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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Patterson, Jacob Bruce(1876-1933, SP) / Patterson, Rosetta P. Crabbe

닉네임
3-2 심미송
등록일
2017-06-30 13:24:19
조회수
2438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30_2015210102_심미송.hwp (2440704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 Patterson, Jacob Bruce / 패터슨 / 한국명 : 손배돈(孫培惇)
2. 생몰연도 : 1876-1933년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미남장로회
4. 한국선교기간 : 1910-1924년
5. 연표 (학력 및 경력 소개)
1900 우스터대학 – 학사
1907 워싱턴대학교 의학 – 석사
1909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어학공부
1910 군산 ; 어학, 의료사역 보조
1911 군산 ; 어학, 의료사역 책임, 지역 전도사역 보조
1912 군산 ; 어학, 의려사역, 전도사역, 병원물품관리
1913 군산 ; 어학, 의료사역, 전도사역
1914 군산 ; 의료사역
1915 군산 ; 의료사역, 지역전도사역
1916 군산 ; 의료사역, 지역전도사역, 안식년
1916-1917 안식년
1917 군산 ; 의료사역
1918 군산 ; 의료사역
1919 군산 ; 의료사역
1920 군산 ; 의료사역
1921 군산 ; 의료사역
1922 군산 ; 의료사역
1923 군산 ; 의료사역
1924 군산 ; 의료사역, 안식년
1924-1925 안식년
1926 선교사 사임
1929 귀국
1933 사망
6. 가족사항
부인 : Patterson, Rosetta P. Crabbe
자녀 : 총 4명
( 딸 : Boggs, Bargaret B. -Boggs, L. K.의 부인)


II. 선교사 소개 : 패터슨

1. 패터슨 선교사가 활동하였던 군산 선교의 배경 조지 톰슨 브라운 저, 천사무엘 외 2인 역, 『한국 선교 이야기』, (서울 : 동연, 2010), 69 인용

남장로회 선교사, 의사. 한국명 손배돈(孫培惇). 1909년 내한하여 한국어를 배운 후 이듬해 북 군산선교부에 배속되어 구암리에 자리 잡은 군산병원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활동한 군산병원은 수많은 사랑과 헌신 속에 세워진 곳이었는데,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군산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894년 레이놀즈와 드루가 인천에서 배를 타고 전라도지방의 관문인 군산에 도착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남장로 선교회는 군산 선교부 개설 책임자로 레이놀즈와 드루에게 맡겨졌다. 그들은 1895년 3월에 군산을 답사하였다. 1896년 군산은 약 100채 정도의 초가로 구성된 작은 어촌이었다. 부두도 없었고 우체국, 전신국도 없었다. 길은 좁고 구부러졌으며 지저분했다. 사람들은 무지하고 미신을 숭배하여 남자들은 술에 취하고 노름에 빠져있었으며 여자들은 다투며 영혼을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외국인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Ibid, 70 인용

군산 선교부처럼 복음사역과 의료사역을 손에 손을 잡고 놀라운 방법으로 농시에 한 곳은 없었다. 이는 복음 설교를 동반한 성공의 주요인이었다. 전킨은 복음 전도를 전담하고 드루는 자기 집 사랑채에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선교를 함으로 군산선교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병자들이 자유롭게 선교부를 방문하였다. 그들이 오면 전킨은 바로 거기 앉아서 곧 친구가 되었고 그들을 그의 사랑방에 초대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외국인을 이 먼 곳 까지 오게 한 믿음에 대해 더 많이 듣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1897년 연례회의 참석차 선교부를 방문한 실행위원회의 체스터S. H. Chester 박사는, 의사는 심장이 자기 몸보다 큰 사람이며 끊임없이 군중들을 위한 자비의 목회에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외과의사로서 그의 탁월한 수술 능력은 그가 일하고 있는 '하루 종일 햇살이 한 줄도 비치지 않는 음침한 작은 진료실과 수술실'과 대비 된다고 하였다. 아플 때도 있고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울 때도 있었지만 그는 처 두해 동안 4,000명의 환자를 돌봤다. Ibid, 74 인용

