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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Greenfield, M. Willis(미상, NP) / Greenfield, Maude Saxe; Mills, Anna Rae

닉네임
조규진
등록일
2017-06-30 12:51:38
조회수
2384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85_2011210128_조규진.hwp (758272 Byte)
Greenfield, M. willis 선교사

I. 기본사항
1. 이름: Greenfield, M. willis / 그린필드 / 한국명: 권필두
2. 생몰연도: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7. 9. 15 – 1916. 6. 5
5. 연표
1907.9.15.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선교활동
1908. E. H. Miiler 목사의 휴가와 정부와의 관계로 인해 ‘연못골’의 소년학교 교장 역임
1909. 경신학교 교장직 사임.
1908.11.11. 숭신방(명륜동)에 이석진 조사를 파송하여 숭신예배처소(명륜중앙교회)를 마련.
1910. 구미 옥계교회 약 15평 초가 예배당 건축.
1910.1.29. 부인(Maude Saxe Greenfield) 사망.
1911. 대구지역 선교부로 이전.칠곡군 남율교회 설립(이사윤 조사 시무).
1912. W. M. Barrett 목사가 담당한 북쪽 계통(안동을 포함한 북쪽)을 맡아 선교함.
1913. 약180일 동안 시골마을과 산길 1530마일 이상 걸어 다니며 복음전도.
1914. 영일군 대전교회 설립 기여. 경산군에 조사와 권사, 임시전도사를 대동하여 김처진 씨 집에 임시전도소 마련. 경산군 경산읍 교회 설립.
1916. 6. 5. 사임하고 귀국 후, 밀즈(Mills, Anna Rae)와 결혼

6. 가족사항
부인: Greenfield, Maude Saxe(첫 번째 아내), Mills, Anna Rae(귀국 후 재혼한 아내)

Greenfield, Maude Saxe 선교사

I. 기본사항
1. 이름: Greenfield, Maude Saxe / 그린필드 / 한국명:
2. 생몰연도: 1874-1910.1.29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7. 9. 15 – 1910. 1. 29(사망)
5. 연표
1874. 미국 뉴욕 주 왈덴(Walden)에서 출생
1907.9.15. 북장로교 선교사로 남편(Greenfield, M. Willis)과 함께 내한하여 선교활동
1909. 정신여학교 제6대 교장 취임
1910.1.5. 아들 그린필드(Greenfield, Willis Saxe)를 낳음
1910.1.29. 산후 후유증으로 출산 3주만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 양화진 제1묘역(다-21)에 안장

6. 가족사항
남편: Greenfield, M. Willis
아들: Greenfield, Willis Saxe

Mills, Anna Rae 선교사

I. 기본사항
1. 이름: Mills, Anna Rae / 밀즈 / 한국명:
2. 생몰연도:
3.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08-1914
5. 연표
1908.12.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경산과 경주에 설치된 기지에서 사역
1911.1. 여성 지도자를 위한 강의 개설6. 일요일 교사들을 위한 강의를 개설함.
1914. 선교사직 사임하고 귀국후, 그린필드(Greenfield, M. Willis)와 결혼

6. 가족사항
아버지: Mills, Thornton A.
남편: Greenfield, M. Willis


Ⅱ. 선교사 소개: 그린필드(Greenfield, M. Willis, -)

