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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Harrison, William Butler(1866-1928, SP) / Davis, Linnie Fulkerson; Harrison, Margaret Jane E

닉네임
정민선
등록일
2017-06-30 16:17:26
조회수
2670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053_2015210055_정민선.hwp (24064 Byte)
1. Harrison, William Butler (해리슨 / 하위렴(河緯廉) 미국 / SP)

1.1. 생몰연도: 1866.09.13.-1928.09.22. 미국 켄터키 주 출생

1.2. 학력: 1883-1888 켄터키 센트럴 대학교 졸업
1892-1894 루이빌(Louisville) 신학교 신학
1894-1895 루이빌 메디컬 칼리지

1.3. 경력: 1894 미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서울에서 어학공부
1896 전북 전주에 파송되어 주간학교 시작(신흥중고교)
1898 군산에서 활동하던 Davis와 결혼, 부인이 전주로 이주하여 합류
1903 부인 소천 후 군산, 목포 선교사업
1928 과로로 귀국 후 소천

1.4. 가족사항: 1989년 Linnie Fulkerson Davis과 결혼(자녀 없음)
1908년 Margaret J. Edmunds과 재혼(자녀2명)

1.5. 논문:
Chulla Do Circuit, Korea Field, vol.1, No.5, 1903.5
New Hopes in a New Field, KMF, vol.2, No.1, 1905.12
Native works in Korea, KMF, vol.2, No.2, 1906.2
Kunsan’s Ministerial Candidates, KMF, vol.2, No.4, 1906.4
Chai, a Korean Elder, KMF, vol.2, No.5, 1906.5
The Union Movement in Korea, KMF, vol.2, No.9, 1906.9
Semi-annual Examinations near Kunsan, KMF, vol.3, No.1, 1907.1
Evangelistic Work in Chulla Circuit, KMF, vol.3, No.8, 1907.8
Notes from Kunsan, KMF, vol.3, No.9, 1907.9
Some Korean Home Missionaries, KMF, vol.4, No.1, 1908.1
The Union Korean Home Missionaries, KMF, vol.4, No.1, 1908.1
Gathering the Sheaves at Mokpo, KMF, vol.7, No.3, 1911.3
Last Year’s Evangelistic Work in Mokpo, KMF, vol.8, No.1, 1912.1
Lights and Shadows of an Ifenerator in Korea, KMF, 1915-1917
The Problem of Korean Bride, KMF, vol.22, No.1, 1926.


2. 선교사 소개: Harrison, William Butler & 그의 두 부인

국내 복음선교 및 의료선교사로 파송

해리슨은 켄터키 주의 작고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892년 루이빌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 신학교는 1798년 재퍼슨 신학교로 설립되어 이후 이름이 바뀌었는데 미국 장로교의 9개 교단 신학교 중 하나이다. 이곳에서 고 박형룡 박사가 1933년 철학박사를 취득한 바 있다. 같은 해 의학공부를 1년 정도를 한 기록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해리슨은 이미 조선의 복음사역과 함께 의료선교도 고려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후 조선에서 이곳으로 파송된 두 명의 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두 분 모두 의료선교사였다. 또한 그의 첫 번째 부인과의 결혼식에 그 유명한 알렌박사부부와 두 아들이 참석했으며 함께 사역했던 유진 벨 목사의 부인도 참석한 기록이 있다. 좀 더 살펴보면, 해리슨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1894년 제 3진으로 내한하였다. 먼저 서울에서 어학훈련을 받은 후 1896년 전북 전주로 파송되었다. 당시는 국제적으로는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국내적으로 치명적인 콜레라가 창궐하여 하루에만도 60여명이 죽는 등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여건 중에 해리슨 선교사가 국내에 도착했다. 조지 톰슨 브라운 저, 천사무엘·김균태·오승재 역,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이야기」(동연), 59.


전주교회의 선교역사 및 해리슨의 기여

여기서 잠시 전주의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해리슨이 내한하기 한 해 전인 1893년에 테이트(L. B. Tate)와 전킨(W.M. Janckin)가 이미 전주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학란으로 인해 철수했다가 1895년 테이트와 레이놀즈(W. D. Reynolds) 가 다시 전주에서 선교를 재개하였다. 바로 이때 레이놀즈 사랑방에 해리슨이 가세함으로 ‘해리슨의 어학선생 8명’ ‘해리슨의 어학선생 8명’이란 표현이 해리슨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던 8명의 선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쳤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어학연수를 서울에서 받은 기록으로 보아 서울에 거주하던 교사들이 과연 전주까지 해리슨을 따라와서 성경을 배웠다는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질 않으므로 확인이 필요함.
을 대상으로 주간학교를 시작하였다. 1904년 중화산동에 있는 해리슨의 사랑채로 옮겨 와 본격적으로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신흥(新興) 중고등학교의 효시이다. 해리슨은 니스벳(R.J.S. Nisbet)이 전주에 오자 교육전담선교사로 이 학교를 맡기고, 전도에 매진하였다. 1900년 가을 전주교회는 무려 113명이 모였으며 54명의 세례지원자들을 4일 동안 교육시켜서 이 중 6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5일 만에 서곤 하는 전주 장터에서 장꾼들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였던 장터 전도는 해리슨의 업적 중 하나이다. 이때 언더우드는 <그리스도 신문>을 통해 당시의 전주교회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전주교회가 아직 크게 흥성치는 못하였으나 차차 날로 흥왕할 모양은 이 아래 몇 가지로 알 것이다. 제일 깨달을 것은 예수의 도를 사나히만 할 것이 아니고 남녀가 다 믿어야 할 줄 알고 주일에 예배당에 다니는 사람마다 집안 식구가 다 함께 다니기가 어려움으로 차례로 다니는 것과 아이들도 대리고 다님이요 그 중에 한 형제의 말이 비록 큰 새악시를 대리고 다니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대리고 다닌다 하며 또한 이곳에 남녀학당도 실시하였으며 교중 연보도 차차 성심으로 드리며 전도도 바지런히 하는 이도 있고 장마다 위인 강화중에 책도 팔며 전도하는 이도 있어 여러 촌에 사는 사람이 예수의 말씀을 들어 믿음으로 전주교회 몇 고을에 주일이면 예배하는 곳이 있더라”(1902년 2월 6일).

