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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Samuel, Jane(1871-1945, NP)

닉네임
유세형
등록일
2017-06-27 22:51:40
조회수
2829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70_2015210105_유세형.hwp (2168320 Byte)
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M0070 Miss Jane Samuel


I. 기본사항

Samuel, Jane (새뮤얼 제인 /삼열/ 미국/ 미북장로회)
1. 이름 : Samuel, Jane /새뮤얼 / 한국명 : 삼열
2. 생몰연도 : 1871-1945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북장로교
4. 선교기간 1903.02~ 1927.
5. 연표
1903.2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선천선교부에 부임
1910. 선천여자성경반 강사로 여성교육에 참여
1910. 의주로 이주하여 의주 여자선교사업 개척
강계, 안동에서 여자 사경회 지도, 여자전도회 조직
1912. 선천여자성경학교 설립, 교수로 신학가의
평양의 숭의여학교 성경교사로도 재직
1927. 선교사직 사임하고 귀국
1945.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사망

6. 가족사항 – 없음


II. 선교사 소개 : 새뮤얼 제인 (Samuel, Jane, 1871-1945)

1. 미국 북장로회 여선교사, 한국명 삼열.
그녀가 한국에 오기 전에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필자가 찾아낸 자료에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1902년 미국 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서 1903년 2월 내한하였다. 먼저 그녀가 오기 전에 한국 선교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녀의 선교가 너무나 시기적절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생의 100년 중에 1/4에 해당되는 25년가량을 한국에 헌신한 그녀는 어떤 선교인생을 살았는가? 필자의 얄팍한 지식으로 판단하기에, 그녀의 인생은 갈급한 한국여성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하고 싶다.

2. 선천의 배경, 선천업교회의 부흥
새뮤얼 제인(한국명 삼열)이 오기 전까지 선천은 상당히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선천에는 북장로회선교사들이 오기 이전에 이미 1897년에 교회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즉 신천북교회의 전신교회인 신천읍교회이다. 의주와 평양 등지에서 복음에 강한 양전백, 노효준, 나병규등의 전도로 고읍의 노국전등 노씨 일가와 조규찬 등의 많은 교인들이 생김으로 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신천읍민들의 핍박과 예배방해로 예배 처소를 읍 밖으로 내쫓기는 등 곤경을 겪었으나, 곧 많은 이들이 입교하므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1898년 봄에 30평짜리 기와집을 새 예배당으로 개수했다.

1898년 휘트모어 선교사의 부임으로 교회는 활기를 띄었고, 1902년 2월에 열린 선천 남자사경회로 많은 부흥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휘트모어는 양전택을 장로로 장립하므로 신천읍교회는 조직교회로 발전하였다. 1906년에는 교인수가 1400명으로 증가하므로 인근 군내 5개지역에 지 교회를 개척, 교인을 분립하였고, 그해 10월에는 대규모 새 예배당의 헌당을 보았다. 1910년과 1911년 사이에 신천의 두 번 째 교회가 설립된 바, 곧 신천남교회이다. 1911년 1천 2백 명의 수용의 대 예배당을 건축하고 신천읍을 가로지르는 장천 이남의 교인들을 수용하였다. 이로써 신천읍교회는 신천북교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당시 두 교회 주일학교 학생수만 약 2500여명, 예비학생이 200여명에 이르는 대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두 교회만으로는 지속적인 성장과 부흥을 거듭하는 선천의 기독교인을 수용치 못하므로 1930년 북교회는 중앙교회를, 1931년 남교회는 신천동교회를 각자 분립하였다. 이들 교회도 분립 당시 이미 400여명의 교인을 지닌 대교회로 이후에도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3. 이른 비와 늦은 비 같은 그녀의 인생
바로 이렇게 선천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교육에 대한 수요와 성경공부의 필요성이 절실 할 때 새뮤얼 제인은 1903년 2월 내한하여. 그해 가을 선천 선교부에 부임하여 선임자 체이스(M.L.Chase)와 함께 여성 전도사업에 헌신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교육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을 때, 이를 채워주는 이른 비와 같은 역할로 새뮤얼 제인이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선임자 체이스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1896년 10월 19일 내한하여 부산에 부임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최초의 독신여성 선교사로 이빈 부부인과 함께 부산지방 교회를 순회하며 여성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였다. 그녀는 1898년 겨울부터 1899년 봄까지 3개월가량 대구에서 아담스 존스 부인과 함께 대구지방 여성전도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01년 12월 평북 선천으로 입지를 옮겨 전도상법을 주관하였다. 그러던 그녀가 1911년 건강의 악화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여 1938년에 별세하였다.

