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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Owen, Clement Carrington(1867-1909, SP) / Whiting, Georgianna

닉네임
정승호
등록일
2017-06-27 22:11:30
조회수
2336
첨부파일
 M0052_2015210056_정승호.hwp (5769728 Byte)
오기원 선교사 / Clement Carrington Owen (1867-1909)
I. 기본사항
1. 이름: Owen, Clement Carrington / 오웬 / 한국명: 오기원(吳基元)
2. 생몰연도: 1867-1909.4.3. 미국 버지니아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버지니아,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898.11.-1909.4.3
5. 연표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生
1886년 햄튼 시드니 대학 졸업
1894년 스코틀랜드 뉴 대학, 유니온 신학교 졸업
1896년 버지니아 대학교 의학 전공
1897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임명
1898년 11월 5일 한국 입국
1898년 (월 일??)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와 함께 목포선교부로 부임(cf.1897.10.01.
목포항 개항) 
1899년 전라남도 최초 서양진료소인 목포진료소를 세움
1900년 12월 12일 조지아나(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와 서울 언더우드선교사 사택에서
결혼함.
1904년 12월 19일 유진벨 선교사와 함께 광주로 이주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 드림 (광주, 화순, 남평, 장흥 등으로 열정적으로
전도여행을 하다. 장흥에 도착한 주일날 아침부터 갑작스런 폐렴)
1909년 4월 3일 급성폐렴으로 사망
6. 가족사항
부인 : Whiting, Georgiana
자녀 : Mary Virginia(1901.10.3.), Ruth(1903), Dorothy(1905), 유복자 (1909)

Georgiana Whiting (1869-1952)
I. 기본사항
1. 이름: whiting, Georgiana /화아팅 / 오부인(吳婦人)
2. 생몰연도: 1869-1952.1.24. 미국에서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북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895.4.6..- 1923
5. 연표
1895년 4월 6일 북장료교 의료선교사로 제이콥슨과 함께 내한
제중원의 재정적 책임과 부녀자 진료활동
1898년 11월 남장로교 오웬 의사와 결혼
1900년 12월 12월 북장로교 사임, 남장로회선교부로 이전
전남 목포, 광주, 순천 등지에서 선교활동 후원, 의료진료
1900년 4월 3일 순회진료의 과로로 남편 사망후 계속 선교활동
1923년 귀국
1952년 1월 24일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사망

6. 가족사항
남편 : Owen, Clement Carrington
자녀 : Mary Virginia(1901.10.3.), Ruth(1903), Dorothy(1905), 유복자 (1909)


II. 선교사 소개 (Clement Carrington Owen, Georgiana Whiting)
1. 선교사 알렌 이후 의료 선교의 확대 (오웬 선교사 입국)
1884년 알렌 의사의 입국 이후 많은 의료 선교사들이 내한 했다. 1907년에는 한국의료선교사협의회( The Korea Medical Missionary Society)가 조직되어 의료선교사들 가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1938년 당시 의료선교사 수는 328명에 달했다. 교파별로 보면 북장로교 84명, 남장로교 44명, 북감리회 59명, 남감리회 32명, 성공회 31명, 캐나다연합교회 22명, 안식교 10명, 독립선교사 35명 등이었다. 한국에 왔던 의료선교사 중 헤론, 홀, 랜디스(Eli Barr Landis), 오웬(C. C. Owen) 등은 격무와 과로로 순직하기도 했다.

