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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Underwood, John Thomas(1919-1994, UP) / Underwood, Jean Welch

닉네임
서반석
등록일
2017-06-28 09:54:17
조회수
2658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2_2011210027_서반석.hwp (3384320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 John T. Underwood / 언더우드 / 한국명 : 원요한(元約漢) / 미국 / UP
2. 생물연도 : 1919. 3.30. - 1994. 3.22.
3. 출신 및 소속 : 서울, 북장로교회
4. 한국 선교 기간 : 1947.10.19. - 1994. 2. 1.
5. 연표
1919. 3.30. : 서울에서 쌍둥이로 출생
1937(36). - 1941. : 미국 해밀턴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
1037. 6. : 서울 외국인학교 졸업
1937. – 1941. : 미국 해밀턴 대학(뉴옥 클린턴 대학)에서 문학, 철학 전공
1944. 3. 1. : 호레이스 H, 동생 제임스 H와 함께 미연합장로교 나소교회에서 목사안수
1944. - 1946. : Lafayette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부목사로 사역
1945. : 프린스턴 신학대학 졸업, 예일대학 1년 한국어공부
1946. 7. : 미국 장로교 한국의 선교사 파송,
1946. - 1947. : 미 군정의 구제를 위한 개신교 대표로 활동
1947.10.19. : 한국입국
1947.12.31. : 청주 선교부 배속, 청주 성서학원 교수(원장)으로 활동, 농촌 지역 순회 시작,
시골 교회 당회장, 충청북도 지역 복음화 노력
1954. 9. 6. : 진 웰치와 결혼
1955. : 대한예수교장로회충북노회 부회장
1967. 9. 5. : 광주 호남신학교 교수로 임명, 성서학 교수
1993. : 은퇴
1994 2.1. : 호남신학대학 교수 사임
1994. : 아내 진이 퇴직을 한 다음 한국을 떠남
1994. 3.22. : 74세 나이로 인생 마감
6. 가족사항
조부 : Underwood, Horace Grand
부 : Underwood, Horace Horton
모 ; Underwood, Ethel Van Wagoner
형제
Oldest brother : Horace G. Under wood
2nd brother(twin) : James H. Underwood
3rd brother : Richard F. Underwood
sister : Grace Harkness
부인 : Underwood, Jean Welch
아들 : James H., Lay, Thomas A.(2남) 호남신학대학 신학이해 편집부 편, 「신학이해」 제 9집 (1991): 7.

7. 논저
“Some Relfection on Faddism in Biblical Criticism” 「신학이해」, 제1집(1983)
“First Thessalonian-Paul’s Earliest? or Very Late?” 「신학이해」, 제4집(1986)
“Reflections upon the Words, “Discipline” and “Retaliation” in the Scriptures”, 「신학이해」, 제6집(1998)


Ⅱ. 선교사소개 : 원요한(John. T. Underwood)

원요한(John T. Underwood) 옳고 그른 것들에 대한 판단 감각이 강하게 작용하여, 중대사를 결정하거나 행동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가르침과 지도에 대한 자기의 이해력을 활용한 선교사였다. 그가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때 신학교에서는 새로운 방침을 택하여 학생들이 빨리 학업을 마치고 사회로 나아가 군대의 목사가 되던가, 또는 군목으로 나가 자리를 빈 목사님들의 교단을 채우도록 했다. 원요한 선교사의 쌍둥이 형은 해군 군목으로 지원하여 사회로 나아갔지만, 원요한 선교사는 당시 교회의 빈자리들을 채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다. 이후, 그는 미연합 장로교에 소속되어, 1946년 7월 한국선교사로 파송 받았고, 곧 청주선교부에 부임하여 청주성경학원 및 기타 군소 성경학원에 출강하였다. 그리고 청주 지역을 품고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그의 사역지는 이제 우리나라의 역사 현장으로 향하게 된다.