1. 열정의 북장로교 선교사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1530마일 이상 엄청난 기록
그린필드(Greenfield, M. Willis, -)는 쉬지 않고 걷고 달렸던 열정의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경신학교 교장과 경상북도 지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1913년에의 기록으로 보았을 때 그 해에만 180여일 동안 시골 마을과 산간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 거리가 자그마치 6천리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마일로 환산하면 1530마일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엄청난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열정적으로 전도활동을 했던 그는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도 교회를 설립하는데 열정을 다했다. 1908년 11월 11일 숭신방(명륜동)에 이석진 조사를 파송하여 숭신예배처소를 마련했는데, 이것이 명륜중앙교회의 전신이다. 조선 예수교장로회 사기에 의하면 같은 해 청송군에 ‘수락교회’를 설립하였고, 예배당도 건축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1910년에는 구미 옥계교회에 약 15평의 토당 초가 예배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그는 1911년 이후에는 대구지역에 있는 선교부로 옮겨 선교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칠곡군 남율교회를 설립하고 이사윤 조사가 그 교회를 시무하도록 했다고 한다. 특별히 그는 한국에서 시골길의 장거리 전도여행 기록보유자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180여일 동안에 무려 6천리에 해당하는 1530마일, 2,461km를 여행했다고 하니 그의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 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하다.
1914년에도 열심히 전도한 결과 영일군 대전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했으며, 같은 해 경산군에 조사와 권사, 임시전도사를 대동하고 김처진 씨 집에 임시전도소를 마련하고 전도에 힘을 써, 경산군 경산읍 교회도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린필드 선교사는 의성, 군위, 칠곡, 경산, 연일군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9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그린필드 선교사는 기록에서부터 볼 수 있듯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였다. 그를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를 알게 되었고, 특별히 필자가 사역하고 있는 대구, 경북 지방에 복음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썼던 선교사라는 것이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에 관한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복음 전하기에 힘쓰다 주님 곁으로 돌아간 그와 같은 선교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 조선에서 맞은 아픔, 아내의 죽음.
그린필드 선교사는 혼자 한국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내 Greenfield M. Saxe와 함께 들어왔다. Maude Saxe는 그의 남편과 함께 기독교 교육에 힘썼던 사람 중 하나이다. 1909년에 정신여학교 제6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임자인 에드워드 H. 밀러의 부인 헨리 밀러(Miller, M. henry)선교사가 안식년으로 귀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정신여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인 1910년 1월 5일에 아들을(Greenfield, Willis Saxe)를 낳았으나 산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10년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양화진 제 1묘역(다-21)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녀의 묘비 옆에는 남편 그린필드의 묫자리가 남아있으나 비어있는 상태이다.
그녀는 생전에 “시신의 매장 준비(Preparation of the body for burial)”라는 제목의 논문을 The Korea Mission Field에 기고하기도 했다. 본인이 직접 시신을 매장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그 모든 과정에 있어서 굉장히 사실적이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짧은 글이지만 당시 장례 문화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내를 잃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도의 열정이 식지 않았던 그린필드 선교사는 진정한 복음 전도자였음이 분명하며 그와 같은 헌신과 희생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있게 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3. 기독교 교육에 앞장섰던 선교사 부부.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린필드 선교사의 부인 Maud Saxe는 정신 여학교의 교장이었으며 기독교 교육, 특별히 여성들을 위한 교육에 힘썼던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린필드 선교사 또한 복음 전도 외에도 기독교 교육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사람이었던 것을 볼 수 있다. HKMPC의 기록을 보게 되면 John D. Wells가 세운 학교가 있었다. ‘연못골’에 세워진 학교라는 것을 통해 그리필드 선교사가 서울에서도 사역했음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초대 학장으로 John D. Wells가 역임했다고 알려지고, 1905년에는 E. H. Miller 목사가, 1908년에는 그린필드 선교사가 교장으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 학교의 이름은 경신학교이며 1902년에 언더우드가 설립한 학교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되는 학교인데, 이곳에서 그린필드 선교사가 1908년 3월 교장 서리, 즉 휴가 그리고 정부와의 관계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던 E. H. Miller 목사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맡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린필드 선교사가 선교사로서의 사역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재혼을 한 여성인 Mills, Anna Rae 또한 여성 기독교 교육을 위해 한국 땅에서 헌신했던 사람이었다. 그녀 또한 북장로교 선교사로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서 사역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Adams 여사와 Johnson여사를 도와 대구, 경북 지역에서 열심히 여성 교육 사역을 감당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역했으면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Anna Rea 양이 1908년 12월에 왔고 3년 반 동안 열정으로 전력을 다했고(put a great deal of enthusiasm)...”

그녀는 이후에도 여성들을 위한 수업과 강의를 이어나갔으며 여성 지도자들을 위한 강의, 일요일 학교 즉, 교회학교 교사들을 위한 강의도 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녀의 사역은 교육 사업을 통한 사역과 길선주 목사와 함께한 캠페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를 결단하며 돌아오게 되는 역사들을 경험한다. 그 가운데 그녀가 얼마나 기쁘게 사역하고 열심히 사역했는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달콤한 이야기들(sweetest story)을 전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대구 지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대한 열정 복음에 대한 열정에 감명 받아 더욱 열심히 사역했으며, 더욱 부흥할 것에 대한 확신을 갖고 사역했던 것이 분명하다.

선교사들이 한국의 선교전략 중 하나로 의료와 교육 선교를 했는데, 그 중에 대구, 경북 지역을 위해 일했던 그린필드와 그의 아내가 될 Mills, Anna Rea 선교사의 열정은 오늘날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작성일:2017-06-30 12:51:38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