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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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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McEachern, John(1884-1957, SP) / McEachern, Netta Shaw Cooper

닉네임
한재영 수정본
등록일
2017-06-30 13:19:22
조회수
392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_M0189_2015210205_한재영.hwp (557056 Byte)
I. McEachern, John 기본사항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박혜진엮음, 「내한선교사 총람」, (수정증보판),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369.

1. 이름: McEachern, John / 맥에천 / 한국명: 매요한 (梅約翰)
2. 생몰연도: 1884.10.22.-1957.11.18. Personal reports of the southern missionaries in korea 제 1집

3. 출신 및 소속: 캐나다,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12ー1929(1933?)
군산서북·충청남서부 지방
보령- 전역
부여- 옥산·외산·남·홍산
서천- 서남·마동·종초·화양·기산·한산·마산·문화 활동지역은 http://m.blog.daum.net/yunara1/6473475 전주 서문교회사 100년사 14 페이지를 참고했다.


5. 선교사역 및 중요한 생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69, 송현숙 엮음, 「미남장로회 선교사역편람1892-1982」,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 한서노회, 2012), 329-330.
(군산 선교부 소속)
1884년 10월 22일 출생
1912년 어학, 전도사역, 여학교 보조
1913년 어학, 시골교회 순방, 충남 서천지방을 비롯하여 주로 농촌선교에 헌신
1914년 어학, 비인*남포*세천*한산*홍산 북부구역 전도
1915년 북부구역, 남부구역(1/2) 전도사역
1916년 북구(부)구역, 남부구역(Bull) 전도사역
1917-1920년 북부구역, 궁말교회 담임(현 구암교회)
1919년 북부구역, 궁말교회 담임, 안식년
1921년 10월 6일 Netta Shaw Cooper와 결혼
1921년 북부구역, 북동구역 전도사역, 전북남자성경학교 군산대표
1922년 북부구역, 북동구역 전도사역, 전북남자성경학교 위원
1922-1924년 동련교회에서 하위렴 선교사의 건강악화로 대신 당회장직을 사역함. http://dongryun.hompee.com/m/html/index.mo?menuId=27766&topMenuId=4&menuType=27&newMenuAt=false&tPage=2&sPage=1

1923-1924년 북부구역, 북동구역 전도사역
1925-1928년 북서구역 전도사역
1927년 안식년
1929년 선교사 사임
1933년 술산교회 사역
1957년 11월 18일 소천.
쿠퍼와 결혼, 부부가 함께 군산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에서 성경교사 활동
남성경학교 교사
6. 가족사항: McEachern, Netta Shaw Cooper(부인)
자녀 5명
7. 학력 Personal reports of the southern missionaries in korea 제 1집, 송현숙 엮음, 329.

1903-1907 데이비슨대학교
1908-1911 콜롬비아신학교
1921 화이트성경학교

II. McEachern, Netta Shaw Cooper 송현숙, 331.

1. 이름: McEachern, Netta Shaw Cooper
2. 생몰년도: 1890-1973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캐롤라이나 주
4. 한국선교기간: 1922-1929
5. 선교사역 및 중요생애(군산 선교부)
1890년 남 캐롤라이나에서 출생.
1921년 10월 6일 McEachern, John과 결혼
1922년 어학
1923년 어학, 지역 전도사역
1924년 어학, 여학교 교장대행
1925년 어학, 지역 전도사역
1926년 어학, 지역 전도사역
1927년 미국으로 잠시 귀국
6. 가족사항: McEachern, John(남편)
자녀 5명
7. 학력
1906-1910년 장로회 여자대학
1915년 장로교병원
1924-1924년 군산 멜본딘 여학교

Ⅲ. 선교사 소개 매요한(McEachern, John, 1884-1957)
1. 소개
매요한 선교사는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캐나다 장로교회의 소속으로 군산쪽에 와서 군산노회 소식 소속으로, 1912-1928년까지 사역을 했다. 1922년에 Netta Shaw Cooper와 결혼해서 자녀 5명을 낳았다. 선교사에 대한 자료는 단편적으로 밖에 기록이 되어 있으나 그와 관계된 키워드를 찾아보고자, 네비우스 선교 정책, 군산의 궁말교회(현 구암교회), 종지교회, 술산교회, 근대교육(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 서천*부여*보령 지역에서 사역을 진행했다.

