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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McMurtrie, Robert M.(1864-1946, NP) / Snook, Velma L.

닉네임
박세미
등록일
2017-06-30 11:57:20
조회수
2332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87_2015210093_박세미.hwp (723968 Byte)
1. 기본사항
McMurtrie, Robert M.
한국명 : 맹노법 (孟老法)

1. 생몰연도 : 1864 ~ 1946. 11.13
2. 소속 교단 : 미국 북 장로교
3. 경력
1) 1907년 12월 24일 내한하여 평양 선교부 소속으로 활동
2) 숭실학교 안에 설치된 안나 데이비스 기념공작소 소장직 역임
3) 당시 맥머트리 선교사는 미국 연방 정부 소속의 록 아일랜드 병기 제조창에서 근무함과 동시에 공작소의 책임자로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일을 관장
- 그 외에도 평양과 그 주변 각 교회 시설물 보완 및 책임, 선교부 소속 건물 수리하는 일을 감당
4) 1933년 4월 4일 선교사직에서 은퇴하고 귀국
5) 1943년 펜실베니아에서 평양선교부에서 함께 일했던 숭의여학교 교장 스눅 선교사와 결혼
6) 1946년 11월 13일 플로리다주 세인트 피터즈버그에서 소천
3. 가족사항 : Snook, Velma L. (배우자)
4. 참고문헌
김승태, 박혜진 저, 『내한 선교사 총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박근용, 서기산, 황장욱, 홍정수, 박종구, 소창길 공동편찬, 『기독교대백과사전 제5권』, 기독교문사, 1980


Snook, Velma L.
한국명 : 선우리 (鮮于理)

1. 생몰연도 : 1866. 1. 29 ~ 1960. 3. 20
2. 소속 교단 : 미국 북 장로교
3. 경력
1) 1889년~1900년 아이오와 공립 초등학교 및 네브라스카 초등학교 교사로 봉직
2) 1900년 11월 18일 35세 처녀의 몸으로 내한, 평양선교부에 부임하여 어학 공부 시작
3) 1903년 평양 숭의여학교 제 2대 교장으로 취임
4) 1927년 2월 평양 예수교장로회 제직회로부터 선교사 25주년 표창,
4월 동아일보사로부터 교육 공로자 표창
10월 숭의여학교 동창회, 재학생회로부터 교장재직 25주년 근속 기념 표창
5) 1931년 숭의여학교를 마침내 총독부 지정학교로 승격시키고 안식년을 맞아 귀국
6) 안식년을 마친 후에는 귀환하여 숭의여학교 설립자 겸 교사로 봉직, 운영에 조력
7) 1935년 11월 평남 도지사 야스다케의 초청한 간담회에서 신사참배 강요당함
8) 1936년 1월 21일 신사참배 거부로 교직권 박탈
9) 1939년 9월 귀국하여 70세의 나이로 은퇴
10) 1943년 펜실베니아에서 평양 선교부에서 동료선교사였던 맥머트리와 결혼
11) 1946년 남편 맥머트리 선교사와 사별하고 스눅 선교사도 1960년 3월 20일에 소천
3. 가족사항 : McMurtrie, Robert M. (배우자)
4. 참고문헌
김승태, 박혜진 저, 『내한 선교사 총람』,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박근용, 서기산, 황장욱, 홍정수, 박종구, 소창길 공동편찬, 『기독교대백과사전 제9권』, 기독교문사, 1980

2. 선교사 소개
1) 부르심
안나 데이비스는 가난한 소년들이 학비를 조달할 수 있도록 직업을 갖추게 할 목적으로 공작소를 설립한다. 그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 이 작은 사업은 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했다. 가난한 학생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데이비스는 학생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숭실 학교 내에 기계창 건물을 신축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각종 기자재들까지 갖추어 놓으니 이러한 장비들을 보다 전문적으로 다루면서도 업무를 총 지도 감독하여 효율적으로 운영해갈만한 인물도 필요했다. 그러던 중 데이비스는 본 교회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맥머트리 장로를 떠올렸다. 맥머트리야말로 거기에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데이비스는 맥머트리를 한국에 파송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비쳤고 데이비스는 파견에 따르는 일체의 비용과 급료뿐만 아니라 기계창 운영에 대한 비용도 함께 부담할 것을 약속하기까지 이른다. 이렇듯 숭실에 대한 데이비드의 깊은 관심은 숭실이 폐교되는 1938년까지 약 30여년간 계속되었다. 다시 말해, 안나 데이비스가 기계창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면, 맥머트리는 기계창의 총 책임자로서 기계창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2) 내한
맥머트리는 1907년 12월 24일에 미국 북장로교 파송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 도착한 이후부터 평양 선교부에 소속되어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특별히 그가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 얼마나 크게 감격했는지는 맥머트리가 선교부 총무인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1908년 2월 15일자 편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1800명에서 2천명에 이르는 성도들이 함께 어울려 지적이고 경건하게 찬송가 138장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다스리시고”를 부르는 것을 듣는 중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국인들이 부르는 찬양을 듣는 바로 그때 제 마음속에 우리의 선조들이 스코틀랜드의 언덕에서 자주 부르곤 하던 찬양과, 어린아이들이 잠들지 못할 때 잠재우기 위해 다정하게 부르곤 하던 바로 그 찬양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하지 못할 방법으로 사람들의 감정을 동요시켰습니다. (중략) 교회가 기도하는 모습은 내가 보아 왔거나 들어왔던 것을 뛰어 넘었고, 은혜가 교회에 넘쳤습니다. 한번 기도할 때마다 5백 명이나 그 이상의 성도들이 기도하던 소리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_ 브라운(Dr. A. J. Brown)에게 보낸 맥머트리의 1908년 2월 15일자 보고서 中

