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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Graham, Ellen Ibernia(1869-1930, SP)

닉네임
문병결
등록일
2017-06-28 10:51:26
조회수
2236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24_2015210091_문병결.pdf (166074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Graham Ella Ibernia
2. 생몰연도: 1889 - 1930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7년 내한 1930 사망
5. 연표:
1907.10.16 은자의 왕국(1637~1876년의 조선) 해외선교를 떠남.
1907.11.04 일본 증기선 타고 요코하마에서 편지
1907.11.11 고베 도착
1907.11.22. 광주 도착. 고베에서 5명이 출발하여 목포를 거쳐 도착
1907.12.06. 선교사들과 함께 지내는 몇 가정을 제외하고 광주에
기독교인이 없다고 생각. 소규모의 멤버로 광주에 교회를 세움
1907.12.26.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 교사가 한국이름을 지어줌
1908. 2.25. 다른선교사가 병에 걸림. 한국에 의사가 없지만
일본인 의사가 들어와 있어서 치료를 받음.
1908.04.01.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 선교사가 여학교를 설립 개교.
초대 교장으로 엄언라 선교사 취임
1913.07.15. 목포에서 수술. 건강이 급격히 안좋아짐
1913.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요양
1930. 이전 병을 고칠수 없음을 알고 한국 땅에 묻히기 위해 광주로 돌아옴
1930.09.17. 광주에서 별세
현재. 호남신학대학 묘지동산 안장

가족사항:
아버지: John knox Graham (1820.9.15. ~ 1845.11.30.)
어머니: Mary Jane Burkhead (1831.11.1. ~ 1903.1.21.)



II. 선교사 소개: (Graham Ella Ibernia,1889-1930)

1. 일생의 꿈이었던 해외선교사의 꿈을 감사하며 조선 땅을 향한 그레이엄

일생의 꿈이었던 해외 선교사의 꿈을 이루면서 목적지 ‘은자의 왕국’ 1637~1876년의 조선을 향해 출발하게 되는데 6일간의 기차여행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담겨있던 가방을 나누고 기차에 탑승하게 되고 그녀의 첫 시작이 조선땅을 밟기까지 힘든 여정의 스타트를 끊었다. 시애틀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남을 가지고 조선을 향한다.

2. 힘겨운 여정과 함께 광주에 뿌리 내리는 그레이엄 선교사

시애틀에서 일본으로 일본의 증기선을 타고 출발하여 요코하마에서 엄청난 폭풍을 만나게 된다. 거센 파도 때문에 14일 일정이 18일로 늘어나 요토하마에 도착하여 주일에 일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곳에서 특이하게 성찬을 할 때 티스푼을 주어 포도주를 떠먹는 것을 본다. 이후 고베에서 광주로 자신이 가게 됨을 알고 배를 타고 이동을 할려 했지만 12시간 동안 배의 방향을 돌려서 대기할 때도 있었고 도착 하루 전에는 파도가 높고 세게 쳐서 배 일부분이 파손되어 물이 차는 경험을 하면서 순탄하지 않는 여행을 하게 된다. 무려 19일의 항해 중에 단 3일만 상태가 좋았었고 엄청난 배멀미로 고통을 당했다.
고베에서 2주간 대기후 5명의 사람이 3박4일 후에 목포에 도착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놀라워 하면서 광주로 출발할려고 했지만 배에 선실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선실없이 배를 타고 광주로 향한다. 함께 온 2명의 여자 선교사는 다른 곳으로 가고 2명의 경험많은 선교사가 합류한다. 이후 선교사들과 함께 지내는 몇 가정을 제외하고 광주에 기독교인이 없다고 생각하고 소규모의 멤버로 광주에 교회를 세우고 정착하였다.


3. 선교사로 훈련받고 준비하는 그레이엄. 엄언라

광주에 정착을 하고 한국식 결혼식에 신기해 하면서 한국어 언어공부에 힘쓴다. 그녀는 아침마다 2시간 동안 한국인 교사에게 수업을 받으면서 발음 교정에 많이 신경을 쓰는 학생이었다. 3년 동안 언어를 배우는데 매년 마다 선교위원회에서 시험을 쳐야하는 번거로움도 있었지만 즐기면서 열심을 다했다. 벨(유진벨) 선교사가 35개의 교회를 책임지고 있었고 말을 타고 한 번에 6~7개의 교회를 방문하는데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선교회가 운영하는 교회 내부에는 중간에 천을 올려서 남녀 앉는 곳을 구분 지으면서 예배당에 적은 돈이지만 헌금하는 한국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현지인들에게 손수건을 만들어 주고자 미국에서 천을 보내달라고 부탁도 하면서 선교 현지에서 열심을 다해 배우고 현지인들과 가까워지려고 하였다.

