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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Straeffer, Fredrica Elizabeth(1868-?, SP)

닉네임
정한별
등록일
2017-06-28 10:40:59
조회수
2360
첨부파일
 M0056_2015210058_정한별.pdf (9330569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Straeffer, Fredrica Elizabeth / 스트레퍼 / 한국명: 서여사(徐女史)
2. 생몰연도: 1868년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4. 한국 선교기간: 1899-1908
5. 연표
1868.__.__ 미국에서 출생
1899.__.__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목포선교부에 소속
목포에서 교육사업과 여성교육에 헌신
1903.03.01 여학생 교육 시작(목포여학교->정명여학교로 발전)
목포양동교회에서 부인반 조직, 성경 지도
목포 중심으로 무안, 함평지방까지 순회전도
1908.__.__ 미국으로 귀국


II. 선교사 소개: 서여사(Straeffer, Fredrica Elizabeth/스트레퍼)

개화기 한국 땅에 수많은 선교사들의 발자취들 가운데,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고스란히 그 땀만을 흘리고 간 선교사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다. 비록 그들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없고, 그 이름조차 발견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들의 복음에 의한 땀과 수고는 현재까지도 결실을 맺고 있다.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사 서여사가 바로 이러한 결실들을 지금까지 맺게 한 여성 선교사였다. 서여사 선교사의 이름은 자료들 가운데 두 가지로 나온다. Fredrica Eliza beth Straeffer와 rica Elizabeth Straeffer이다. 아무래도 표기상으로 탈자가 생긴 이유인 것처럼 보이는데, 한국교회사에 등장하는 스트레퍼(Straeffer)라는 이름은 동일 선교부에서 동일한 사역들로 기록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동일 인물로 보인다.
스트레퍼 선교사는 1868년 출생으로 1899년도에 한국에 입국해 10년간 사역을 감당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한국에 입국하게 될 당시 나이가 한국 기준으로 32세로 추정되는데, 그녀는 32세 여인 홀몸으로 한국 선교사로서 입국했다. 그녀에 대한 학력과 미국에서의 경력은 확인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그녀가 입국한 시기로 미루어보아 그녀는 먼저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시작한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가 소속된 전라도지역의 선교부는 먼저 들어온 미국 남장로교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영향력도 이미 1885년부터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로 그는 부산항으로 먼저 입국하였고, 1891년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에서 일할 선교사를 모으기도 하였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언더우드의 강력한 요청은 신학생들의 마음에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을 타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에 의하여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적 정황으로 볼 때에 32세의 스트레퍼 선교사는 한국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젊음을 한국 선교에 바쳤다.

1. 목포 선교부
한국에 먼저 들어와 있던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전략을 적용하여, 자신들보다 8년 늦게 들어온 남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전라도(충청도 일부 포함)와 제주도 지역의 선교를 맡도록 배정했다. 전주, 군산에는 이눌서(Rev. W. D. Reynolds) 목사,ㅤ최의덕(Rev. M. S. Tate) 목사, 전위렴(Rev. W. M. Junkin) 목사 등 남장로교 선교사 7인의 선발대가 이미 주재하고 있었다.
원래 배유지 목사는 전남의 행정 중심지이던 나주에 선교부를 개설하려고 하였으나, 주민들의 완고한 반대로 철수하여 목포에 선교부를 설치하게 되었었다. 1897년 3월 5일 배유지 목사의 어학선생인 변창연은 만복동(현 양동)에 장막을 치고 전남의 첫 교회인 '목포교회'를 시작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1898년 9월 11일에 목포선교부를 개설하고 목포교회를 자신의 임시사택으로 옮겼다. 동년 11월에는 오원 목사(Rev. Clement C. Owen)가 목포로 배정받아 오자 목포진료소를 개설하고 오원 의사에게 환자들을 진료케 했다. 1899년에는 스트레퍼(Miss Fredrica Elizabeth Straeffer) 양이 목포로 배정 받아 오고 1900년에는 의사인 파이팅(Miss Georgiana Whiting, M.D.) 양이 오원 목사와 결혼하여 목포로 오게 됨으로써 목포선교부는 활력이 넘치게 되었다.

2. 개화기 한국 여성 교육사역
스트레퍼 선교사가 어떤 훈련을 받고 선교에 임했는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 개화기에 여성교육에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그러한 분야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1899년 불(W. F. Bull; 부위렴), 엘비(L. A. Alby; 후에 불과 결혼) 선교사 등과 함께 내한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곧장 목포선교부에 소속되어 목포와 광주, 군산까지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처음 그녀는 목포에 정착하였는데, 당시 목포는 개항도시로 많은 발전 가능성이 있었고 남장로회에서는 벨(E. Bell; 배유지)과 오웬(C. C. Owen; 오원)선교사 등을 목포에 주재시키며 선교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벨 선교사는 복음 전도와 교육사업에, 오웬은 의료선교에 그리고 스트레퍼는 교육사업과 여성운동을 분담하여 활동하였다. 스트레퍼 선교사는 먼저 그녀의 사택에서 여학생 10명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그녀가 당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였던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먼저는 복음의 전략적 선택이었던 것과, 또 하나는 유교 사상권 아래에서 억눌린 여성인권 신장에 대한 요청인 것이다.
조선 말기 여성관은 이미 고려 말기로부터 고착된 것이었다. 고려 초기만 해도 가계를 계승할 남손이 없을 경우 여손이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유교의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점점 낮아지게 되었다. 조선왕조 시대가 되면서 남존여비 사상은 뿌리 깊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교육은 유교정신에 입각한 가내범절과 약간의 문자를 익힐 정도이지만, 더욱이 대부분의 여성들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사회적 분위기, 남성에 복종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여성에 대한 낮은 지위체제는 개화기에 여성들을 통하여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복음의 마중물이 되었다. 서양문물과 함께 복음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이 문물에 남성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집이라는 감옥에 갇혀 지냈다. 선교사들은 이 여인들을 교육할 때 집에서 10리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없다는 허락을 받고서 이들을 교육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미소조차 보일 수 없었던 시대, 원초적인 사랑이란 감정까지도 통제 받았던 이러한 사회가 바로 당시 조선말기의 사회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양문물, 새로운 여성관의 유입은 조선 여인들에게 필연적인 탈출구가 될 수 있었다. 언제까지나 무릎 꿇은 자세로 망부석처럼 기다림에 익숙해진 조선 말기의 여성들의 탈출구는 한국에 서양 문물과 함께 기독교라는 신교가 들어오자 한국 여성들은 오랫동안 막연하게 그려오던 탈출구에 눈을 떴던 것이다.