1. 교계와 미군정에 신뢰받았던 선교사
청주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원요한 선교사가 미군정과 당시 교계에 얼마나 신임 받는 사람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만한 기록이 나타난다. 해방 이후 당시 미국 군정청은 천주교단과 개신교단에게 각기 구호품 배급을 위한 행정을 도와줄 사람을 각각 한 사람씩 임명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 행정 경험이 전혀 없었던 청주의 복음 전도사인 원요한 선교사가 교계에서 추천을 받게 되고, 그는 이러한 요청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응해 2년간 티끌만치의 부패나, 편애 없이, 수 만 톤의 구호품과 옷감 배급을 공정하게 잘 수행했다.
또한 1949년 한국 장로교 총회는 안수 받은 선교사들도 다시 교회의 담임목회를 감당할 수 있도록 결의를 했었는데, 청주 북 노회는 세 개의 교회를 원요한 선교사에게 담임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지명했다. 원요한 선교사는 담임목회 뿐만 아니라, ‘밀러 기념 성경연구소’에서 일주일에 21시간 이상, 70여명의 학생들을 성경교사로도 사역을 감당했다. 1960년 이후 총주 동산교회 정훈택 목사가 1961년 4월 19일 소천함에 따라 그해 5월부터 7월 까지 원요한 선교사가 임시당회장을 담당하는 등 지역 교계에서도 깊은 신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교계와 정부, 그리고 지역공동체로부터 신뢰받는 선교사였다.

2. 동족상잔의 아픔을 함께 나눈 선교사
1950년 6월 22일 대천 해변가에서 ‘58번째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 중 Genso 선교사를 제외하고 해외 선교사들 모든 구성원들이 대천 해변에서의 이 연례 모임에 참석 했었는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대천 해변에서 이러한 소식을 접하게 된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애드워드 애덤스, 프란시스 킨슬러, 호레이스 언더우드, J. T 언더우드(원요한)를 제외하고, 자동차, 기차, 보트로 대피를 했다. 애드워드 애덤스, 프란시스 킨슬러, 언더우드 일가는 그 전쟁의 화마 속에서,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국에 남아있기를 결단했던 것이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단 15일 만에 서울에서 100마일이나 떨어진 청주(당시 인구 약 7만 5천명)로 진격하게 되었다. 청주를 점령한 공산주의자들은 1950년 7월 10일 청주에 설치되어있는 철도의 창고들을 폭격하기 시작했고, 폭격 당시, 원요한 선교사는 대천과 경기 지역에 있었던 선교사들을 일본으로 대피시킨 후, 다시 청주로 돌아와 그 폭격 속에서, 해리 힐(Harry Hill)과 함께 65명의 난민 기독교인들과 고아들을 호송하여 대구로 피신하였다.
대구로 피신 하던 원요한 선교사 일행은 당시 대전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24사단 사단장 윌리엄 에프 딘 소장을 돕고 있었던 형제 호레이스 언더우드를 만나기 위해 대전에서 멈추었었다가, 대전 전투가 발발하게 되고(1950년 7월 14 – 21일), 인민군의 공격에 의해, 대전 사단 붕괴와 총사령부의 지휘권이 분리되게 되자, 원요한 선교사는 일행들과 함께 1950년 8월 24일 창녕까지 피신했다. 원요한 선교사는 창녕에서 일주일을 머문 후, 다시 대구로 이동하였고, 고아들은 선교사들의 주거처에서 살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그는 사단장이 포로로 잡혀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따르던 피난민들과 고아들을 무시하지 않았고, 전쟁 속에서 쉼을 얻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의 거처를 제공하는 등, 전쟁의 화마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선교사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1950년 9월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북쪽으로 다시 추방되면서, 원요한 선교사는 청주로 돌아왔다. 그는 잠깐의 기간 동안 청주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심각한 박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춘섭 목사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처형 되었고, 곽경한 목사도 종교적인 이유로 투옥되었었는데(300명), 공산주의자들이 청주지역에서 후퇴하면서, 그를 불태워 죽였다는 소식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짧은 시간동안에도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었다. 중공군이 개입하고 전란이 어려워진 시기, 원요한 선교사는 1951년 2월 아버지 원일한 선교사가 과로로 사망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이동했다. 전쟁의 흐름이 워낙 긴박하였기 때문에 청주에서 그가 계속해서 머물러 있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1950년 6월 25 – 1953년 7월 10일 까지 이루어진 3년간의 한국 전쟁은 한국을 가장 호아폐한 나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휴전 협정 : 1953년 7월 27일). 많은 선교사들은 황폐한 서울을 위해 헌신했다. 원요한 선교사 또한 황폐해져 있는 이 서울의 공허함을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그는 이 상처를 예배로 회복하길 원했다. 그는 부활절을 맞아 남산에서 부활절 예배를 공개적으로 준비하였고, 서울 일대에 이 부활절 예배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많은 수가 참여하진 않았지만(8명의 미국인, 6명의 한국인), 남산에서 이루어진 부활절 예배는(Francis Kinsler가 집례), 이슬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 망가진 도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는 기쁨의 예배가 집례 되었다. 부활절 예배는 원요한 선교사의 황폐해진 서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완전히 회복되길 바라는 그 마음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마크 셔벗과 함께 난민 구호물자를 배포하면서, 미 대사관에서 구호물자 배포를 위한 일을 감당하면서, 난민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공급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는 미군정 시절 개신교의 대표로 구호물자를 배급하게 되는 중대한 임무를 맡을 정도로 신뢰받은 인물이었으며,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을 위해 보급품을 나누어주는 정부로부터도 신뢰받는 인물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원요한 선교사는 서울에서 구호 활동을 하던 기간, 1954년 진 웰치 선교사를 만나, 결혼을 하고, 다시 청주로 돌아왔다.

