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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Fletcher, Archibald G.(1882-1970, NP) / Rodgers, Jessie

닉네임
김남현
등록일
2017-06-30 12:48:20
조회수
2530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00_2015210076_김남현.hwp (4055040 Byte)
I. 기본사항

A) Fletcher, Archibald G.
1. 이름: Archibald Grey Fletcher / 플레처 / 한국명: 별리추(鱉離湫)
2. 생몰연도: 1882.8.-1970
3. 출신 및 소속: 영국, 미북장로회
4. 한국 선교 기간: 1909-1942, 1946-1952
5. 연표1909.8.28. -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원주에 파송.1909.11. - 경북 안동선교부로 전임, 의료선교 시작.1910.9. - 대구로 이전, 1942까지 동산기독병원 원장으로 봉직.1914, 1928, 1931 - 3차에 걸쳐 새건물 건축, 현대식 의료 시설.1916 - 나환자를 위해 대구나병원 설립, 자활위해 헌신.1918 - 교남기독교청년회(현 대구 YMCA) 발기위원으로 활양.1921 - 병원 전도회 조직, 산간벽지 순회하며 의료, 복음 전도.1942.6. -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1946 - 재내한1946 - 서울 세브란스 병원 이사로 병원 복구 사업.1946 - NCC 실행위원, 조선기독교서회 이사로 활약.6.25 전란 기간 - 대구, 부산으로 피난하여 기독교세계봉사회의 피난민 구호사업 관장.1952 - 선교사직에서 은퇴 후 귀국.
6. 가족 사항부인: Fletcher, Jessie Rodgers.아들: Archibald Jr. Fletcher아들: Donald R. Fletcher,딸: Elsie Fletcher
7. 논저[논문]- Good Luck Pine, Women’s Works for Women, Vol.34, No.2, 1919.- Hospital Evangelism in Korea, Missionary Review, 1925.6.- Medical Missions in Korea, Hospital Social Service, No.14, 1926.- Hospital Evangelism, Report of Progress, China Medical Journal, 1926.8.- A Double Present Day Miracle in Korea, Missionary Review, 1927.9.- Hospital Evangelism in Korea, Missionary Review, 1927.

B) Rodgers, Jessie(로저스 / 미국 / 미북장로회)
1. 이름: Fletcher, Jessie Rodgers / 로저스 / 한국명: -
2. 생몰연도: 1884-1971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북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1912-1942, 1946-1952
5. 연표1912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선교활동플레처와 결혼 후 대구와 안동 등지에서 여성전도사업 전개1942.6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1946 재내한, 서울에서 활동1952 은퇴 후 귀국
6. 가족사항남편: Archibald Grey Fletcher아들: Archibald Jr. Fletcher아들: Donald R. Fletcher,딸: Elsie Fletcher


II. 선교사 소개: Fletcher, A. G.(1882-1970) & Rodgers, Jessie(1884-1971)


1. 한국의 치료를 위해, 한국의 아픔과 함께

의료 선교는 한국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추진한 선교 사업으로써 한국 선교 초기 단계에서 선교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한국의 첫 의료 선교사로 입국한 알렌이 태어나기 불과 한 달 전, 별리추(鱉離湫) 선교사가 영국에서 출생했다. 그는 이제 일본이 막 한국을 자신의 통치 아래로 집어삼키기 직전인 1909년 8월 28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한국에서 시작된 의료 선교와 맞물려 태어나고 한국의 아픔이 극대화되었던 1909년 입국한 별리추 선교사는 마치 병든 한국을 위해 준비된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생애는 한국의 치료를 위해, 한국의 아픔과 함께 한 생애였다.


2. 대구 동산기독병원으로 오기까지 바쁨의 시간들

그의 첫 파송지는 강원도 원주였으나 얼마 후 그곳이 미국 감리회 선교구역으로 확정됨에 따라 1909년 11월 경북 안동선교부로 전입되었다. 불과 약 5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일손이 부족했던 당시 평북 강계 및 황해도 재령에 있던 병원에서 급히 의사를 요청해 옴에 따라서 안동에 파송된 1년 동안 시간을 두 곳에 할애하여야 했다. 그리고 이후 그는 1910년 대구 동산기독병원을 창설자 존슨(W. O. Johnson) 의사가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한 자리로 부임하여 그 해 9월 대구로 옮겨 32년의 대구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 이와 같은 자신의 상황을 “Driven out to die”, 즉 죽기까지 내몰림이라고 표현했다. 선교의 열정을 품고 온 그에게도 이와 같은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3. 대구 동산기독병원 원장으로 활약하다.