부인 두 분의 의료사역

이러한 전주교회의 부흥은 해리슨뿐만 아니라 그의 두 명의 부인의 기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 장로교 한국선교역사에 의하면 해리슨이 처음 Davis와의 교제를 전주선교부의 매우 기쁜 소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모두가 오리사냥을 나간 날 자신은 ‘더 아름다운 오리를 사냥하기 위해 남자답게 용기를 내어 청혼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여 1897년 11월 Davis로부터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이 Davis 여선교사는 기실 1진으로 초기 선교사중 최초로 한국에 도착했었다. 그녀는 해리슨이 한국에 파송되기 전에 이미 군산에서 선교를 하고 있다가 1898년 해리슨과 결혼 후 전주에 와서 아이들, 부녀자들, 병든 자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 불행하게도 1903년 발진티푸스에 걸려 10일을 꼬박 심하게 앓다가 1902년 6.20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한국으로 ‘고향’이라 불렀을 정도로 조선 땅과 이 땅의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아픔을 가득 안고 사역을 했던 것으로 미남장로교 한국선교역사는 기록한다.

한 해 뒤인 1902년에 해리슨의 두 번째 부인이 될 Margaret J. Edmunds 의료선교사가 조선의 간호사 양성 학교를 조직하는 미션을 안고 조선으로 파송된다. 두 번째 부인으로 예상되는 Mrs. W. B. Harrison이 기록한 ‘Training Nurses in Korea’에 「The Korea Mission Field」, 1916(한국기독교역사공회 편), 25-27.
의하면, 과거 수년 동안 의료선교의 협력자로 조선의 훈련되지 못한 미숙한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음을 지적하며 5년이나 6년 커리큘럼의 상당히 전문화된 여성 간호사들을 양성할 필요를 제시하였다. 실제로 21세에서 31세 사이의 여성들을 부모의 동의 아래 지원받아 성경, 영어, 병원윤리, 간호학, 이빈후과 등 다양한 간호 관련 학과들을 이수시켰으며 1908년 Mrs Martha Kim과 Miss Grace Yee의 두 명의 최초로 배출한 바 있다. 부인은 향후 조선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간호사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는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정확히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첫 번째 부인의 직접적인 의료사역에 두 번째 부인이 이어 아예 간호사관학교를 양성하는 등 해리슨의 복음선교사역에 두 부인은 협력사역으로 큰 역할을 감당하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람에 집중한 사역

해리슨은 의료선교와 건축사역도(1901년 전주의 첫 집-예배실로 추정-을 완성하고 1902년 의무실을 건축) 했지만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사람을 세우는 일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잣집의 양반규수였던 유씨 부인의 영적성장을 기록한 글이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한이 있었던 이 부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후 감사하게도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유교문화가 철저했던 당시 제사음식을 더 이상 준비하지 않겠다던 이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큰 핍박이 있었다. 그럼에도 담대히 맞서 승리하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는데 결국 남편의 동의를 얻어내는 놀라운 변화를 해리슨은 놓치지 않고 글로 남겨놓았다. 유씨 부인뿐만 아니라 한 명의 장로를 세우기까지도 매우 큰 고심을 하며 사람됨을 살펴봤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을 비롯하여 전주교회는 특별히 1906년 폭풍성장을 하는데 1905년 19명이었던 세례자가 한 해 만에 무려 108명으로 증가하고 교리문답수강자도 102명에서 236명까지 늘어날 정도로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세우는 일에 전력했다. 그의 주요 사역지는 군산지역인데 매해 서울에 올라와 연합운동을 개최하기도 했다. The Korea Mission Field의 기록을 보면, 1906년 해리슨이 작성한 ‘The Union Movement in Korea’란 글이 실렸다. 이 글에 의하면 복음사역을 위한 두 번째 General council을 개최했는데 소년학교, 평양의 의료사역, 주일학교, 찬양곡들을 실은 책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사역들을 논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매우 열정적인 분위기에서 보수적인 의견들이 심도 있게 오고갔으며 무엇보다도 연합을 위한 이런 사역에 해리슨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리슨은 군산과 목포에서 계속적으로 선교를 하다 1928년 과로로 귀국하여 그해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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