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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ewson, Georgiana Florine(1894-1946, SP)

닉네임
박치형
등록일
2017-06-30 12:49:52
조회수
238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_ M0210_ Hewson Georgiana Florine.hwp (1118720 Byte)
1. 내한선교사총람
1. 생몰연도: ?-1946
2. 학력 :
3. 경력 : 1917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전남 목포, 광주, 순천 등지의 기독교병원에서 간호원 봉직
일제말 강제 추방
4. 가족사항 :
5. 논저:
6. 참고문헌: <<기백>> 16권; 구미인조사록; MTK; KMYB; CMYB


2. 기독교대백과사전
휴슨 Hewson, Georgiana Florine (?-1946)
미국 남장로회 여선교사, 간호원.
한국명 허우선(許友善). 1917년 내한하여 전남 광주, 목포, 순천 등지의 기독교병원에서
간호원으로 봉직하였으며 일제말기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참고문헌 – MTK; KMYB; CMYB; 구미인조사록


3. 선교사 소개: 허우선(Hewson, Georgiana Florine, ?-1946)

자료를 찾아 인터넷 등 여러 곳을 알아보았지만, 마땅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허우선(Hewson, Georgiana Florine, ?-1946) 선교사가 당시 광주, 목포, 순천 등지의 기독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봉직하였다는 것을 정보로 그 시기에 생겨난 기독 병원을 알아보고 그 병원들에서 봉직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 순천 안력산 병원 순천광장신문 [도시의 기억을 찾아서-11] 선교사가 만든 근대 도시 순천 2 - 안력산병원 http://www.agora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3780

안력산병원의 이름은 안렉산더병원이었다. 순천에 안력산병원으로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알렉산더라는 영문 이름을 당시 표현으로 고쳐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근대기 순천뿐만 아니라 전남 동부 지역은 미국의 남장로회에서 순천에 의료 선교사를 파견하기 전까지는 의사나 병원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일본인의 왕래가 많았던 인근 여수에서도 1907년 일본인에 의해 약포가 운영되지만 의원이 처음 개원한 것은 1917년이었다. 따라서 전남 동부지역 주민들이 서구의 의술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순천선교부의 의료 활동이 처음이었고, 그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한 표현이 아니다.

순천에서 의료 선교사의 진료나 치료가 처음 이뤄진 곳은 주택이나 교회가 아니었고, 병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순천선교부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가설용 목재로 축조된 10자×10자(≒3m×3m) 크기의 건축 현장 임시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진료가 시작된 것은 선교부의 각종 시설공사가 한창이던 1913년으로 한국의 풍토병인 이질에 감염된 코잇선교사 가족의 치료가 계기였다. 당시 한국에 처음 파견된 다른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학공부 중이던 티몬스 의사와 그리어 간호사의 파견으로 진료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임시로 축조된 건물에서 7개월 동안 68명을 수술하고 3814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순천선교부의 선교병원인 순천병원이 개원한 것은 1914년이다. 순천병원은 18자×28자(≒5.4m×8.4m) 규모의 신축 건물로 연와조로 건축된 개량 한옥이었다. 현재 중앙교회 북쪽, 순천의료원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조지와츠 기념관의 북쪽에 있었다. 그리고 1916년에 순천읍성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언덕에 안력산병원이 건축된다. 안력산의 원래 명칭인 안렉산더는 군산의 선교병원인 구암병원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의료 선교사의 이름에서 붙여진 것이다. 그는 1903년 부친상을 당해 귀국하면서 한국에서의 현지 선교활동은 중단했지만 기부를 통해 순천에서 또 다른 선교의 장을 개척한 것이다. 신축된 병원은 석조 건물 3층으로, 30개의 병상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병원의 규모는 조선의 선교병원 가운데 두 번째로 컸다. 이만열은 ‘한국기독교의료사’에서 안력산병원 개원 당시 조직과 관련되어 병원장 티몬스와 마취의사인 티몬스의 부인이 의학생을 가르쳤고, 6명의 의료 조수와 세브란스에서 의학 공부 중이었던 박승봉 그리고 전도인과 전도부인 각 1명이 소속되었던 것으로 소개했다. 물론 이들은 순천병원 당시부터 충분히 훈련되고 교육된 인력이었을 것이다.

1917년 선교부의 의사로 내한한 로저스가 티몬스와 윌슨에 이어 이곳에 부임하는데 그는 안력산병원의 의료 선교사 중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다. 1917년부터 병원의 한국인 의사가 활동했고, 1920년에는 20명의 조수가 근무했다. 1930년 이후에는 다수의 한국인 의사가 활동하였는데, 1932년 로저스와 정민기 외에 광복 이후에 여수구호병원장을 역임한 윤병서 등 세명이 있었고, 1930년 중반 이후에 간행된 ‘호남평론’에서는 알렉산더병원을 소개하면서 의사로 김용식을 추가로 거론하고 있어 지속적으로 의료진의 충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력산병원은 꾸준히 성장하지만 무상 치료 환자가 60%에 달해서 사무 종사원과 간호사의 희생이 뒤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에는 저임금, 지나친 출근시간 엄수, 근무 중 기물 파손 배상과 인격 무시 등이 문제되어 파업으로 이어지지만 주민들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정민기의 주선으로 원만히 해결된다. 안력산병원은 개원 이후 매년 증가하는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1932년 12월 일자형(-)의 기존 병원에서 십자형(-)으로 중축된다. 알렉산더 선교사의 부인과 순천선교부 설립의 재정 지원자이자 병원 운영을 보조한 와츠장로 부인의 기부로, 화재로 소실된 매산고등학교 은성관의 외형이 이때 비로소 완성된다.
작성일:2017-06-30 12:49:52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