그러나 그는 대구에서 안정적인 사역이 보장된 후,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일구는 주역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별리추의 부임 이후 그의 사역지인 대구 동산기독병원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에 의해 대구 동산기독병원에는 1913년에 사회구제활동을 위한 시설인 애락원이 설립되어 당시 만연한 나병퇴치와 나환자 진료뿐만 아니라 무의촌 진료활동 등의 수많은 의료봉사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지역사회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행정적인 측면에서 별리추의 부임 이후 동산기독병원은 1914년, 1928년, 1931년 3차에 걸쳐 새 건물을 증축하게 되었고, 현대식 의료 시설 및 의료진을 확보해 영남 제일의 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 대구 나병원을 설립함

그는 또 1916년 나환자를 위한 대구 나병원을 설립하여 소외된 환자들을 수용하여 치료하면서 자활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헌신하였다. 1917년 9월 대구 외각 1마일 거리에 첫 번째 건물이 건립된 이후 발전을 거듭한 대구나병원은 모든 환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질병으로부터 치유되게 돕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이후 대구나병원은 10년간 838명의 환자들을 돌보았고 그 중 약 157명이 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구나병원 안과 밖으로 교회를 세워 약 100여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후로도 이 복음의 사역은 확장되어 갔다.


5. 대구의 마음이 열림

이러한 그의 사역은 복음의 불모지와도 같은 대구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당시 안동을 비롯하여 대구 경상 지역은 전국에서 양반들의 기조가 가장 강한 지역으로써 약 10%의 양반 주민들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기 어려운 상황 중에 있었다. 게다가 수많은 농부들은 너무나 가난하고 생업에 매여 주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 중에 있었다. 한국 전통 문화와 불교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경상도 지역은 그야말로 복음의 불모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산기독병원의 사역과 발전은 양반들의 마음에도 불을 지폈다. 그의 사역의 결과 수많은 환자들이 병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도 치유되기 시작한 것이다. 1928년 경 E. Adams의 보고에 따르면 대구는 더 이상 불모지가 아니라 거대한 복음의 보고와도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6. 육신의 의사를 넘어 영혼의 의사로 활약하다.

특별히 별리추 선교사는 의료 선교만 아니라 의료사업을 통한 복음전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 그의 진정한 관심은 영혼의 치유에 있었다. 특히 그는 자신이 병원장으로 있는 동산기독병원의 모든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1) 모든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것 2) 가능한 한 많은 환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것 3) 개종한 자들은 교회와 꼭 연결을 맺어줄 것. 그는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병원 안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병원 밖으로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부임 후 1년 만에 1911년 선교활동을 위한 전도회를 설립하였으며 이 전도회를 시작으로 대구를 비롯한 경상 지역에는 큰 복음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의 사역의 불씨는 병원 밖의 일반인에게도 향한 것이다. 그는 박덕일(朴德一) 목사를 초빙해 이 전도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병원 직원들로 조직된 이 전도회는 순회 진료반을 편성하여 산간 벽지로 순회하며 의료활동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데 주목적이 있었다. 1938년 보고에 의하면 8년 동안 전도회를 통해 설립된 교회가 78처에 달하였다. 별리추 선교사가 세운 이 전도회는 현재는 이 지역에 147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선교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7.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애를 쓰다.

그러나 별리추의 관심과 사역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회 참여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1918년에 교남기독교청회(현 대구 YMCA) 발기위원을 활약하는 등 청년운동에도 공을 남겼다. 일본의 진주만 전쟁으로 인해 강제 추방을 당하였지만, 이후 1946년 한국에 다시 들어와서도 그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는 서울에 머물면서 세브란스병원 이사로 병원 복구 사업에 헌신하였고, 이외에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실행위원, 조선기독교서회(KCLS) 이사로 활약하였다. 6.25 사변 중에는 대구-부산으로 피난하여 기독교세계봉사회(CWS)의 피난민 구호사업을 관장하기도 하였다. 그의 부인(Jessie Rodgers) 역시 이 일에 열심이었다. 그녀는 1912년 독신으로 내한하여 활약하다가 그와 결혼한 후 대구와 안동 등지에서 여성 전도 사업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8. 강제 추방, 그리고 은퇴

그러나 그의 이러한 사역은 일제의 강제 추방령에 의해 멈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귀국과 사역의 멈춤은 말 그대로 외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 그의 사역은 진실했고, 그의 열정은 하나님의 소명에 뿌리박은 것이었다. 1941년 말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병원 건물은 일제에 의해 징발되고, 별리추는 자택(알파 하우스)에 연금되었을 때 그의 가족들이 남긴 대화의 기록을 그의 아들 Donald R. Fletcher가 그의 글에서 이렇게 기록한 바가 있다.

“두렵소, 당신?” (별리추) “네. 조금 그런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선교함에 기뻐요....(중략).... 나는 우리가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을 우리가 하고 있다고 믿어요.”(아내) “그렇다면 우리 함께 이 일을 계속 합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별리추) 그의 목소리는 깊고 강했다.


9. 귀국 이후

그는 결국 1942년 6월 강제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선교 사역은 진실 되었고, 그것은 그의 열매로 증명되었다. 그 이후 그는 한국이 해방된 후 1946년 미국 북장로회에서 재차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였을 때에도 제1진으로 서울에 도착하여 1952년 선교사직에서 은퇴하고 귀국할 때까지 활약하였다. 비록 그는 나이의 여건 상 열정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에게 감사하는 자들이 아직 한국에 남아 있다. 그의 열정은 오늘도 한국, 특별히 대구와 경상 지역에 남아 있다. 한 사람의 선교사의 사역이 남긴 족적이 오늘 우리 곁에서 아직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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