2. 네비우스 선교 정책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국교회 선교를 위한 총체적인 선교전략으로 1890년 채택한 것이 소위 말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다. 하비칸의 지적대로 이 선교정책은 성경적 보수주의가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의 구체적인 본보기로 한국 선교사역을 집약한 대표적인 선교정책이다.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Ⅰ」,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6), 616.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은 장시간 토의를 거쳐 네비우스의 선교 정책의 원칙으로 받아들여 시행하기로 결정한다. 이 선교방법은 이미 조직된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선교지의 초창기 선교를 위하여 적합한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김영재, 「한국교회사」, (수원: 합신대학교출판부, 2014) 122-3.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사실 중국에서는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나, 한국에서는 교회의 발전에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Spencer J Palmer, Korea and chrisitianity (Seoul: Hollym Corp, 1967), 27, 김영재, 125에서 재인용.
곽안련은 한국교회의 급성장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기인한다고 평하며, 베어드도 1927년에 한국 선교의 성공에는 네비우스의 힘이 컸다고 피력했다. 김영재, 126.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카펜터의 버마 카렌 선교 역사를 참고했으며, 1880-90년대 선교대회들의 자료를 읽어서 최신 선교학의 논의를 숙지했다. 이 가운데, 아직 한국교회사가들이 그 영향을 거의 분석하지 않은 책이 카펜터(S. H. Carpenter)의 Self-Support(1883)와 로렌스(E. A. Lawrence)의 Modern missions in the East다. 이 책들을 보면 1890-1900년대 한국 장로회 선교회들이 얼마나 자급원칙을 추진하려 했는지와 아시아 선교 역사와 상황을 분석하고 배우려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아시아 종교에 관한 공부였다. 선교사들은 2년차에 「오륜행실도」, 5년차에 「중용」과 아시아 종교에 대한 전문 서적들을 읽고, 쉬운 문리로 한문 서적을 읽을 수 있는 실력까지 배양했다. 옥성득, 「다시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 164.


3. 군산의 궁말교회(현 구암교회)
군산 구암교회는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입국한 미국 남장로 교회 소속 “7인의 선발대”의 전킨, 장인택 조사[1893.1.27 선교사 공의회에 유일하게 참석한 한국인으로 후에 본교회 회계 집사 등으로 헌신함]에 의해 설립되었다. 1899년 구암 동산에 세워진 “군산 선교 스테이션”은 호남과 충청 지역의 선교 교두보로서 지역 교회와 선교 거점 교회로서의 역할을 했다. 또한 한강 이남 최초의 3·1 운동 발원지로서 위상을 세웠다. 한국 기독교의 성지로서 1919년 3월 5일 거사를 이끌었다.[군산 구암 교회 성도 28명 이상이 주동 및 가담, 14명이 독립 유공자로 추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688073&cid=51946&categoryId=55027 [네이버 지식백과] 군산 구암 교회 [群山龜岩敎會]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구암교회는 제 1대 전위렴, 부위렴, 하위렴, 김필수(제 4회 총회장 역임), 매요한 목사가 시무하였는데, 전위렴 목사이후, 부위렴, 하위렴, 매요한 세 분 목사에 의해서 형편에 따라 시무하였다. 이재문, 정석동, 「군산선교부에 대한 연구」, 역사와 실학 55 (서울: 역사실학회, 2014), 302.

3.1운동 때, 매요한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서, 둘 중 하나로 추정이 될 수 있다. 독립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강제로 안식년을 가졌거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서 중립적으로 외쳐서, 안식년을 가진 것인가 생각이 든다.
거기에 대해서 인터넷을 조사해 본 결과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다. 바로 종지교회에서의 사역 현장이었다.