2. 오웬 선교사 추모글
- 고인을 추모하며

1909년 4월 3일, 대한민국 광주의 의사인 Clement Carrington Owen 목사는 잠시 폐렴을 앓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집으로부터 남쪽으로 70마일 거리의 전도여행 도중에 병을 얻고서 그는 현지민들에 의해 가마에 실려 삼일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를 위해 모든 애정 어린 손길과 의료기술들이 총동원되었으며,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통곡하며 눈물로 그의 목숨을 살려주시길 바랐지만, 하나님께선 그를 데려가시고자 하셨다. 이것은 이 생애에서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신비한 섭리들 중 하나였다. 그를 대체할 사람은 없었다. 홀려 남겨진 아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붙들고 있는 어린 자녀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열세 지역에 흩어져 있던 수 백명의 한국인 그리스도인들, 남겨진 소그룹의 동료들, -모두 하나같이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우러러 보며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울부짖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Owen 선생은 일찍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었던 그러한 신앙적인 인상들을 받았었다. 1867년 7월 19일 버지니아의 블랙 월넛에서 그리스도인 부모(Robert L. Owen과 Mary G. Carrington)에게서 태어난 그는 4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그는 버지니아 블랙 월넛에 거주하고 계시던 할아버지인 Wm. I. Owen과 함께 살게 되었고, 할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의 신앙적 교육은 그의 두명의 할머니들로부터 조심스럽게 주어졌고, 그분들에 대한 기억을 그는 애정을 담아 회상했었다. 그는 버지니아의 Hampden Sidney 대학을 3등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좋지 못한 건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버지니아에 있는 대학을 포기했고, 나중에 그는 Hampden Sidney에 있는 신학과를 선탰했으며, 스코틀랜드에서 신학공부를 위해 2년을 보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의 신학 학위를 버지니아에 있는 Hampden Sidney의 Union Seminary에서 수여했다.

해외 선교사 업무에 자원봉사를 한 후, 그는 이 일을 위해 자신을 더 적절하게 맞추기 위해 의학과정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지만; 이 추가적인 준비를 위해 필요한 시간은 넉넉히 주어지지 않았고, 해외 업무의 긴급함, 일꾼들에 대한 즉각적인 필요, 그리고 인생에 대한 불활실성 등에 대한 그의 현실 인식은 매우 날카로웠다. 다라서 그는 대체자를 보내기로 결정했고, A.D. Drew 박사가 선정되어 이 당시에 Owen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

Owen 박사는 버지니아의 대학에서 그의 의학공부를 마치고 해당 학교에서 그의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는 그의 과정에서 원목으로 섬기고 있었다. 뉴욕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그는 한국 행 배에 몸을 실었고, 1898년 도착했다. 의료 선교사로 지명되었기에 그는 Eugene Bell 목사와 목포로 파송되었고, 거기에서 사역이 막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거의 4년을 의료봉사에 사역을 하며 번듯한 진료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 진료소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으며, 역에 있는 유일한 의료건물이다.

1900년 12월, 그는 북한에서 장로교 선교의 활동적인 일원인 Georgiana Whiting 박사와 결혼했다. 그녀는 그와 함께 네명의 자녀를 낳았다; Mary, Ruth, Dorothy 그리고 그의 사후 한달 뒤에 태어난 갓난아이다.

사업과 건강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졌던 1년 간의 휴가를 마치고 1903년 10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의 생애를 전도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이 선택은 그가 역에서 유일한 남성이었기에 전도사역에 깊게 관여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교육과 기질적으로 모두 자격을 갖추게 된 앞선 일년 동안의 그의 업무의 특성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목포에서의 또 다른 일 년의 사역 후, 그는 1904년 가을에 Bell과 함께 광주에 새로운 역을 개설하라는 지시와 함게 내륙으로 파송되었다. 이 곳에서 그는 그가 죽기까지 전도사역, 말씀 선포, 교육, 심방, 때로는 의료분야에서의 도움의 손길을 제공하며 성공적인 사역에 헌신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할 무렵, 그는 그가 4월 한 달 동안 완성시킨 모든 한국의 주일학교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의 사역의 이 기간 동안,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남쪽으로 대단한 사역의 확장을 이뤘고, 이곳에서 그는 수백명의 지지자들을 가진 삼깁 여개의 그리스도인 그룹을 만들었다. 그는 그 지방에서 가장 큰 선교영역에서 헌신하였으며, 이것은 지난 이년 동안 다른 어떤 지역보다 빠르게 열려진 것이었다. “왜 아빠는 우리 집에 머무르지 않아요?”, 라는 그가 죽기 몇 주 전 그의 작은 딸이 던진 슬픈 질문은 생명의 떡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이 그 밖에 없었던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그의 신실한 노력에 대한 명확한 증거다.