4. 초대교장 엄어라 선교사의 수피아여학교의 시작

배유지 목사와 오원 선교사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전도와 토착교회들의 강렬한 전도 활동으로 많은 교회가 설립됨에 따라 미국 남장로회에서는 의료 선교와 함께 교육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더욱 힘을 썼다.

“선교회가 교육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서양식 공립학교가 전라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는 유일한 종류의 학교는 마을 서당이었다. 여기에 양반 가정의 자녀들이 모여 유교의 고전들을 교수 받았다. 모든 가르침은 기계적이었고 한문을 암송하는 데 그쳤다. 교육은 여성을 위해서는 적당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여성을 위하여 개방된 학교는 없었다.
처음부터 선교회는 기독교 학교의 목적은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기독교 교육은 복음 전도의 수단으로서보다는 기독교 지도자를 훈련하는 방법이었다. 자주 되풀이되는 구호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인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얼마간 비기독교인 학생이 참가하고는 있었지만, 초기의 미션 학교는 적어도 전체 학생의 60%는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방침을 고집하였다. 이런 정책 때문에 자녀들이 교육받기를 요구하는 기독교 지지자들이 있기까지는 선교회가 교육 사업을 시도하지 않았다. 초기부터 ‘자조’라는 네비우스 정책에 따라서 학부모는 경비를 분담해야 했다.”

“광주의 교육 사업은 스테이션이 개설된 지 얼마 안 된 1907년에 조선인 직원들의 자녀와 교인들의 자녀를 모아놓고 배유지 목사의 사랑방에서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7년 교세가 발전하고 남녀 학생의 수가 증가함으로 여학생은 따로 변요한 목사의 사랑채로 옮겨 가고 남학생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1908년 2월 1일 구한말 정부로부터 숭일(崇一)이라는 이름으로 인가를 얻었다. 숭일이라는 이름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긴다는 뜻이다. 초대 교장에는 변요한 목사가 취임하였다. 한편 변요한 목사 사랑채에서 공부한 여학생을 중심해서 1908년 봄에 정식 학교로 출발하게 되었다. 수피아여학교의 초대 교장은 엄언라(MissEllaGraham) 선생이 취임하였고, 1911년에 미국의 스턴스(Mrs.M.L.Sterns,JennieSpeer)여사의 기금을 받아 회색 벽돌로 3층 교사를 짓고 그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서 수피아(須彼亞)여학교라 이름하였다.”

“1908년 봄에 배유지 박사와 배 부인, 그리고 엄언라 양은 광주에 사는 총명한 어린 기독교 소녀들이 3R과 성경에 대하여 배우도록 몇 가지 방법을 강구해야 함을 결정했다. 이는 들어보지 못한 혁신이었는데,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소년들은 항상 교육시키되 소녀들을 위한 학교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4명이었으나 뒤에는 12명의 소녀들이 배움의 전당에 모여들었다.
선교회 건물의 앞뜰에 있는 한국식 방 안에서 그들은 한국의 전통 관습에 따라 바닥에 앉아서 큰 소리로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가 가끔 선교사가 그들에게 다가오면 그들은 보통 미국 학생들같이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공부했다.
첫번째 정규 교사로는 훌륭한 미션학교를 졸업한 남궁 혁(南宮 赫) 부인이었다. 이 학교의 첫번째 감독관은 그래함 양이며 두 번째는 윌슨 씨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1910년 맥퀸 양이 교장이 되었으며, 맥퀸 양이 미국에 가 비었을 때 오 원 부인이 학교를 맡았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요청에 응답하여 1921년 9월에는 마가렛트 마틴 양이 도착하였다.
1911년에 스턴스(M.L.Sterns) 부인이 우리학교 건축비로 5천 달러를 내놓았고, 그녀의 여동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학교를 라 이름지었다.”

5. 조선을 사랑한 엄언라 선교사

해외선교의 꿈을 가지고 그 꿈이 이루어졌음에 감사하며 순탄하지 않는 선교의 길을 오른 엄언라 선교사는 낯선 땅 여인의 몸으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훈련하고 마지막까지 조선에 남았다. 한국어 교사에게 한국 이름 엄언라를 얻게 되고 누구하나 예수 믿는 사람 찾기 힘든 광주에서 복음을 들고 전도한 그녀는 한국의 선교사 자료들 속에서도 자료가 없고 찾기조차 힘든 그녀임에도 그녀가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였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 수 있는 연구 논문 속에 한 문장을 소개한다.
“1907년 37살 때 내한하여 수피아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방 여성 선교사업도 지도.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가서 요양하다가 회복이 어려운 것을 알고 ‘한국 땅에 묻히기 위해’ 다시 광주로 나와 1930년 별세.”
목숨보다 더 사랑한 한국 그녀의 순교의 피가 지금도 이땅에 흐르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 선교의 정신이 나와 후세의 모든 크리스찬들에게 전해지길 소망한다.
작성일:2017-06-28 10:51:26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