4. 종지교회
종지교회는 유성열 장로를 중심으로 임시 당회장 불(한국명 부위렴), 매커첸(매요한) 등이 순회설교 하면서 조직교회로 성장한다.
“종지교회 교인 등이 한산 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첩보에 일경이 마산면에서 읍내로 진입하는 길에 바리케이드를 쳤어요. 만세운동 가려던 사람들이 종지교회로 몰렸고 이어 전열을 가다듬어 신장리 장터로 간 거죠.”
이 목사가 일경의 만세운동 저지 능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http://m.missionlife.co.kr/view.asp?gCode=0001&arcid=0923708958&code=23111111

종지교회에서의 그들의 사역은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는 도화선의 역할을 감당했고, 그들의 사역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졌음을 확인한다. 그가 안식년을 간 것은 강제로 갔을 수도 있음에 무게가 실리게 된다.

4. 술산교회
1930년 김관순의 집에 기도처를 정하고 첫 예배를 드린 후 1933년 9월 21일 설립 예배를 드림으로써 설립되었다. 1931년 11월에는 술산리 299번지에 예배 처소를 구입하였다. 1933년 매요한 선교사가 당회장으로 첫 학습 세례 문답을 하였으며 1933년 9월 21일 첫 예배당을 완공하여 교회 설립 예배 및 헌당 예배를 드렸다. 이 때 첫 서리집사인 김관순, 채의기, 조해빈이 임직하였다. 1956년 두 번째 교회당을 술산리 383에 1975년에는 세 번째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1985년 복지회를 발족하였고 1998년 9월 21일 교회 65주년 감사 예배를 드리고 교회 역사를 편찬, 발간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Index


5. 근대교육
개신교 선교정책에서, 의료선교 못지않게, 한국개신교 선교사들이 정성을 기울인 것은 교육을 통한 선교였다. 이들이 관심을 기울인 미션스쿨이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가 아니라 “전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종교적인 훈련을 수행하는 정책을 유지하는” 그런 종류의 학교였다. 박용규, 553.

“미션스쿨의 주된 목적은 한국 백성들 가운데의 적극적인 기독교 사역을 위해 한국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베어드가 지적한 것처럼 “종교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은 미션스쿨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미션스쿨의 입학생을 신자들에게만 국한시킨 것은 아니었다. 미션스쿨을 불신자와의 접촉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도 강했다. 실제로 미션스쿨에서 믿지 않는 자들을 입학시킨 경우도 있었다. 신자들에게 입학이 제한되든 입학 후에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든 미션스쿨은 처음부터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둔 한국의 서양교육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여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개신교 선교를 가능케 한 복음의 접촉점이 되었다. 박용규, 554.

전위렴 선교사가 군산 선교부에 부임하였고, 그리고 군산교회와 군산 남녀 미션학교를 설립하고 군산 지방과 김제 지방에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고, 그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끝까지 한국인을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삶을 살았던 선교사였다. 김수진 지음, 「호남기독교 100년사 전북편」, (서울:쿰란출판사, 1998), 107.
이의 뒤를 이어서, McEachern, John 선교사가 온 것이다.

1)영명학교(현 제일고교)
군산 영명학교는 1904년에 보통과와 중등과로 분리하여 운영을 하게 되었으며, 보통과는 안락소학교라 하여 구암교회와 개복교회가 협력하여 운영하였는데, 이 안락소학교라 하여 잠시 군산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알렉산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의 강압으로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교회가 운영하는 대부분의 학교를 폐쇄하였다. 이 일로 충남 한산에 있는 한영서원 중등과가 폐지되면서 이 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군산 영명학교로 오게 되었다. 미션학교는 기독교 사상의 이념 하에 설립된 학교이므로 교과 과정에서 성경과목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김수진, 104.

