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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Engel, George O.(1864-1939, AP) / Engel (Mrs.); Brown, Ag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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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재
등록일
2017-06-27 23:11:34
조회수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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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0062_2015210065_최형재.hwp (1481728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겔슨 엥겔(G, Engel) / 한국명: 왕길지(王吉志)
2. 생몰연도: 1864.10.10 - 1939.5.24 독일에서 출생
3. 학력: 스위스 바젤에서 미술 및 신학 공부, 영국 에든버러에 유학
4. 출신 및 소속: 독일, 호주 장로교 선교사
5. 한국선교기간: 1900.10.29 - 1937.9 (37년간)
6. 연표
1864.10 독일 남부 위템베르크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남
1889.8.29 바젤선교교육원에서 3년간 신학과 선교 교육을 받음
1892.6 바젤 선교회에서 목사안수
인도 푸나(Poona)에 선교사로 파송 (6년간 활동)
1894.12.19 호주 감리교 목사의 딸 클라라 바스(Miss Clara Math)를 만나 결혼
1898 질병으로 아내의 나라인 호주 빅토리아주 스타웰(Stawell)로 이민
호주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 초중등학교 교장(14개월)으로 봉직
1900.10 빅토리아 장로교회 파송 선교사로 부산항에 도착
부산에서 여성선교 사업의 단일화, 지방 사경반에서 성경공부
1902-13 일신여학교 2대 교장으로 봉직
1904 한강이남 최초 심취명을 장로로 장립하여 부산진교회 초대 당회장 활동
1906 평양장로회 신학교 정식 강사
1906.4.2 한국에서 질병을 얻은 아내 클라라 엥겔이 호주 시드니에서 죽음
1907.7.3 선교사 아그네스 브라운양과 결혼
1907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강의
1911. 12 경상노회가 설비되었을 때 초대회장
1913.9.7 한국 장로교 총회 총회장 선출(서울 승동교회에서 모인 제2회 총회) 일년간 활동
1914 부산진교회 담임목사 사임
1916.3.8 평양장로회신학교 정식교수(교회사와 교육학, 헬라어와 히브리어 강의)
1916.9.20 경남노회 조직 초대와 2대 노회장
1917 평양신학교의 이사겸 정교수로 선정
1918-1921 신학지남 편집 책임(13권 27회 글 기고)
1919 평양신학교 전임교수로 청빙 평양으로 이사
1920 개역성경 번역위원으로 활동(18년간)
1920-23 숭실전문학교에서 희랍어, 히브리어 강의
1937.9 31년간 봉직했던 평양신학교와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가족과 멜버른으로 출국
1939.5.24 멜버른에서 생을 마감
1954.8.16 두 번째 부인 아그네스 엥겔 멜버른에서 생을 마감
7. 가족사항
부인: 첫 번째 부인 클라라 엥겔, 사별 후 두 번째 부인 아그네스 엥겔
자녀: 겔슨(Gelson), 하버트(Herbert), 도라(Dora), 프랭크 엥겔(Frank Engel)


