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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Tate, Lewis Boyd(1862-1929, SP) / Ingold, Mattie B.

닉네임
이준영
등록일
2017-06-30 11:29:49
조회수
2607
첨부파일
 기말보고사_M0046_2015210045_이준영.pdf (191533 Byte)
Ⅰ. 기본사항

1. 영어이름 : Tate, Lewis Boyd
2. 한글이름 : 최의덕
3. 국적 : 미국
4. 성별 : 남
5. 출생 : 미조리 주 (1862-1929년)
6. 가족사항
- 1905년 Martha Barbara Ingold와 결혼
- 자녀 1명
7. 소속 : 미남장로회
8. 내한연도 : 1892년
9. 이한연도 : 1925년
10. 선교지 : 서울, 전주
11. 선교분야 : 목회(목사)
12. 선교사역
- 1903년 전주에서 순회전도 주력
- 1904년 남부구역, 남서부구역 전도사역, 성경공부반 준비, 조사 윤식명, 권서 최충진
- 1905년 남서부구역, 남동부(McCutchen)구역 전도사역, 임실·운봉·남원 특별관심 전도
- 1906년 여선교사주택 건축, 서부구역, 남부구역 전도사역
- 1907년 서부구역, 남부구역 전도사역, 건물시설관리 보조, 선교부사역 조력
- 1908년 서남구역 전도사역, 선교부사역 보조, 안식년
- 1909년 안식년
- 1910년 남부구역 순회전도, 김제·강계 전도담당, 광주훈련반
- 1911년 임실·남원·정읍·태인·원평 전도담당, 광주훈련반
- 1912년 남부구역, 남동구역 전도사역, 책방책임
- 1913년 남부구역, 남동구역 전도사역, 책방책임 권서관리
- 1914년 남부구역, 남동구역 전도사역, 책방책임
- 1915년 남구구역, 전도사역, 남자성경학교 책임
- 1916년 남부구역, 북부구역(McCutchen)전도사역
- 1917년 안식년
- 1918년 안식년, 남부구역, 남서구역 전도사역
- 1919년 남부구역, 서부구역 전도사역
- 1920년 남서구역 전도사역
- 1921년 남서구역 전도사역
- 1922년 서부구역, 남서구역 전도사역
- 1923년 남부구역, 서부구역(Swicord) 전도사역
- 1924년 남서구역, 고산·여산·익산·전부 북부 전도담당
- 1925년 안식년
13. 경력사항
- 1892년 웨스트민스터대학 학사, 멕코믹신학교 석사
- 1908-1909 / 1917-1918 / 1924-1925 안식년으로 귀국
- 1925년 6월 심장이상으로 사망
14. 저술 : 『호남지방기독교100년사』


Ⅱ. 선교사 소개

1) 미국 남장로교 신학생, 한국선교의 비전을 품다.

테이트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목사는 첫 휴가를 맞아 한국에서 귀국해서 1891년 10월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열린 미국 해외선교 신학생 연맹 Inter-Seminary Alliance for Foreign Missions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 모임에 참석해서 깊은 감명을 받은 세 학생은 남 장로교 신학교의 졸업반에 있었는데 시카고 맥코믹 신학교의 루이스 보이드 테이트 Lewis Boyd Tate, 리치몬드 유니언 신학교의 카메론 존슨 Cameron Johnson과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 William Davis Reynolds였다.
테이트는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 실행위원회에 첫 번째로 선교 지원을 했는데, 특이하게도 한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중하게 거절당하고 다른 나라에 지원하라고 요청을 받았다. 그 이유는 위원회가 “한국처럼 알지 못하는 나라에 새로운 선교를 시작할 어떤 사람도 어떤 방법도 또 어떤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2) 전주에 선교 본부를 세우다.
테이트와 함께 온 선교사들은 한국에 도착하자마 선교팀 조직을 하였다. 레이놀즈는 회장, 테이트는 회계, 전킨은 서기로 선출되었다. 그들은 언어와 사람들을 익히기 위해 순회여행과 함께 복음전도사역을 하였다. 테이트는 북쪽으로 평양까지 가기도 했다.
1893년 초, 선교회는 믿을 만한 한국인 그리스도인 정해원씨를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로 긴 육로 여행을 보냈다. 그는 땅을 구입하기 위해 알아보았다. 그해 가을 전킨과 테이트는 협상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기 위해 남쪽으로 같은 여행을 떠났다. 마침 늦가을 장마로 개울물이 불어나 건너기가 어려웠다. 전킨은 개울을 걸어 건너다가 물에 빠져 한국 사람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러나 이 후로는 더 어려움이 없이 전주에 도착해서 정씨가 성문 밖 언덕에 예쁘게 자리 잡은 한옥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집은 초가집으로 26달러에 산 것이었다.
전킨과 테이트는 두 주쯤 전주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따라다니던 어린이들이 길거리를 걸을 때마다 야유하고 소리 지르고 돌을 던지는 일이 있었지만 친절한 영접을 받았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신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직까지 외국인들은 성 안에서 살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시 직원들과는 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전라도는 1860년대의 로마 가톨릭 수난이 있기 전까지는 로마 가톨릭이 번성하던 곳이었지만, 그들의 사역 흔적은 거의 없었다. 전주를 선교 본부로 정한 것은 잘한 것 같았다. 방문자들은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산기슭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인구 5만의 도시로 묘사했다.
1894년 2월 제3회 선교회 연례회의에서 테이트 목사와 그의 여동생을 봄철 동안 전주에 보내고, 만일 일이 잘 되면 그들을 가을에 다시 보내어 상설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투표하여 결정했다. 그래서 3월 19일 테이트는 조랑말을 타고 테이트 양은 가마를 타고 전주를 향해 서울을 출발했다.

