의 활동 년도와 장소, 당대의 선교 전략 등을 통하여 그의 활동 내용들을 유추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1. 1890년대의 선교적 정황
1816년 하멜의 표류기를 읽고 난 후 바실 홀과 머리 맥스웰이 입국한 후 최초의 1832년 최초의 한국 개신교 선교사로서 칼 구츨라프가 입국하고 1866년 최초의 개신교 선교 순교자였던 토마스에 이르면서 한국은 복음과의 접촉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국내, 외적으로 선교사를 통한 복음 수용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임오군란을 때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수영을 통한 성경 번역 및 외국인 선교사들을 향한 서신, 중국 만주 일대에서는 존 로스와 메킨타이어가 한국 선교를 준비하던 일들이 그것이다. 실제로 이수영의 편지를 통하여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는 한국 내한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복음과의 끊임없는 접촉 시도의 결과로서 1884년 최초의 공식적 개신교 선교사로서 알렌 선교사가 입국하기에 이른다.

2. 알렌 입국 이후의 선교 정책
알렌 선교사 입국 이후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 정책은 크게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의료 및 교육 사업이었고 둘째는 문서 및 성경 번역, 셋째는 연합 활동, 넷째는 선교지 분할 정책, 다섯째로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따랐다. 이러한 선교 정책의 결실로서 1903년 두 명의 여 선교사였던 화이트와 맥컬리의 기도 모임에서 시작된 부흥의 조짐이 하디 선교사를 통하여 촉진되기에 이른다. 이에 발맞추어 1906년에는 더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열망하며 평양 지역과 서울 지역의 선교사들이 모여 사경회를 열었었고 목포에서는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곳곳에서 정오 기도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놀라운 부흥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3. 확장 사업
1891년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베어드(Baird) 선교사 부부가 부산을 거주지로 삼았고 1895년에 부산에서 대구로 이주하였다. 사실 이 시기에 부산을 거쳐갔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가령 토론토 대학의 Y.M.C.A 선교회에 속한 게일(J.S.Gale), 하디 부부(R.A.Hardie) 등이 있었다.

4. 부산
당대의 부산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한국 전체에서 가장 큰 항구’라고 기술되고 있다. 이곳은 남쪽의 주요 관문 일본에서 가장 가까우며 그 당시에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 페리 호로 9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이 때문에 당대에 부산 지역에는 일본인의 비율이 한국의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높았다. 부산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른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도 외국인과 더 접촉이 많았고 이러한 이유로 부산은 두 번째 선교기지 설립 장소로 선정되기에 적합하였던 것이다. 부산 지역에 선교기지 개설을 시작으로 주택건축, 의료사업, 전도사역, 시골지역 사역, 교육사역 여성사역, 사경회 등의 다각적인 선교 사역이 촉진되고 있었다.

5. 선교 기지 충원
베어드 부부는 1895년에 선교기지를 개설하기 위하여 대구로 갔다. 부산에서는 1897년부터 시릴로스(Cyril Ross) 목사와 그의 부인 로스 의사가 그들의 일을 이어받았다. 1896년에 첫 번째 독신여성 사역자인 루이스 M. 체이스(Louise M. Chase) 양이 도착하였고 1899년에 사이드보텀(R.H.Sidebotham) 목사 부부가 왔다. 1902년에 체이스 양과 로스 부부사가 선천으로 옮겨갔고 스미시(W.E.Smith) 목사 부부가 왔다. 이듬해 홀(E.F.Hall) 목사가 왔으나 건강문제 때문에 머물지 못하였다. 1908년 12월에 사이드보텀이 화재로 인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로 인해 그들 부부의 인력을 잃게 되자 윈(G.H.Winn) 목사 부부 그의 부인(Bllanche Essick, 1883-1955)은 그보다 1년 먼저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가 결혼했는데 이후 남편을 도와 선교 동역자로서 일하다가 같은 해(1948) 은퇴하였으며 1955년 6월 24일 플로리다주 폴크시티에서 별세하였다. 슬하에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Paul R.W)은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가 되어 일본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가 안식년 중에 부산으로 배정 되었다. 1909년 윈 목사와 그 부인 위(R.E.Winn)이 부산에 배속됨으로써 선교기지에 3명의 안수 받은 목사들을 두고자 했던 선교회의 목적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스미스 부부는 3년 후에 평양으로 옮겨 갔다. 4년 후에 두 번째이며 마지막 독신여성 선교사인 안나 S. 도리스(Anna S. Doriss)양이 옮겨왔다. 이 23년간의 선교기지 역사에서 21명의 선교회 회원들이 부산으로 배속되었다. 그들 중 9명이 첫 6년 동안에 왔다가 떠났다. 다른 4명은 이 기지로 배정되었으나 이곳에서 상주하지 않았다. 그러한 빈번한 변동은 죽음과 은퇴, 기후조건, 선교기지 내의 불화, 대구 선교기지의 설치, 그리고 부산 선교기지가 호주 장로회로 넘어간 것에 기인하였다.