II. 선교사 소개 - 겔슨 엥겔(1864-1939)

1. 성장 배경과 한국선교동기

왕길지 선교사의 본명은 겔손 엥겔(Gelson Engel)로서 1868년 남부 독일 비템베르크(Wüthemberg)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가 4살 되던 해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했다. 엥겔은 6살에 뮤링엔(Murlingen)에 있는 일반교양학교(the College for Classical Study)를 다녔고 뉘팅엔(Nütingen)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후에, 교사대학(Lehrer Seminar)에서 공부했다(1883-88). 그는 자신의 천직이 선생인 것을 일찍 깨달은 것이다.
엥겔은 경건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그의 고향 비템베르그는 독일 경건주의의 중심지였다. 독일 경건주의는 17세기 루터교 정통주의가 지닌 딱딱한 교리주의와 형식주의에 반발하면서 신앙의 내면화, 개인의 신앙체험과 변화, 기도와 성경읽기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경건한 삶을 강조했다. 이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에 모라비안 선교운동과 비템베르크 경건주의로 연결되었다. 비템베르크 경건주의는 세계적인 신약성경학자 요한 벵겔(Johann A Bengel, 1687-1752)을 배출했고, 1815년에 바젤선교회(Basel Mission)을 세운 크리스천 불름하르트(Christian Blumhardt, 1779~1838)를 배출했다.
이러한 고향의 분위기는 엥겔이 성경연구과 선교에 관심을 갖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에빙겐(Ebingen)에서 모였던 선교대회에 참석한 후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21세에 바젤선교회훈련원에 입학해서 3년간의 선교훈련을 받았고, 1892년에 인도의 푸나(Poona)에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는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호주 감리교목사의 딸 클라라 바스(Miss Clara Math)를 만나 1894년에 결혼했고, 그들은 평생을 인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1898년 감리교선교부로 이적을 했으나 곧 질병에 걸려서 요양을 위해 호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엥겔은 빅토리아주 스토웰(Stawell)에서 초중등학교인 하버드 칼리지(Harvard College)에서 교장으로 14개월을 섬겼다.
그 당시 부산에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여선교회연합회가 파송한 4명의 미혼 여선교사들과 같은 교단의 청년연합회(YMFU)가 파송한 앤드류 아담슨(Andrew Adamson) 목사가 호주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선교사들은 아담슨 선교사와의 갈등 때문에 그의 감독을 받을 수 없다고 사임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교단의 해외선교부와 여선교회연합회는 아담슨 목사를 대신해서 여선교사들을 감독할 수 있는 목사선교사를 물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엥겔은 한국선교사에 자원하였다.
엥겔이 한국선교사를 자원하게 된 동기는 세 가지였다. ⑴ 그의 부인 클라라와 한국선교사 아그네스 브라운(Miss Agnes Brown)은 1895년 멜버른에서 함께 선교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클라라는 한국선교에 대해 깊이 알고 있었다. ⑵ 1899년 4월 멜버른을 방문한 아담슨 목사는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싶어 하는 엥겔에게 한국선교를 추천했다. ⑶ 엥겔은 많은 선교사를 필요로 하는, 살아있는 선교지 한국에 크게 소명감을 갖고 있었다.

2. 전도자와 목회자

엥겔선교사 부부와 세 명의 아이들은 1900년 9월 19일 일본선박 “카수가 마루”호를 타고 멜버른을 출발해서 10월 29일 오전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풍습을 익혔다. 그는 그달 말에 한국어 발음을 연습해서 축도를 시도했고 3~4개월이 지난 1901년 초에는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있어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자신의 한국 이름을 왕길지(王吉志)로 정했는데 “엥겔”과 “왕길”은 발음이 비슷했고 그 이름에는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왕길지 목사는 1919년 평양으로 이사하기까지 부산에서 18년 동안을 순회전도자로 목회자로 헌신했다. 당시 아담슨 목사는 경남의 서부지역을 담당했고 자신은 동부지역 울산, 기장을 순회전도 했다. 그는 순회전도여행을 하다가 1904년 10월 일본인 하급노동자들에게 러시아 스파이로 오해를 받아 집단 구타를 당해 생명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다. 1909년도 선교보고서는 왕길지 목사가 26개의 지역교회를 관할하고 있고 울산 지역에서는 6개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1914년까지 부산진 교회의 담임목사로 봉직했고, 1916년도에도 언양의 12개 교회와 김해의 10개 교회를 감독하고 있었다.
경남 최초의 한국인 목사는 심취명이었다. 그는 1894년에 경남지역의 첫 번째 세례자가 된 심상현의 동생이었는데, 형의 죽음을 보고 예수를 믿고 1904년에 경남의 첫 번째 장로가 되었다. 왕길지 목사는 심취명 장로를 권고해서 평양신학교에 보냈고, 1914년 그를 자신의 후임으로 부산진 교회 목사로 세웠다.

3. 교수사역

왕길지 목사는 1902년부터 평양장로회신학교와 인연을 맺었다. 평양신학교는 일종의 연합신학교(Union Seminary)였기 때문에 호주 선교부는 왕길지 목사를 교수로 파송했다. 1906년 그는 정식강사가 되었다. 그 당시 신학생들은 1년에 3월에서 5월까지 3개월만 수업을 했고 나머지는 목회와 실습으로 대치했다. 대신 5년의 긴 학제를 운영했다. 왕길지 목사는 1916년 3월 8일부터 평양신학교의 정식교수가 되었고 전 가족이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그 해에 그는 교회사와 교육학을 강의했고 5월 한 달은 44명의 목사들이 참가한 학급에서 〈어거스틴의 생애와 교리〉를 특별 강의했다.
1916년 제5차 장로교 총회는 평양신학교에서 헬라어와 영어를 가르치기로 결정하고 그 책임은 왕길지 목사에게 넘어왔다. 그는 평양신학교 최초로 영어강독과 성서언어를 가프친 분이다. 훗날에는 주로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 당시 성서언어 교재는 영어로 되어 있었고 오직 영어를 읽을 수 있는 대학졸업자들이 성서언어 수업에 참가했고 한 학급은 5~6명에 불과했다. 같은 총회에서 왕길지 목사는 조선예수교회 사기편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17년 그는 평양신학교 이사겸 정교수로 선정되었다. 1917년 평양신학교는 학술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을 발간할 계획을 세웠다. 왕길지 목사는 그 첫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18 ~ 1921년까지 총13권을 발간하는 동안 편집책임을 맡았고 총 27회의 글을 기고했다. 신학지남은 수업시간이 짧은 신왕길지 선교사 Rev_Gelson_Engel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목회현장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을 공급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왕길지 목사는 원칙에 철저하기로 소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솔직하고 마음이 여린 분이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평양신학교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왕길지 목사는 “목사될 사람들이 무슨 시위냐?”하고 학생들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이때 학생들은 민족정의를 무시하는 왕길지 목사는 물러가라고 외치며 교내 시위를 일으켰다. 이 노교수는 학생들에게 “내가 잘못하였지요. 용서하여주세요”하고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4. 언어학자