그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해였다. 평양 대부흥운동의 열기와 감격으로 인해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나 맥머트리에게나 동일하게 성령의 뜨거운 감동이 흘렀고, 맥머트리는 2천명의 성도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뜨겁고 열정적인 찬양에 깊은 전율을 느꼈다. 비록 그에게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더라도 성도들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가운데 흘러넘쳤던 은혜는 동일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예배시간에 통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이라든지 성도들이 예수를 구주로 접하고 신앙고백을 하면서 자신들의 잘못된 옛 습관(술과 담배)을 끊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모습들은 맥머트리에게 있어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3) 배경
맥머트리는 평양 선교부에 파송된 지 일 년 후에, 브라운 총무에게 편지를 쓴다.

대학 근로부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공동체에서 기계기술자에게 주는 많은 일들로 인해 제게 먹고 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이지요. 하지만 지난 한 해 동안 저는 생애 최고의 해를 보냈습니다. 공동체의 사람들, 열심의 정도, 그리고 작업의 성공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갖는 깊은 책임감은 평양에 거주하게 하는데 제게 큰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한국어 공부와 작업장 감독의 일, 그리고 건물 공사로 인한 분주함으로 인해 나태할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브라운(Dr. A. J. Brown에게 보낸 맥머트리의 1908년 12월 12일자 보고서 中

위의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맥머트리에게 있어 1908년은 그에게 기계창을 총괄하는 책임이 부여되었기에 아주 특별한 한 해가 되었다. 그가 이루어낸 일의 비중이나 그 내용에 비해 환경은 매우 열악했지만, 그는 자기만의 재능과 기술을 가지고 먹고 자는 시간까지 할애하면서 주어진 역할들을 성실하게 수행해낸다. 그는 잘 통하지 않는 언어에도, 낯선 문화에도 어떠한 불평이나 원망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어려움 속애서도 현지에 잘 적응하여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감독하는 데에 열심을 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작업 감독과 건물 공사 등과 같은 일들을 감당하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소위 선교의 기반을 다질 한국어를 공부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업무가 과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도 그는 교회의 장로로서, 평양 외국인교회 주일학교 교사로서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 또한 짐작할 수 있다.

4) 교육
맥머트리가 운영한 기계창은 무지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을 수많은 기독 청소년들을 훈련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고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한 해 동안 174명의 소년들이 숭실 중학교와 대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기계창을 통해 학비의 전체 혹은 일부를 벌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았고, 맥머트리에게 기술을 배우면서 숙련된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맥머트리는 작업장에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도 앞으로 기계창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일에도 쉬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점점 증가하는 학생 수를 감안하고, 보다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시설이 속히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그는 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 감독하면서 학생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지고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학생들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계속해서 실용적인 교육을 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이로보아 그는 참으로 실용적이면서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5) 성품
하지만 맥머트리의 강직한 성품에 대한 불만이나 불평은 종종 긴장과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강직한 성품에 대하여는 김형직의 전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선교사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학생들을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가도록 출석부까지 만들어 놓고 강요했다. 결석자에 대해서는 학교 공예부에서 일을 시키지 않거나 심하게는 퇴학까지 강요하기도 했다.

초창기 때 숭실학교에서는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 매우 엄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숭 입학 자격 요건 중 세례 증명서를 요구하는 부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엄격한 분위기는 일부 학생들에게는 그저 강압적으로만 비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전부였다면 그는 25년 동안 평양선교부에서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평신도 선교사로서 힘에 부치도록 많은 업무를 감당하면서도 학생들의 작업까지 감독했고, 선교부 건물과 가정의 수리 등을 위해 불철주야로 땀 흘려 일하였다.
그렇다. 그는 교회의 장로로서 신실한 청교도 신앙을 갖고 있었고, 단호하고 엄격한 성격을 지녔다. 또한 그는 공학도답게 정교하고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장인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초창기에는 학생들과의 오해나 의견 차이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한국을 사랑했고, 숭실을 뜨겁게 품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열정을 불살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우직한 봉사자의 모습이야말로 맥머트리의 진짜 모습일 것이다. 그를 단순히 엄격한 기준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단정 짓기보다 헌신적인 지도자로서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6) 은퇴와 노후
맥머트리는 평양 선교부에서 평신도 선교사로서 25년 동안 일하다가 1933년 4월 5일부로 퇴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퇴임 후에도 후임자가 세워질 때까지 한 동안 계속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맥머트리는 숭실학교 창립 35주년 기념식에서 근속기념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은퇴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평양 선교부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이자 숭의여학교 교장으로 역임하였던 스눅(Velma Snook, 鮮于理)과 가깝게 지내다가 1943년에 결혼하게 되었다. 당시 펜실베니아의 독일 마을에서 거주하던 이들의 결혼식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80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결혼은 선교부에서 큰 뉴스거리가 되었고 이들의 결혼소식이 알려지자 두 사람을 아는 많은 선교사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으며, 수많은 분들의 관심과 축복 속에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맥머트리는 결혼 3년 후인 1946년 11월 13일 플로리다 주 세인트 피츠버그St. Petersburg, Florida)에서 8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작성일:2017-06-30 11:57:20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