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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McCune, George Shannon(1872-1941, NP) / McCune, Helen McAfee

닉네임
3-2 연희성
등록일
2017-06-30 12:22:12
조회수
2608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81_2015210103_연희성.hwp (606208 Byte)
I. 기본사항
1. 조지 매큔 선교사 / McCune, Gorge S. (1872-1941)
1) 이름: McCune, Gorge S. / 매큔 / 한국명: 윤산온(尹山溫)
2) 생몰연도: 1872-1941.12.1.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주리주,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5.9.12. - 1936.3.21.
5) 연표:
1872. 미국 미주리주 출생
1884. 미주리주 파크대학 입학
1901. 파크대학 졸업
1902. 파크대학에서 라틴어 교수로 활동
1903. 피츠버그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 취득
1904. 헬렌 매카피와 결혼
1905.7. 북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음
1905.9.12. 북장로교 교육 선교사로 내한(평양 선교부에 소속, 베어드의 숭실학교 운영에 협조)
1909. 선천선교회 전임, 신성중학교 교장으로 부임
1911. 105인 사건의 배후로 지목 됨
1913.-1914. 안식년
1914. 아이오와 주 코에 대학(Coe College)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 취득
1921.6. 신성학교장 퇴임, 미국 사우스 다코다 주의 휴런대학 학장에 부임
1927.9. 휴런 대학 학장 퇴임
1928. 5.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교육 선교사로 재입국)
1936 신사참배에 거부, 조선총독부로터 숭실중학교, 전문학교 교장직 승인 취소당함
1936.3.21. 귀국하여 신사참배의 진상을 미국교회에 알림
1941.12.1.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사망
6) 가족사항
McCune, Helen McAfee (부인)
McCune, Shannon (아들;숭실대학에서 1년간 강의)

2. 헬렌 매큔 선교사 / McCune, Helen McAfee (1873-1952)
1) 이름: McCune, Helen McAfee
2) 생몰연도: 1873-1952.5.5.
3) 출신 및 소속: 미국 캔사스 주,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5.9.12. - 1936.3.21.
5) 연표:
1873. 미국 캔사스 주 출생
1904. 조지 맥큔과 결혼
1905.9.12. 북장로교 교육 선교사로 내한
1928. 도심 지역 및 수성리 교회에서 여성들을 교육(고등 성경학교, 성경강의, 영문학, 농업)
1931.~1934. 대학에서 농업을 가르침
1936.3.21. 남편의 신사참배 거부로 귀국


II. 선교사 소개: McCune, George S. McCune (1872-1941) & McCune, Helen McAfee (1873-1952)
1.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되다.
조지 매큔과 그의 아내 헬렌 매카피 매큔은 북장로교의 파송 선교사로 1905년에 내한하였다. 그들이 내한 하던 당시 한국은 매우 어두웠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 되었고, 서울을 중심한 지역에서 지도층의 분열이 가속화되고 있었고 국정 전반이 이미 와해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매큔이 내한하기 1년 전인 1904년에는 한반도 북부에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일본의 승리로 인해 만주와 조선의 주도원이 일본에게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침체기 속에 매큔 부부는 한국에 내한한 후, 같은 파크대학 출신이자 숭실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베어드 선교사와 협조하여 한국의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첫 4년 간 그들이 어떤 행적을 가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이 4년간 한국어 공부를 하며 베어드와의 동역에 더욱 열심과 박차를 가했다는 것이 전해지고 있다.

2. 본격적인 사역에 돌입하다.
매큔 부부는 1909년 평안북도 선천에서의 사역을 맡게 되어 그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선천에서 그들은 ‘헬렌’과 ‘섀넌’을 낳게 된다. 당시의 선천은 북장로교에서 운영하는 신성중학교와 보성여자중학교가 있었다. 이곳에 매큔 부부는 각각 두 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매큔 부부는 부임 후 파크대학의 운영 방법인 ‘자립’ ‘자조’의 철학으로 각 학교를 운영해 나아갔다. 이를 보아 매큔은 파크 대학에서 운영해왔던 ‘자립’의 원칙을 매우 중시했던 것으로 생각 된다. 또한 그가 노동을 중시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의 이러한 교육 철학이 당대에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매큔은 학교를 충실하게 이끌어 가면서도 선교사의 본 직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바로 복음 전도에도 매큔은 정진하였다는 것이다. 1911년 무렵 매큔은 신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전도 조직을 구성한다. 그는 전도 조직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학생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매큔의 선교 사역에도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것은 1911년 당시 일어났던 105인 사건에 매큔이 연루가 되었던 것이다. 매큔은 일본의 부당한 음모에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헌병대는 데라우찌 총독 암살 사건을 조장하여 많은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 매큔 또한 휩쓸리게 되었는데, 일본의 경찰은 매큔에게 암살 사건의 배후에서 총기를 지원했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매큔을 압박하였다. 결국 이 날조 사건은 민족운동자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또한 매큔의 휘하에 있는 교사 및 학생들이 대거 체포되고 고문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러한 날조 사건에 대응하여 매큔, 마펫,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들은 허위 날조와 일본의 계략을 서방 세계에 낱낱이 고발했다. 이 때 헬렌 맥아피 맥큔 또한 북장로교 선교부에 편지를 보내 당시의 처참한 사건을 그대로 보고하였다. 또한 매큔은 105인 사건의 피해자들을 변호하는데 앞장섰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빛을 발하게 되어 제 1심에서 99명의 무죄석방을 이끌어내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건이 종료된 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가 공판에서 보여준 ‘친 한국적 태도’와 무식한 일본 경찰에게 보인 경멸이 많은 조선인들에게 싶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이후 매큔은 일본의 표적이 되어 집중 감시 대상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 후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매큔이 거주하던 선천 지역 안에서도 큰 시위가 일어났다. 매큔은 당시에 아직 신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던 시기이다. 매큔은 3·1운동으로 인하여 검거 선풍이 일 때에 피신해 오는 학생들을 자신의 집에 감추며, 그들을 보호하는데 힘썼다.