왕길지 목사는 평생을 언어공부를 즐겼다. 왕길지 목사에게 히브리어를 배웠던 방지일 목사는 그가 “16개 국어를 통한다”고 증언했다. 그는 고전헬라어와 신약성서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의 성서언어와 고전어, 모국어인 독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 등 서방 현대 언어, 그가 인도선교사시절 획득한 마라티어, 흰디오, 우르드어 등 인도의 방언,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후일 일본어도 독학을 하여 불편 없이 사용하였다. 왕길지 목사는 한국의 풍속과 격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영문잡지 《코리아 뷰》(The Korea View)에 소개했다. 예를 들면 “여인의 지혜”와 “한국의 장사” (1905.2), “영리한 도둑”과 “호랑이보다 무서운 곳감”(1905,7), “나무꾼과 호랑이와 토끼”(1905, 12)등이 있다. 또 한국의 수수께끼들도 소개를 하고 있다(1906. 2).
그의 언어사용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 그는 평양신학교 도서관장을 지냈는데, 하루는 채플시간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광고했다. “원래 서책은 무족(無足)이라 자래(自來)하거니와 자거(自去)하지 못하는데 책이 없어졌지요.”

5. 교회지도자

왕길지는 공교회 조직에서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경남지역의 노회조직 발전에 주춧돌을 놓았다. 왕길지 목사는 내한 이후에 북장로교 선교부와 선교지 분할협력에 적극적인 역을 했다.
1911년 12월에 경상노회가 설비되었을 때 왕길지 목사는 초대회장이 되었고 그는 4차례 연속적으로 노회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그는 노회 안에 혼재된 직제를 정비해서 목사, 장로, 영수, 집사로 통일시켰다. 1912년에는 한국장로교회가 총회를 구성하였고 초대 총회장에 언더우드 목사가 선임되었다. 그 다음 제 2차 총회에는 왕길지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기간 호주선교부는 4개의 장로교선교부 중에서 가장 연약한 조직이었지만 왕길지 목사가 노회장과 총회장으로 임명된 것은 아마도 미국 선교사들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14년 북장로교선교부가 경남에서 완전한 철수를 하는데도 왕길지 목사가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또한 그는 1916년 6월에 경상노회를 남북노회로 나누자는 헌의 안을 발의해서 1916년 9월에 창립되는 경남노회의 초대회장이 되었고 1917년 12월까지 연속 3번의 노회장을 역임했다. 왕길지 목사는 1912년부터 1920년까지 경남노회 총대로 총회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1921년부터 평양노회소속 총대로 총회에 참석했고 1925년부터 1934년까지는 총회총대가 되지 못했다. 1935년에 다시 평양노회 총대로 참석했다.
1938년 왕길지 목사는 70세가 되어 31년간 봉직했던 평양신학교와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멜버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듬해 1938년 5월 2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인 아그네스 엥겔은 1954년 8월 16일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왕길지 목사의 아들 프랭크 엥겔(Frank Engel)은 1911년 한국에서 태어났고 평양에서 성장했다. 그는 멜버른 대학을 졸업하고 오몬드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호주와 아시아의 유명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1950년대 초반에 호주 기독학생운동(SCM)의 상임총무를 역임했고, 1959-61년까지 세계기독학생연맹의(WSCF) 동아시아총무를 역임했다. 그리고 호주교회협의회의 총무와 의장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멜본신학대학(MCD)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작성일:2017-06-27 23:11:34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