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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arvey, Anna Swisher (Mrs.)(1867-1940, NP)

닉네임
염병철
등록일
2017-06-30 12:19:04
조회수
2443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63_2015210172_염병철.hwp (2954752 Byte)
I. 기본 사항

1. Mrs. Anna Swisher. Harvey(하비/ 한국명: 하아나(河亞拿))
2. 생몰연도: 미국, 1867~1940. 1.27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북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917~1937년

5. 연표

1917. 9. 21 한국 입국 / 지역: 선천
1917~1920 선천에서 선교사 자녀들 교육
1920 북장로회 선교부에 입회
1920~1936 황해도 재령에서 여성전도 / 지역: 재령
1937.1 은퇴하고 귀국
1940. 1. 27 펜실베니아주 크리스티아나에서 사망


II. 선교사 소개

1. 한국이라는 낯선 땅을 선택한 한 여인

하비의 영문명은 Harvey, Anna Swisher이다. 이름도 낯선 이 여인은 어떻게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것일까? 이 여인을 통해 하나님은 어떠한 계획과 일을 하셨던 것일까? 우리의 지금 신앙에 한 알의 씨앗으로 뿌려졌던 하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더불어 미안하고, 또 감사하다. 많은 자료를 통해 그 발자취를 더 풍성하게 찾지 못해서 미안하다. 평생의 희생을 통해 대한민국의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어준 그녀의 헌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까 두렵고 미안한 것이다. 더불어 그럼에도 감사하다. 이름 모를 한 사람처럼,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해준 사실이 고맙다. 그것도 한국이라는 작은 땅, 선천이라는 낯선 땅으로 와서 선교사역에 동참함으로 한국에 복음의 밀알이 되어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럼 그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긴, 너무도 귀하고 열정적인 하비의 섬김을 뒤쫓아가보자.

2. 선천과 하비. 그리고 교육

한국명 하아나(河亞拿)라는 이름을 가진 하비의 첫 한국 발자취는 선천에서 발견된다. 선천은 당시 평북지역 뿐 만아니라, 전국적으로도 굉장히 발달한 개신교지역이었다. 특히 이 지역은 북장로회가 서울과 평양을 통해 전래되어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아마도 하비는 이 경로를 통해서 선천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북장로회 소속으로 처음부터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 북장로회의 사람들을 통해 이러한 경로를 소개받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사진1> 선천 Boy's School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하비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천까지 와서 선교사업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떤 사명과 비전을 가지고 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그녀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멀고 먼 이 길을 걸어 선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특히 하비는 기혼 여성이었다. 그것도 나이 50세의 중년 여인이었다. 가족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년을 바라보며 이러한 길을 선택한 것은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사명을 가지고는 하기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가족이 모두 함께 이동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왜냐하면 하비의 남편에 대한 기록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결혼 이후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혼자의 몸으로 선천까지 와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헌신한 것일 아닐까? 정말 눈물나지 않을 수 없는 그녀의 헌신적인 선택인 것이다.

<사진2> 선천지구 선교사 일동(1919)

선천에서 그녀는 선교사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선교사들의 자녀들이 교육에 있어 방치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특히 하비는 1917~1920년 동안 섬긴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녀의 전임자로는 Miss Olive Pierpont(1913~15); Miss Lynette Maas와 Miss Clara Gordon to Taiku(1918~20, 1921~22)가 있었다. 그리고 하비와 같이 섬겼던 인물은 Miss Louise Hayes(1918~21)가 있다. 하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젊거나 미혼의 여인들만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3. 여성전도에 온몸을 던지다

3년 정도 선교사 자녀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는 1920년 본격적으로 북장로회 선교부에 입회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 선교부에 입회한다는 것은 아주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사역에 있어서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북장로회의 활동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동참하고 함께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든지, 어떤 사역을 하던지 그것은 이제 헌신을 넘어 희생과 죽음도 각오해야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교부 입회 이후 황해도 재령으로 이동하게 된다. 북장로회에서는 여성 전도를 위해 하비를 파견한다고 나온다. 54세의 나이로 선교부에 입회하여 재령에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비는 여성전도에 있어서 탁월성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은퇴할 때까지 17년 동안 여성전도의 사역에만 헌신하고 집중한 것으로 보아 엄청난 결실과 은혜가 있었을 것이다.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많은 여인들이 하비를 통해 전도되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성장했을 것이다. 그것을 잘 대변해주는 내용이 <미국장로교회의 한국선교사>에 잘 담겨있다.