Owen 박사를 완벽하게 묘사한 문구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 신사였다.” 고귀한 가문의 후손으로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과 귀족의 특징을 나타내는 예의바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며, 충직한 친구이자 공감할 줄 아는 리더였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신앙적 경향과 취향은 뛰어났다. 세 가지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그는 뛰어난 기도와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그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였다. 그가 어떤 의구심이 들 때에도, 그는 그것을 절대로 표출하지 않았다. 그와 순회여행을 다니는 것은 특권이자 영감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그의 뛰어난 영성과 하나님께 의존하는 모습에 영감을 받고 감명을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그에 관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세부사항들은 대부분 맡겨주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그에게 주어진 책임을 피하지는 않았으며, 그는 그가 싸워야 할 무기의 효용성을 무수히 증명해왔다. 그는 한국인들을 사랑했으며 그들과 함게 있기를 좋아했다. 자신의 “사랑채” 또는 객실에서 성경공부나 찬손을 위해 그들과 만나는 것만큼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었으며, 그는 밤마다 계속 하곤 했다.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선교에 있어서 더 신실하고 결정적인 순회전도자는 없었기에, 그는 원거리 사역지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종종 자리를 비웠다.

사람의 눈으로 그의 죽음을 바라볼 때, 이것은 곧 이어진 우리의 또 다른 베테랑 Mr. Junkin의 죽음과 함께 하기에 선교에 있어서 희생 불가능한 타격으로 보인다. 후자의 경우와 같이, 그는 아직 젊은 때에 생을 마쳤으며, 무수히 많은 약속은 있으나 시작은 하지 못한 일들만 남겼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선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안다. Owen 박사는 그의 길을 마쳤다. -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일을 마칠 수는 없다 – 그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고, 믿음을 지켰으며, 그는 선한 고백을 증언하였으며, 그는 면류관을 받았다.” 남겨진 우리에게,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진 우리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사람을 집으로 부르시는 우리 하늘 아버지의 신비로운 역사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시간이 어쩌면 그분의 뜻을 약간은 드러내 줄지 모른다 현재에 있어서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아직 낮이라 불리울 때, 곧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니” 신실함과 활동에 있어서 더욱 결심을 내어야 할 소명이며, 집에 거주하는 남녀 모두에게 일어나 자신을 드려 이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그는 그 자신을 아끼지 않고 그의 주인을 사랑했으며,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도 아기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하는 일을 위해 오히려 이것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이 시작한 일을 감당하라는 나팔소리다.

“영혼을 구하는 자는 현명하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추신 : 위의글은 호남지역의 주요 지역에서 교회들을 개척한 의사이기도 했던 오웬(한국명 : 오원/ 오기원)선교사를 추모하는 글이다.

3. 오웬 선교사의 선교와 안식
오웬은 초기에 목포와 광주에서 의료 선교를 병행하다가,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유질 벨과 함게 전도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화순, 광양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광주 송정리교회(1901), 해남 선두교회(1902), 광주 양림교회(1904) 등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빡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J.F. Preston), 맥컬리(H.D. McCallie), 코잇(R.T. Coit) 등과 여로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한 달 이상을 집을 비우는 일이 허다했다.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다 보니 과로가 겹치고, 기후나 풍토에 적응해 가는 중에 몸이 쇠약해져 치료차 일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얼마 후에 다시 돌아온 그는 1904년 12월 유진 벨 목사 가정과 함께 광주로 이사해 광주선교부를 개설하였다.

