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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Genso, John F.(1884-1950, NP) / Rittgers, Mabel

닉네임
구진원
등록일
2017-06-29 23:45:04
조회수
2222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95_2015210075_구진원.hwp (2996736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Genso, John F / 젠소 / 한국명: 김소(金昭)
2. 생몰연도: 1884-1950.7.15.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연표
1884. 미국 출생
1908. 11. 19.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경기도 양주군 봉화현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함
1908. 선교부 회계로 재산관리 등 재정적인 문제 총지휘, (선교의 중심 자산 기관인)Mission incorporation Committee의 총괄 책임자, 인터미션 어카운트의 회계 담당자였다.
1911. 12. 4. 경기충청노회가 조직될 때, 김소가 회계였다.
1913. 12. 2. 경기충청노회에서 회계로 선임하였다.
1914. 12. 1. 경기충청노회에서 회계로 피선되었다.
1915.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 재단법인 회계 피선
1917. 사립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회계 선임
선교잡지<신생명, The new Life>의 발행인으로 활동
1923. 안동교회 안국유치원이 설립될 때 도움
1938. 젠소와 김홍량 재단의 대행자인 최태영 사이 경신학교 재산에 대한 매매개약
이 맺어짐
1941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
1946 재내한하여 복구활동
6.25 사변으로 일본에 피신
1950. 7. 15. 일본 니시노미야에서 사망
양화진 제 1묘역에 안장
5. 가족사항: Rittgers, mabel(부인)과 1남 2녀


II. 선교사 소개
젠소는 회계에 능률을 보인 선교사이다. 당시 서울과 서울역은 선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울은 선교의 재정과 자산관리의 중심이었다. 그 중, 선교의 재정과 자산관리에 가장 오랫동안 봉사한 사람이 젠소였다. 그는 또한 선교회 법인부(Mission Incorporation Committee, 선교회 자산관리 담당부서)의 최고 책임자로 있으면서 여러 선교기지들과 선교회들의 회계 및 선교회 간 거래 담당 회계를 맡아왔다. 또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가 재단법인이 될 때도, 1917년 사립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될 때에도 임원(회계)으로 선임되어 재정분야를 총괄했다.
선교잡지<신생명, The New Life>의 발행인으로도 활동했으며, 안동교회 부지 안의 62평의 땅을 교회(사택)시설을 확충하는데 사용하도록 공여한 일도 있다. 이 땅은 후일 그의 딸 바바라의 증언을 통하여 안동교회 명의로 등기를 이전했다고 한다.
그가 한 모든 일들을 보면 회계 업무, 즉 재정과 관련된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1934년부터 1941년까지 기독교 문학에 선교 협력이 사회 성장에 커다란 요소였는데, 이 때 힘썼던 선교사 중 젠소가 포함된다.
그는 북감리교 목사인 레퍼트와 찬송가 발행 분과위원회를 구성한다.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가 해방후 1946년 다시 내한하여 선교부 사업 복구를 위해 노력하다가 6·25사변이 일어나 1950년 6월 26일 서울에서 철수하여 일본 니시노미야에 머물던 중 7월 15일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한국 선교역사의 저자 해리 로드는 ‘한국 전쟁기간 중 가장 큰 두 가지 손실 중 하나가 존 F. 젠소의 별세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젠소가 재무관리를 오랫동안 한 것을 보면, 그는 매우 청렴한 사람이며, 성실했던 사람으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선교역사를 기록한 해리 로드에 말에 의하면 젠소는 유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의 책에서 두 번이나 젠소의 죽음을 한국 전쟁기간의 두 가지 큰 손실 중 하나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선교사 소개
한국의 여자청년들은 외국인 총무의 도움 없이 YWCA를 조직하고 운영해왔는데, 수년간 존 F. 젠소의 부인이 조언을 해주었다. 또 경성 YWCA가 창설될 때 크게 힘이 되주었는데, 겐소 부인의 집이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이사회 역시 이곳에서 열렸다.
그리고 그녀는 문맹퇴치운동을 담당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다. 그녀는 이 운동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그들은 더럽고 우울하고, 절망적이었지만, 기독교 찬송가와 성경구절을 가르치고, 그리고 니시 베시 올리버라는 베이비클리닉을 설립하고 독서 수업을 실시함으로, 그 결과는 미소 짓는 얼굴로, 태도는 희망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신여학교 7대 교장으로 수고하였고, 후에 서울 안동교회의 부속기관인 안국유치원의 원장으로도 수고하였다.
이외에도, 서울 안동교회에서 여전도회에서 봉사하였다.

그녀는, 한국에 교육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문맹퇴치운동과 학교와 유치원까지, 그의 직업이 한국 교육 선교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부부의 자녀는 1남 2녀이고, Abigail, Barbara이다. 아들은 태어나고 3살 때 죽어 양화진 제 1묘역에 묻혔다. Abigail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교사로 봉직하였고, Robert Kinny와 결혼하여 미국 하와이로 돌아갔다. Barbara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외국인학교 교사와 내과 의사로 활동했다. 그의 남편은 B.G. Gisla이고 미국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작성일:2017-06-29 23:45:04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