진료실에서 일하는 것 외에도 드루는 금강을 위아래로 다녔고, 또 선창을 여행하며 순회 진료를 하였다. 그는 아픈 자를 치유하고 전조용 유인물을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혹독한 일정으로 그의 건강은 결국 악화되었다. 1901년 그는 건강 때문에 선교부의 소환 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고 결국 다시 돌아올 만큼 회복되지 못하였다. 드루가 놀라운 사랑으로 감당했던 사역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을 것이다.
이를 위해 1902년 가을 켄터키 주의 알렉산더 A. J. A. Alexander 박사가 드루 박사의 귀국으로 중단된 일을 계속하기 위해 군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미국에서 오는 동안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군사에서 알게 된 오긍선을 미국으로 데려가 의과대학을 다니도록 후원해주었다. 드루와 알렉산더의 뒤를 이어 1904년 다니엘 의사가 내한하여 군산 의료선교를 이어갔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케슬러가 그를 도왔다. 1906년에는 알렉산더 의사의 기부금으로 프랜시스 부릿지스 앳킨슨(Francis Bridges Atkinson) 기념병원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호남지방에 세운 최초의 병원이었다. 다니엘 의사가 전주로 이거한 후 1910년 패터슨의사가 배치되었다. 편집자, “패터슨5 Patterson, Jacob Bruce”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편, 『기독교대백과사전』 제15권(크리스찬-하히롯), (서울: 기독교문사, 1985), 453-454


2. 의료사역을 통한 활발한 군산 선교! 패터슨이 구암병원 2대 원장으로 뒤를 이어가다. 조지 톰슨 브라운 저, 천사무엘 외 2인 역, 『한국 선교 이야기』, (서울 : 동연, 2010), 144-146 참고

1910~1919년은 의료 사업의 놀라운 확장 시대였다. 네 개의 새로운 병원이 세워져 다섯 개의 선교부에 분산 배치되었다. 1917년에는 이 병원들과 진료소에서 11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복음전도와 교육사역과는 달리 의료사역은 정부 관료들의 간섭 없이 전진하였다.
문제는 시설이나 장비가 아니라 각 분야에 충분한의사를 확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기간이 끝날 무렵까지 13명의 의사가 한국으로 파송되었지만 남은 것은 오직 네 명 뿐이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피로 때문에 쓰러졌다.
의료 사역을 감당해낸 선교사 중 한사람이 바로 패터슨J. B. Patterson 의사였다. 그는 1910년에 군산에 와서 그동안 공석으로 있던 병원장을 맡았다.

3. 한국인에게 적합한 ‘의료사역’ 추진, 호남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성장.
그는 병원 건물을 확충하고 특히 입원실을 많이 늘렸다. 패터슨 의사는 필요할 때마다 건물을 추가해서 온 언덕을 덮을 때 까지 여러 가지 이름으로 건물을 지어 본래 건물과 연결시켰다. 그래서 이 건물들은 각각의 독특성 때문에 패터슨 의사의 오이조각(‘Dr. Patterson’s cucumber patch‘)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는 가능하면 한국식 건축 양식을 따라 지어서 환자들을 침대보다 따뜻한 온돌에 눕혔는데 패터슨 의사는 한국 사람들이 그들에게 친숙한 온돌에 누울 때 더 빨리 회복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입원실을 온돌로 건축하여 한국인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군산의 병원은 선교부에서 가장 큰 병원이 되어서 ’한 사람의 의사가 지은 전국에서 큰 병원‘이라고 불렸다. 패터슨 의사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멀리 넓게 퍼져서 잘산다는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왔다. 호남에서는 개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서는 제일 크고 성황을 이루는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1916년 한 해 동안 그는15,551명을 진료하였고 554건의 수술을 감당했다.

4. 뛰어난 의사, 패터슨! 그의 아내와 동역하며 빛나는 시기를 한국에 헌신하다.
패터슨 박사와 그의 아내의 보고서 자료들을 살펴볼 수 있다. 패터슨은 <국가 병원용 엑스레이. 전류를 공급하기 위한 소형 조명 설비의 사용> 『The Korea Mission Field (1922)』, 158
에 관하여 글을 썼고, 로제타 부인은 <스프루의 위험과 예방> Ibid, 125
에 관하여 글을 썼다. 패터슨의 이 보고서는 그의 정확한 진료와 의료 기술이 칭찬을 받았다는 글의 신빙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로제타 부인 역시 패터슨과 함께 힘써 섬기며 사람들을 돌보았음을 보여준다.
패터슨은 1924-1925년에 안식년을 가지고 1926년에 사임하게 되었다. 1929년에 귀국하여, 1933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사회에서 가장 활발한 사역을 하게 될, 30대 중반부터 약 50세까지의 시간을 한국을 위해 헌신하였고, 귀국 4년 차에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뛰어난 은사와 사랑으로 한국에 복음을 전하며 삶을 쏟았던 패터슨 부부가 있었기에 오늘의 군산과 한국교회가 있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작성일:2017-06-30 13:24:19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