3. 민주화 운동을 함께한 선교사
청주에서 여러 해 봉사를 하고 있던 원요한, 원진희 선교사 부부에게 미연합 장로교는‘선교지역 제도’가 없어짐에 따라, 청주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광주로 이동해서 사역을 감당해 달라는 요청했다. 그 사역은 연합장로교가 직영하고 있었던 호남 신학교로 교수생활을 감당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그는 깊이 기도하며 생각한 뒤 이 새로운 임무를 받아들여 광주에 정착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형은 그의 선교사역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위에서 말한 큰 문제에 대한 결심보다 더 뜻이 깊은 것은 믿음의 소질을 따라 그날 그날 작은 결심을 내리는 것이다. 세세히 생각나지는 않으나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작은 일 마다에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말할 때 결국은 생활 터전에서 믿음의 소질을 발휘하여 두 배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셈이다.

1993년 9월 13일 오후 3시에 열린 광주직할시 의회 사무처 회의록을 보게 되면, “1993년 6월 30일 광주직할시장으로부터 제출되어”, “당 위원회에서는 지방자치법 제 53조의 규정에 의하여 본 안건의 사안의 시급성을 감안하여”, 상정 된 “광주 직할시 명예시민증 수여 동의안” 안건이 등장한다. 광주직할시장이 직접 제출한 이 안건은 호남신학대학교에서 봉직하고 있었던 원요한, 원진희 선교사부부에 대한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기 위한 내용이었다. 광주직할시장과 광주 시의회 의원들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원요한, 원진희 선교사 부부를 명예 시민으로 추대했다.

원요한 교수는 26년간 호남신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목회자 양성에 열과성을 다하여 헌신적인 봉사 선교활동을 하여 왔으며, 특히 1980년 5ㆍ18광주민중항쟁 당시 많은 외국인이 신변의 위험을 느껴 미국대사관으로부터 광주에서 명령까지 내렸으나, 현장을 확인하면서 광주시민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여 광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한 분이며, 원진희 교수는 부군인 원요한 교수와 함께 호남신학대학에 재작하면서 기독교 교육과 영어회화, 그리고 기악지도 등 수많은 학생들을 지도하여 왔으며, 광주직할시립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광주지역 문화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봉사하여온 점으로 보아 지방자치법 제13조 및 제14조와 광주직할시명예시민증수여조례의 규정에 의하여 명예시민증을 수여하는 것은 타당하다는 당 위원회의 위원 전원일치로 원안의결한 것입니다. 

명예 시민으로 추대하는 이유는 1) 교수로 제직하며 목회자 양성을 위해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2)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피신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현장을 확인하며, 광주 시민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이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원요한 선교사가 자신의 선교 내용을 기록한 자서전이나, 문서가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호남신학교에서 함께 교수생활을 했던 송인동 교수(교양학과)는 호남신학교에 봉직하고 있었던 선교사들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발생한 사상자들에 대하여 병실을 제공 했다고 증언한다. 명예시민증 발급에 대한 내용과 송인동 교수의 증언은 원요한, 원진희 선교사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그들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을 감당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송인동 교수가 원진희 선교사가 있는 요양병원을 방문하여, 행한 인터뷰 중, 원진희 선교사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사가 그대로 담겨있는 사진첩 3권을 요양 병원에 들어가는 시간까지 ,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원요한, 원진희 선교사 부부가 광주 민주화 운동 깊숙한 곳에서부터 헌신적인 사역을 행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원요한, 선교사는 한국 근,현대사를 함께했다. 우리 민족이 겪었던 동족상잔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애썼다. 원진희 선교사와 함께 어떻게 보면 청주라는 시골지역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청주에서의 사역이 익숙해 진 시점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사역을 감당하라는 지시에 대해, 순종하여, 광주에서 선교활동과 교수생활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선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애썼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그 아픔의 현장속에서, 현장을 이탈하라는 권고가 있었음에도 광주 시민들을 위해 헌신한 것을 살폈다. 그들은 한국의 다양한 도시에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을 함께 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헌신적인 사역은 교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부 기관에서도 신뢰를 받도록 하였으며, 그 한걸음, 한 걸음은 기독교인으로서 보였어야 할 빛과 소금의 자취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고를 알리는 자필편지를 자신이 임시당회장을 맡았던 한 교회에 보낸다.