따라서 사뮤엘 제인은 1903년에 시작된 선천 여자성경반의 강사로 여성 교육에 참여하였는데 1908에는 총 16학급, 2500명을 혼자 가르치기도 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사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1910년 선교부의 명으로 휘트모어 선교사 부부와 함께 외주로 이주하여 의주의 여자선교사업을 개척하였으며 그해 강계 안동에도 파송되어 여자사경회를 지도하고 여자전도회를 조직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912년에는 동료선교사 헬스트롬, 코빙톤과 함께 선천여자성경학교를 설립하여 교수로 신학을 가르쳤다. 선교지에서 갈급한 심령에는 이른 비와 같이 적실한 사역을 감당한 그녀는, 선교 막바지에는 선교본부에서는 중요한 자리에서 오랜 기간 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따라서 동료 여선교사들이 건강을 잃어버리고 교향으로 귀국하는 그때에도 뒷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선교본부의 수요와 필요를 감당해 내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늦은 비와 같은 그녀의 존재를 살펴볼 수 있었다.

4. 여성이 천시 받던 시대에 탁월한 여성지도자의 모습
그녀의 주요사역은 의주, 강계, 숭의여학교등 다양한 곳에서 활동했지만 가장 길게 사역을 감당한 곳은 선천여자성경학교에서였다. 특별히 그녀의 편지를 통해서 선천여자성경학교에서의 생활과 교육, 이를 향한 선교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1) 먼저 그녀의 편지 속에서 한국 여인들을 향한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한국의 여자가슴 속에 요동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백여 명의 여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갈망했으며,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를 위해 살고, 그들의 삶속에서 고난과 영격을 이겨내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고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동시에 특별히 그녀는 한국여인들이 글을 배우지 못하고, 성경을 읽지 못하는 것에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늙은 여인은, (그리고 많은 이 같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60세였습니다. 그녀의 두터운 손은 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이 얼마나 수고스러운 삶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도 성경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는데, 젊은 여자들이 읽고 그녀의 성경을 이해하는 것을 왜 기대하지 않습니까?”

2) 그러면서 그녀의 관심과 애정은 성경공부에 대한 열의로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믿기 전까지 매우 소수의 사람만이 글을 읽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을 받아들였을 때,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했습니다.”


3) 그녀의 편지 속에 나타나는 선천여자성경학교에서의 일상모습은 다음과 같다.

“이곳에서 매일의 일정은 단 어디서든지 한 가지입니다. 성경일 읽고 성경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모든 것을 읽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아침 7시 30분 아침기도회를 시작합니다. 9시에는 정교교리 교육을 수행합니다. 만약 그날 유력한 조력자가 있다면 그 아침연구시간은 나누어 진행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12시까지 저와 함께 합니다. 그리고 오후 수업을 듣기 전까지 휴식과 점심시간을 한 시간 정도 갖습니다. 마칠 때 즈음에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노래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어린 소녀들이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전에는 우리를 위해 체조와 운동, 산책을 합니다. 그리고 저녁시간에는 몇 가지 첨예적인 주제를 가지고 교회지도자나 선택된 사람이 앞에 나와서 토론을 진행합니다.“

4) 마지막으로 그녀의 편지 속에서 사역에 대한 기대와 만족이 느껴진다.

“우리의 선천 클래스는 지금까지 열린 적 없었던 가장 큰 수업입니다. 399명이 여인들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년에 큰 수업이 열릴 수 있는 새로운 교회를 기대합니다.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운 것은 여인들의 발전입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5시간씩 일주일 반 동안 만났고 7월 23일까지 만났습니다. 히브리서는 한 장씩 공부했습니다. 이들의 소감을 들어볼 때 그녀들이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몹시 노력한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수업은 바쁜 농업과 비가 오는 계절에 진행되었지만 12명의 여성은 모두 정기적으로 참석했습니다. ”

4. 그녀의 마지막 모습
이후 그녀는 초창기 평양의 숭의여학교 성경교사로도 재직하였다. 초창기 평양의 숭의여학교 성경교사로도 재직한 바가 있는 그는 1927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으며, 1945년 오하이주 콜럼버스에서 별세하였다. 이처럼 그녀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여성’과 ‘성경’ 그리고 ‘학교’였다. 여성에게 성경을 들고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인생이 그녀의 인생을 관통하였다. 따라서 여성이 있는 곳에, 성경을 가르쳐야 할 수요와 갈망이 있는 곳에 그녀의 인생은 이른 비와 늦은 비와 같이 사용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메마른 한국 땅에 여러 여성들의 꽃피운 실로 아름다운 인생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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