4.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조지아나와의 결혼
1900년 12월 12일에 서울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조지아나(Geogiana W. 1896 – 1952)와 결혼식을 올렸다. 의료 경험이 풍부하고 유능한 조지아나와 결혼함으로써 목포선교부는 더욱 힘을 얻어 활발해졌다.

5. 문둥병과 빈민가 사역
1905년 읍성 북문 안쪽에 ‘북문안교회’가 세워졌고 숭일학교 수피아여고가 건립돼 근대교육의 기틀이 되었다.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위치한 오웬 선교사의 집 주변에는 당시 양림천의 거지들과 문둥병 환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6. 오웬 선교사의 사역
1898년 11월 8일 배유지 목사가 기다리던 목포에 부임하였다. 그후 1904년 2월남장로교 한국선교회로부터 배유지 목사와 함께 광주선교부 개설요원으로 발탁되어 12월 25일 광주의 첫 예배 이후로 광주남부 지역과 전남 동부 지역(순천, 여수, 보성, 고흥, 광양, 화순, 장흥, 강진) 등지를 책임 맡아 선교의 열정을 쏟았다. 그는 이 두지역을 할당방아서 혼신의 힘을 다하였는데, 1905년 9월에 모인 선교사 연례대회에서 그 동안 선교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회집 장소는 여덟 곳이며44명의 세례교인과 119명의 요리문답 교인이 있다. 지난해(1904년)에는 28명의 세례와 54명 요리문답 교인을 받아 들였으나 금년 (1905년)에는 26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88명을 요리문답 교인으로 받아들였다."

오기원 목사의 헌신적 선교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열정으로 목포에 있는 목포교회를 비롯해서 송정리교회, 해남 선두리교회, 보성 신천리교회, 월곡교회, 양동교회, 운림리교회, 광주교회, 오나도 관산리교회, 나주 내산리교회, 방산리교회, 장흥 진목리교회, 고흥 옥하리교회, 화순읍교회, 광양읍교회 외에도 15개처를 개척했다

1905년 동안에 오기원 목사는 잉게교회, 바다등교회 그리고 구소교회와 나주교회를 집중적으로 선교했으며, 구소교회의 상황을 보고하였는데, 32명이 문답하고, 5명이 세례를 받고, 18명이 요리문답 교인이 되어 46명이 된다고 하였다. 이뿐 아니라 장흥, 보성, 낙안, 능주, 동북, 화순, 순천, 광양, 구례, 남평까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달력과 서적을 판매하였다.


7.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후
여행을 위해 광주로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홍에 도착한 오웬은 주일날 아침부터 격력한 오한이 왔다. 교우들이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걸음을 재촉했으나 수요일 새벽 2시에야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윌슨(R.M Wilson)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목포 포사이드(W.H. Forsythe)의사에게 전보하였으나 그가 도착하기 전에, 광주에 온지 5년 만인 1909년 4월 3일 급성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한편 전보를 받고 목포에서 급히 배타고 영산강으로, 다시 나주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던 포사이드 선교사는 길가의 죽어가는 문둥병자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지체해 오웬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광주 남구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내에 있는 23인 선교사 묘지에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23인의 선교사가 잠들어 있으며 그 중 1분은 한국인이다. 그리고 기독병원 간호전문대학 안에 있는 오웬기념각(광주유형문화재 26호)은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William)을 기억하기 위하여 미국 친지들이 보내 준 돈으로 1914년에 건립되었다. 오웬 선교사의 뒤를 이었던 쉐핑(서서평) 선교사가 이 건물에서 조선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 성경학교를 만들었고 간호전문인을 양성하는 학교를 만드는 등, 이곳에서 한국 의료역사의 큰 꿈도 이루어지고 기독교 선교역사의 미래도 펼쳐졌다. 지금은 기독간호대학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吳 牧師)’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 ‘님’이라는 존칭 없이 ‘吳 牧師’라고만 새겨져 있다. 이처럼 그는 인생의 황금기에 조선에 와 친숙하고 가깝게 다가서며 예수의 좋은 친구로 이 땅 사람들의 좋은 친구로 섬기다가 마흔 두해 짧은 삶을 남기고 떠났다.