고등과에서는 교과과목이 다양했다. 성경과목은 4년간 배웠으며, 특이한 과목은 세계사였으며, 그리고 수학과 자연과학, 기독문학, 작문, 음악, 체육 및 율동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군산 영명학교는 우수한 민족주의달이 교사로 활동했음을 3.1운동에서 잘보여주고 있다. 1910년대부터는 박연세, 김인전, 문용기, 문정관, 이두열, 김수염, 고석주 등이 이 학교 출신들과 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전북지방의 3.1운동을 이끌어갔다. 김수진, 105.


2)멜본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
군산의 여성 교육의 요람지가 되었던 군산 멜불딘 여학교는 전위렴 선교사의 부인인 레이번 여선교사의 안방에서 문을 열었는데, 문을 연지 얼마 안되어 남편의 건강관계로 전주로 이주한다.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여성 교육에 힘을 기울지만 남편의 사망으로 그녀는 더 이상 호남 땅에 머물지 못하고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영원히 귀국하고 만다. 그러나 그가 문을 열어 놓았던 멜본딘 여학교는 그의 희생적인 헌신으로 학생들을 구암으로 인도하여 왔었으며, 그가 학교 문을 열 때는 학생들이 오지 않아서 그의 조사인 김씨 부인을 대동하고 마을을 찾아 다녔다. 겨우 학생들을 모집하였지만 이 학생들 가운데는 이미 결혼한 30대 부인들도 있었다. 30대 부인을 학교에 입학시키기자 양반의 가정에서 결혼한 부인을 그대로 밖에 내보낼 수 없다하여 하인을 딸려서 학교까지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때 하인도 양반댁 부인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같이 공부하는 현상도 일어났다. 임피고을에 살고 있는 양반들은 군산 여학교를 쌍놈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손가락질을 하고 나쁘게 평을 하였지만 일반 민중들은 군산여학교를 그렇게 보지 않았으며, 양반의 규수들과 하인들이 함께 어울려서 신문명을 배우는 학교로 점점 알려지게 되었다. 김수진, 107-8.

전위렴 선교사의 부인인 레이번 여선교사의 후임으로 어아력 선교사 부인이 학교의 책임을 맡고 학교를 운영해 갔다. 부위렴 선교사의 부인인 엘비는 1899년 군산에 선교사로 도착하였고 1902년 부위렴 선교사와 결혼을 하였다. 여선교사는 자기의 모교인 미국 멜본딘 대학에 군산여학교의 건축을 호소하고 나셨다. 그녀의 호소를 들은 멜본딘 대학 졸업생들과 재학생들은 모금운동에 나섰고 심지어 멜본딘 대학의 여학생들은 아침 끼니를 거른 돈을 모아서 내놓기도 했다. 어떤 학생들은 빵장사을 해서 얻어진 이익금을 건축비로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모아진 헌금으로 군산 구암에 3층으로 이어진 신식 교사를 건축할 수 있었다. 한동안 군산여학교라 불렸던 학교의 명칭을 미국의 멜본딘 대학 학생들과 졸업생들의 고마움을 기리는 뜻에서 군산 멜본딘 여학교라 부르게 되었다. 김수진, 108-9.

6. 서천·부여·보령 지역
1902∼1923년에 걸쳐 남장로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4년 전주 스테이션을 개설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1896년 군산에도 스테이션을 설치하여 금강 북쪽 지역까지 선교에 나섰다. 1903년 봄 부위렴 선교사는 금강을 건너 서천을 방문하였고, 1905년 11월 한달 간 군산에서 당진까지 충남 서해안을 순회 여행했다. 대부분 소농민층이었지만, 간혹 양반관료도 끼어 있었다. 더욱이 불신자이면서도 이미 YMCA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충남의 선교 환경은 선교사들이 모르는 사이 바뀌고 있었다. 1921년 현재 1059명 이상(매요한 지방+종동+구동, 부여의 5개 교회가 통계 누락됨)이며, 주일학교 학생 1,150명 이상이 있었다. 1923년 현재 서천·보령·부여지역에는 33개의 교회에서 두 명의 선교사 그리고 한 명의 한국인 목사, 세 명의 장로, 12명 이상의 영수, 그리고 5명 이상의 조사가 활동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작성일:2017-06-30 13:19:22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