주님의 은혜 중 안녕 하시기를 바랍니다. 본인은 크나큰 기쁨으로 “별세입천”(別世入天)을 알려드립니다. 오직 아직까지 사람이 몸을 벋어버린 후에 펜을 드는 법이 없기 때문에 死年月日(사년원일)만 “유가족”에게 부탁 하려고 합니다. 다만, 이러한 장난은 염치없고 예의상 마땅치 못하며 소인의 잘못을 널리 용서 하시면서 나의 기쁨에 참여하시기를 원 합니다. 주 예수 앞에서 만나기까지 내내 안녕히 계십시오.

“나의 기쁨에 참여하시기를 원 합니다. 주 예수 앞에서 만나기까지 내내 안녕히 계십시오.” 자신의 죽음을 기쁨으로 맞아달라는 그의 편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빛과 소금의 삶을 감당한 그의 모습이 잘 담겨있는 것 같다.

선교사소개 : 원진희(J. T. Underwood)
미국 북장로 교회 소속의 여선교사, 교육자, 음악인이었으며, 원요한 선교사의 부인이었던 원진희는 1928년 8월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포모너에서 출생, 1946년 샌안토니오 대학에 입학하여, 1948년까지 음악교육학을 전공하였고, 다시 샌조스 주립대학에서 음악교육학 학사학위(1948-50)를 받았다. 이후 다시 콜로라도 대학에서 음악을 연구하였고(1951), 뉴옥 비브리칼 세미나리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1952-54)하였으며, 1959년 프린스턴신학교에 진학하여 대학원에서 종교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1960) 하였다.
또한 1973년 풀러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연구한바 있는 그녀는 1950년부터 캘리포니아주 스탁튼에 소재한 에디슨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중 소명의식을 느끼고 신학교에 들어갔고, 1954년 9월 원요한 선교사와 결혼하였으며 즉시 남편을 따라 내한, 청주선교부에 부임하였다. 1956년부터 청주 성경학교에서 음악, 성경, 기독교교육 과목을 강의하다 1966년 남편과 함께 광주선교부로 전임하였으며 1967년 이후, 광주 호남신학교 조교수로 봉직했다. 또한 1975-76년에 연세대학교 음학대학의 비올라 지도교수로 출강하였으며, 광주시립교향악단의 비올라주자로서 그리고 광주쳄버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도 맹활약했다.

한국을 깊이 사랑한 선교사(선교, 음악교육으로)
원요한 선교사와 함께 사역을 감당한 것 이외, 그녀의 구체적인 사역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우나, 그녀의 한국에 대한 열정은 그녀의 책자와 인터뷰들에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교회음악과 관련된 분야에서 교회음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책, 『자율학습』 에서는 교회학교 교사들이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방대한 자료들을 잘 선택하여, 다음세대 아이들을 교육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녀는 한국의 교회음악 교육이 “대개 미국의 고등 교육 기관에서라야 찾아 볼 수 있는 정도의 질을 갖춘 교육”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송인동 교수와의 만남에서 잘 나타난다. 2003년경, 원진희 선교사의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CNN을 통하여 한국에 대한 뉴스 속보가 등장했다. 원진희 선교사는 그 체널을 보면서 한국에 무슨 큰일이 생긴 것으로 생각하고, 송인동 교수를 큰 소리로 불렀다. 송인동 교수가 깜짝놀라 원진희 선교사에게 가보니, CNN을 통해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는 ‘대구지하철참사’에 대한 것이었다. 원진희 선교사는 뉴스를 보면서, 서랍 속에서 무엇인가 가득 적혀있는 A4 용지 2-3장을 꺼냈는데, 그 용지에는 내한했었던 선교사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였다. 원진희 선교사는 이 종이에 적힌 선교사들에게 전화하면서 “빨리 CNN을 켜보세요. 지금 한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어서 한국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또한 광주민주화 운동 때 발생한 일들을 마음아파하면서, 계속해서 한국을 위해 기도해온 것으로 보인다. 원진희 선교사 또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한 인물이었으며, 한국의 교회음악 발전을 위해 지대한 노력을 하였고, 한국의 교회음악교육이 단순히 미국 교회음악교육의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 만큼이나 우리나라의 평신도 교사들이 창의적인 교사로 세워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이애하고 있었고, 또 실천하였다.
작성일:2017-06-28 09:54:17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