이러한 여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인들이 서양문물을 보다 쉽게 수용할 수 있다는 데에서 선교사들의 전략적인 대상이 되었다. 사실상 남존여비 사상 인해 여인들이 많은 통제를 당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 안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은 여인들에게 있었다. 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여인의 위치는 가정 안에서 다른 모습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1893년에 한국 선교의 정책을 수립한 내용과 맞물리는데 그중 2항은 여성 중심적으로 전도와 훈련을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집 안에서 어머니, 여성의 영향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전도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회를 가지고 여성들의 지위 향상을 도모해 사회적인 인식까지도 변화시키기 위한 도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개화기 여성 신장을 위해 여 선교사들이 그 역할을 감당 하게 된 것이다.

스트레퍼 선교사는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선교사의 사택에서 여학생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이 사택은 목포여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목포여학교는 목포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기에 앞서 최초의 교육기관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정명여학교의 모체이다. 스트레퍼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여 목포에 정착하고, 그의 사택에서 여학생들을 교육하였던 기간은 그가 학교를 설립하기 전까지 계속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03년이 돼서야 목포여학교라는 명칭으로 정식 학교를 운영하였고, 그 후 1904년 프레스톤(J. F. Preston)부인이 부임하기까지 1년 동안 목포여학교의 교장으로 역임하였다. 스트레퍼 선교사가 설립한 목포여학교는 1911년에 정명여학교로 개칭하였고, 이 정명 여학교는 현재까지도 남아 정명여자고등학교와 정명여자중학교로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현재 정명여자고등학교·중학교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본받아,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사랑하고 봉사하며, 지행일치의 순결한 민주여성을 길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는 설립 목표를 가지고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각과 맑은 마음을 지닌 미래 인재를 육성하고자하는 경영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3. 여선교사의 순회전도사역
스트레퍼 선교사는 프레스톤 부인이 학교로 부임한 이후 모든 경영권을 프레스톤 부인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순수하게 성경만을 가르치는 교사로 남아 있었다. 또한 그녀는 학교 교육사역에서 자유로워져 자연스럽게 순회전도사역과 여전도사를 세우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 사역의 영역 역시 목포에서 무언, 함평, 광주, 군산으로 넓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학교를 떠나 교육적인 측면을 내려놓은 것만은 아니다. 여전히 복음 전도와 여성 교육적인 사역을 지속하였다.
당시 초기 교회의 여성 활동은 순회전도와 사경회가 그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사경회가 중심이 된 교회 사역들은 1888년에 스크랜톤 부인과 헤론부인이 성경반을 조직하여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1891년에는 선교사마다 선교부가 인정한 일반적인 계획에 따라 각 지부에서 성경학습과정을 마련해야한다는 세칙으로 세워졌고, 각 선교부마다 공표되기까지 이어졌다. 사경회는 이렇게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졌다. 사경회의 주요 내용은 성경 사복음서와, 예수의 생애, 바울서신 등이고, 교리문답과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 등 신앙의 핵심 사항을 가르쳤는데, 여기에 천문지리학, 농사법, 건강버, 위생법, 아동교육, 신생활 등의 일반상식 영역이 가르쳐졌고, 또한 주일학교 교수법, 기도법, 개인전도법, 상답, 회의법 등도 가르쳐졌다.
사경회는 대개 새벽기도회로부터 시작하여 오전에는 성경공부, 오후에는 반으로 나누어 일반상식과 개인전도법을 공부하고 흩어져 가정전도, 심방 등을 하였으며,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하거나 전도 강연 등을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경회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개최되곤 했는데, 도보로 왕래하기 힘든 거리의 신자들은 자취할 살림살이까지도 준비하여 함께 합숙을 하고, 가까운 교인 가정에 머물며 참석할 수 있도록 사랑을 베푸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스트레퍼 선교사의 순회전도사역과 여성전도자들을 세우는 사역은 목포 양동교회에서 부인반을 조직하여 성경을 지도하는 것으로 시작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목포를 중심으로 무안과 함평, 그리고 군산지역까지 순회전도를 감당하였다. 그녀의 더 세밀한 사역 내용은 기록물로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녀가 내한하여 9년간의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전남 지역에서 배유지 선교사와 더불어 학교사역, 교육사역, 순회전도사역, 교회개척 사역 등 감히 가볍지 않은 사역의 분량을 다 감당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다.
작성일:2017-06-28 10:40:59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