“…… and ever since then has been a faithful worker in the station."

'faithful'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까지 하비의 활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많은 선교사들이 충성되고, 성실하고, 믿음으로 잘 감당했겠지만, 하비에게는 그러한 단어를 직접 사용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칭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비가 재령에서 보여준 전도사역에 대한 헌신과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것이다.
더불어 당시의 선교회 모습을 보여주는 다음 사진 역시 당시 하비와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서

<사진3> 재령 선교회(1931년)

얼마나 많은 열매들이 맺어졌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복음의 씨앗을 통한 열매들이 이렇게 풍성해졌다는 사실에 눈물이 흐른다.
더욱이 재령이라는 곳이 당시 대도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와 부흥이 아닐 수 없다. 그 일에 하비가 묵묵히 동참하고 헌신한 것이다. 더욱이 노령의 나이, 70세가 될 때까지 전도사역에 함께 힘썼다는 것은 정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나이에 따라 사역의 범위를 한정짓거나, 개인 스스로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하비는 나이에 상관없이 몸이 허락하는 한 주님의 일을 끝까지 감당한 것이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4. 한국에서 불태운 아름다운 꽃, 주님의 품으로 가다

1937년 1월까지 재령에서 전도사역에 동참하던 하비는 은퇴를 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길에 오르는 하비의 행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만감이 교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50세 이후로 거의 20년 동안을 한국이라는 땅에서 헌신하며 주님을 전하는 사역에 열정으로 뛰었던 그녀가 이제 죽음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말할 수 없는 환희와 기쁨, 그리고 아쉬움과 감사가 넘치지 않았을까?
이후 1940년 1월 27일, 향년 74세의 나이로 주님 품으로 떠난다.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편히 쉴 수 있는 노년의 시기를 기꺼이 주님께 바쳤던 그녀는 그렇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한국을 불태우고 주님과 영원의 나라로 들어갔다.

5. 하비의 사역에 대한 평가

사실 하비의 선교사역을 평가해도 될지 망설여진다. 그것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50세의 늦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타오르는 복음에 대한 열정에 순종하여 먼 이국땅을 밟는 것 자체가 사랑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놀랍지 않을 수 없는 그녀의 헌신은 그렇게 한국 땅을 불태우는 작은 밀알로 뿌려졌던 것이다. 우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더욱이 미국이라는 좋은 곳에서 편하게 노년을 즐기고 쉬면서 살 수 있는 여건이 모두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70세가 되기까지 20년 가까이 헌신했다.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교육에 헌신하며, 선교사 자녀들을 양육한 것은 부흥의 기틀이 되었다. 선교사 자녀들을 건강하고 지혜롭게 하나님 자녀로 잘 성장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당시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달란트를 활용하여 이렇게 귀한 교육사역에 함께 동참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3년에 걸친 교육에 대한 헌신은 그녀를 정식으로 북장로회 선교부에 입회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선교에 대한 더 큰 열망과 열정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입회 이후 재령으로 파견되어 여성전도를 위해 헌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17년간 줄곧 재령을 중심으로 여성들을 전도하며 평생을 헌신하게 된다. 이 헌신은 재령이라는 불모지가 주님의 복음이 춤을 추는 부흥의 현장이 되는데 밀알이 되었다.
무엇보다 20년이라는 기간은 쉽게 지나쳐서는 안된다.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젊은 시절에 그렇게 헌신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 나이에 가까운 5~60대에 활동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나이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으로 체력이 되는 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녀의 하루하루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은혜와 감동이 있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공격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을까? 정말 가슴 뭉클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노년은 한국에 던져졌다. 자신의 가슴에 타오르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주체할 수 없게 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한 하비의 인생은 주의 종으로 출발하는 우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하다. 하비의 노년처럼, 우리도 나이가 지극히 먹었을 때 하나님의 일에 그렇게 묵묵히 순종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갈 수 있길 소망해본다.
작성일:2017-06-30 12:19:04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