오웬기념각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7-1

7. 오기원 선교사 기념시
<순천 선교의 개척자>
광주선교부에 부임한 오기원 선교사
전남 선교에 큰 역할을 하면서
순천 선교구역 배정을 받아
보성, 고흥, 광양, 여수로
말을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인지래르 발굴하고
지원근 조사와 보성 지방 전도하고
조상학으로 순천지방에 전도케 했네

복음 진리를 가르치는 목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로 전도하여
더욱 효과적인 선교가 이어지면서
선교의 불꽃이 활활 타올라
선교사 주재 전에 31교회 개척되어
비약적인 성장이 이뤄졌나니
선교사들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어둡고 미개한 100여년전
좁은 들길 험한 산길 가난한 땅을
걸어다니며 선교한 것은
기적이요 신화적 역사이어라

선교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요
성령이 충만하여 가슴 불길로 타오르고
발로 뛰어다니며 복음 전하는 정열
부귀 명예와 가족을 다 버리고
헌신으로 성숙되나니
오기원 선교사의 정령고 비전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뤘어라
존귀와 영광 세세토록 받으리로다.


<영원한 나라로>
부임 이래 광주선교부에 불철주야로
뛰어다니며 선교 밖에 모르고
뜨거운 가슴 잠재우지 못해
이백리 떨어진 농촌지역을 방문하여
전도에 몰두하여 피로에 지쳐서
폐렴에 감염되어 주께로 가셨으니

정열적이며 헌신적인 선교의 얼
광주 선교 묘역에 고이 잠드시고
그 얼을 이어받은 부인 사남매 아이들과
귀국을 거절하고 광주에 남아
뒤를 이어 선교한 선교사 가족이었네

그는 가셨으나 선교의 얼로
한국 교회가 성장하였고
세계로 뻗어가는 밑거름이 되었나니
이 땅에 영원히 영원히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있으리.

8. 조지아나 화이팅
에비슨의 미국의 선교부에 선교사에 대해서 요청했다. 에비슨은 환자들을 돌아보는 일 뿐 아니라 한국 여성을 간호사로 훈련시키기 위해서 휼륭한 간호사 두 명을 보내달라는 요청도 수락해 주었다. 하지만 선교부는 두 명의 간호사가 아니라 한 명의 간호사와 한 명의 여자 의사를 보내주었다. 안나 피 제이콥이라는 간호사는 훌륭하게 일을 했지만 불행히도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꽃다운 나이에 머나먼 이국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조지아나 화이팅이라는 여의사도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그녀가 남장로회의 의료 선교사인 오웬 의사와 결혼해서 호남 지방으로 떠나는 바람에 에비슨은 다시 혼자 남게 되었다. 조지아나 화이팅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배재학당의 학생이 바로 나중에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 학생이었다. 오웬 의사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버지니아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의료선교사였다. 부부이자 선교사인 오웬과 화이팅은 목포와 광주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펼쳤는데, 남편 오웬은 피로가 겹친 데다 급성 폐렴에 걸려 1909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하면서 그를 양림동에 있는 선교 동산에 묻었다.

지금도 광주 양림동에는 그를 기념하여 세운 오웬 기념각이 있다. 오웬 선교사는 생전에 배우러 오는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할아버지 기념관’을 짓고 싶어했다. 그의 사후에 ‘윌리엄 오웬과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여’ 1914년에 세워진 건물은 광주의 문화 활동의 중심점이 되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이다.

조지아나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홀로 남아 의료 선교 활동을 하다가 나이가 들고 건강이 학화되자 귀국하게 되었다. 훌륭한 의사였던 조지아나가 제중원을 떠나자 에비슨은 선교부에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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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한 학기 매우 고생하셨습니다. 기다려지는 수업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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