3. 신사참배의 위기 속에서 믿음을 지키다.
1928년 매큔은 평양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을 취힘하게 된다. 그는 곧 평양 신양리에 실습농장을 조성하였고, 1931년에는 3년제 농과를 증설하였다. 그 동안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나는 등 학원 내에는 어려운 문제가 계속 일어났으나 이를 극복하였고 신앙교육을 보다 강화하였다. 특히 지방전도대를 구성하여 파송하였고, 여름성경학교의 교사 양성 활동 등을 맡아 기독교 학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매큔의 이러한 교육 철학은 이전 파크 대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매큔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매큔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던 당시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나의 기독교 양심으로써는 신도(神道)에 참배할 수 없습니다.” 라는 담대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한국 교회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이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혹독한 시련을 경험했다. 일본은 신사참배는 소위 황국신민의 의무라며, 일본 국민은 물론 한국 국민에게는 이를 더 심하게 강요하였다. 1935년 11월 평안남도 도지사가 도내 교장회의가 개회되기 전에 먼저 신사참배를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부터 신사참배는 아주 식각한 문제가 되었다.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의 교장이었던 매큔과 숭실여학교 교장 스누크가 이를 거부하자, 도지사는 그들에게 60일 간의 기한을 주어서 이 문제를 재고하도록 하였다. 도지사는 신사 참배를 하든지 아니면 교장 직을 사임하고 학교의 문을 닫든지 양자택일을 할 것을 독촉하였다. 매큔과 스누크가 결국 첫 번째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의 시국이 매우 불안정함에도 이에 대한 반대의 의견을 청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논지를 따라 신사참배를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들의 입장은 결국 신사참배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건은 좀 더 긴박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매큔은 기한 내에 신사 참배 문제를 재고하라는 일제 당국의 통보를 받고 평양지역 장로교 교역자회의에서 한국 목사들에게 조언을 청했다. 그 때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참석자들은 모두가 동일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들의 입장은 결국 어떤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굳건하게 교회의 신앙을 지켜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결국 선교사들 안에서도 갈등하며 골머리를 썩이던 끝에 매큔은 중대한 결정을 한다. 그의 결정이 무엇이었는가? 결국 그의 최종적인 결정은 어떤 상황과 환경이 있다 할지라도 믿음을 꺾지 않고, 신사참배를 반대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매큔의 이러한 결정은 안타깝게도 숭실학교에서의 해임, 그리고 추방이라는 뼈아픈 현실을 남기게 되었다. 1936년 1월 18일 평안남도 도지사는 자신의 명의로 매큔을 숭실전문학교에서 해임시켰고, 1월 20일 총독부가 이를 승인하였다. 결국 한국을 위해, 또한 한국인들의 신앙과 믿음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기꺼이 희생양이 되기로 결심한 매큔은 1936년 3월 21일 많은 이들과의 아쉬운 작별인사와 함께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매큔이 떠난 숭실전문학교는 폐교의 절차를 밟아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4.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매큔은 비록 한국 땅에서 추방당했을지 모르나 그의 사역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국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교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고,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전했다. 그렇게 자신의 생의 마지막 까지 매큔은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매큔은 1941년 12월 1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아내 헬렌 맥아피 매큔의 업적 또한 가볍게 여길 수 없다. 그녀는 남편 매큔과 함께 생의 마지막 까지 교육사역에 힘을 다하였다. 그녀는 교육선교사로 보성여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매큔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마지막까지 선교의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내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아들 ‘섀넌 매큔’ 또한 지리학을 전공하여 부친이 일생을 헌신한 한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1975년 9월 한국을 방문하여 숭실대학교에서 1년 동안 지리와 역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작성일:2017-06-30 12:22:12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