3) 교회 개척과 연합 사역자가 되다.

전주에서 정착하여 본격적인 사역을 감당한 테이트는 동학혁명시에 잠시 서울로 피신하였다. 그 후 1895년부터 전주에서 다시 활동하였고 1896년에는 완전히 정착하였다. 그는 장터를 찾아다니며 대중전도를 하였고 각지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6년 현 서문교회의 예배당이 지어졌고 1909년 남문교회라고 불리는 두 번째 교회가 조직되었다. 시골의 순회구역은 남부를 맡은 테이트와 북부와 동부를 맡은 맥커첸으로 나뉘었다. 1903년 테이트의 순회구역은 정규 예배를 드리는 곳이 세 군데에 30명의 세례교인이 있었다. 1909년 테이트는 그해에 1,109명이 응시하여 316명이 세례를 받았고, 400명의 학습교인이 등록하여 총 1,203명이라고 보고했다. 또한 21명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장로 장립을 하였다. 그의 선교활동기간 중에 설립한 교회는 전라도 최초교회인 전주 서문밖교회를 비롯하여 67개 교회에 이른다.
또한 그는 법이론에 밝고 명석하여 선교회나 장로교 총회에서의 회무처리에 능하기도 했다. 연합사업에도 앞장서서 활동하였으며, 조선장감연합회, 성서공회 이사장, 조선예수교서회이사, 또 남장로회선교회 회장, 평양 장로회신학교 이사장도 역임했다.

2. Miss Mattie B, Ingold, M. D. 선교사 소개

1) 의료사역에 전념하다.

미국 노드케롤라이나주 스테이트빌에서 출생한 잉골드 선교사는 고향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자신이 출석했던 교회의 담임목사인 윈(P.P.Winn)의 영향을 받아 해외선교사업에 뜻을 두었다. 마침내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1895년에 내한하였다. 서울에서 선교준비를 한 후 1897년부터 전주선교부에 소속,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전주 은송리에 작은 초가집을 마련하고 여성들을 위한 진료소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4개월 동안에 400여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성과를 올렸다. 또한 이는 당시 인근 주민들의 서양인 선교사에 대한 경계심을 해소하는데 큰 도움을 주어 선교활동을 보다 용이하게 하는 효과도 거두었다. 그 후 1902년에는 전주에 새로 마련된 화산동선교부 기지위에 현 예수병원의 전신이 되는 진료소 건물을 짓고 본격적인 의료활동을 시작했다. 잉골드 의사는 전주선교부에서 활동하는 동시에 의사가 주재하지 못하거나 일손이 부족한 인근 남장로회 선교부를 순회하면서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1903년 한해동안 전주 진료소에서 잉골드가 진료한 환자수는 1,500명에 이른다.

2) 교육사역도 병행하다.

잉골드 의사는 전도에도 재능이 있었다. 잉골드 의사의 궁극적인 관심은 선진의학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체로 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데 있었다. 그녀의 진료생활 기록의 한 부분을 살피면 그것이 더욱 뚜렷해진다.
“녀 환자중 백만의 죠모는 본래 복슐하던이 인데 독종이나서 치료를 받은 후에 예수를 믿고 여전도인이 되얏으며 또 류경선씨 부인이 발목에 독종이 나서 위태하게 되얏는데 그 남편에게 업혀와서 달포 치료하는 중에 은문(한글)을 배호며 예수를 믿고 그 집안식구를 예수께로 인도하여 지금은 잘 믿는 가족이 되얏으며......”
이렇듯 복음전도에 열성을 지닌 잉골드는 <<유아요리문답>>이란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여러해 동안 한국교회에서 사용케 함으로 문서전도에도 참여하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어린이 교리문답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 문답서는 종교서적 보급회에서 출판되었으며 오랫동안 한국에서 사용되었다.
1905년 역시 남장로회 한국선교사인 테이트(L.B. Tate)목사와 결혼하면서 그녀의 독자적인 선교활동보다는 남편의 선교활동을 도우며 농촌선교에 참여했다. 특히 이미 교육받을 시기를 놓친 농촌부녀자들을 상대로 교육사업을 벌였다.
1905년 잉골드 의사는 테이트(L.B. Tate)목사와 결혼했으며, 그 후로는 임시로 또는 응급환자가 생겼을 때를 제외하고는 의료 활동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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