6. 대구에서의 여성 사역
대구에서 여성을 위한 사역은 아담스 부인과 존슨 부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1899년의 겨울과 봄, 3개월 동안 대구에 와 있었던 부산의 체이스(M.L.Chase) 양의 협력을 받았다. 선교사의 집을 방문한 여자들은 선교사들을 만나서 전도지를 받았으며 주일 예배 후에는 여자들이 별도로 선교사들을 만났다. 아담스 부인은 한국 가정을 방문해 주중 사경회를 열고 여자들에게 성경과 언문을 가르쳤으며 1899년에 그들 중에서 최초의 여성 학습자들을 배출했다. 아담스 부인은 일요일에 사경회에서 계속 가르쳤고 너스(Nourse)양은 월요일 반을 조직해 14명의 소녀들을 등록시켰다. 이렇게 해서 1899-1901년간에 여성사역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100달러가 건축을 위해 기부되어 2년 후에 여성 게스트 룸이 선교기지 출입문 밖 거리 부근에 세워졌다. 아담스 부인은 1905년에 시골지역을 여행해 경산과 경주를 방문하고 최초의 외국 여성 방문자가 되었다. 그 여행 보고서에서 그녀는 “내가 한복을 입고 머리숱을 나누어 뒤에 낮게 만 후 한국 핀을 하였더니 한국 여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기록하였다. 1908년까지 이 선교기지에는 단 한명의 한국 여성이 고용되었다. 1907년에 이 선교기지에서 최초의 간호사 존슨 부인과 카메론(Cameron) 양이 도르가회(Dorcas Society)를 만들었다. 결혼은 선교기지에 독신 여성 사역자를 두려는 계획을 다시금 좌절시켰다. 엘리자벳 카슨(Elizabeth Carson) 양은 1904년에 와서 이듬해에 바레트 부인이 되었으나, 1908년까지 선교기지에 남아 있었다. 블랑쉬 에시크(Blanche Essick) 양은 2년 후 윈(G.H.Winn)목사와 결혼하였다. 그럼에도 많은 여성 사역이 이 선교기지의 기혼 여성들에 의해 수행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윈 부인은 1914년에 이 선교기지에 돌아와서 14년을 일했다.

7. 결론
윈과 그의 아내 에쉬크에 대한 정보는 많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와 활동 장소, 선교적 정황을 살펴 볼 때 분명 이들이 한국 복음화를 위하여 헌신되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에쉬크는 결혼 전에 이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에 내한한 바가 있었고 윈 목사와 결혼 후에도 기혼 여성으로서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을 여성 사역에 헌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당대의 선교 정황 속에는 선교사들 간의 갈등과 여러 가지 문화적, 환경적 요인 등이 존재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함에도 내한 선교사들이 한국 정황에 맞는 선교 전략과 원칙 속에서 활동한 결과 놀라운 복음 확장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작성일:2017-06-23 02:00:32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