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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Talmage, John Van Neste(1884-1964, SP) / Talmage, Eliza D. Emerson

닉네임
임희택입니다
등록일
2017-06-30 16:20:38
조회수
2504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M0179_2015210190_임희택.pdf (1003439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Talmage, John Van Neste / 한국명: 탤미지(타마자)
2. 생몰연도: 1884.12.30.-1964.
3. 출신 및 소속: 미국,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10-19587.
5. 연표1884.12.30. 미국 뉴저지 주 뉴왁에서 출생
1903-1907. 사우스웨스턴 장로교신학대학교(SWPU)에서 석사 학위 취득.
1907-1909.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박사학위 취득.
1910. Eliza Day Emerson과 결혼.
1910.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광주선교부 소속, 어학, 선교부업무 보조.
1911. 어학, 책방책임, 북부구역 순회 전도
1912. 어학, 나주, 순창, 담양, 전도담당, 책방책임, 남학교 책임.
1913. 광주숭일고등학교 교장(-1918.), 담양성경학교 설립, 기술업무 순창, 담양 전도 담당, 책방 책임, 권서관리, 선교부 부동산관리.
1914. 순창, 담양, 광주 전도 담당, 북서구역, 남학교 책임, 책방 책임.
1915. 남학교 책임, 태명회사 복음사역, 일본어 연구, 나병원 원목.
1916. 담양 전도사역, 남학교 책임, 책방책임, 일본어 언어연구, 나병원 원목.
1917. 안식년으로 귀국
1919. 광주 북부구역, 화순, 보성, 전도사역, 북서구역, 나병원전도, 일본어 언어연구.
1920. 광주기독병원 원목(-1921), 광주 북동구역, 남부구역 전도, 책방책임.
1921. 광주 동부구역, 남동구역 전도사역, 책방책임.
1922. 광주 동부구역, 남동구역 Unger와 공동전도, 책방책임.
1923. 안식년으로 귀국.
1924. 광주 북동구역, 남동구역 전도사역, 책방책임, 문서사역.
1925. 안식년으로 귀국.
1926. 광주 북부구역 전도사역, 유지재단장, 문서사역, 애양원 종교교육.
1927. 광주 북동구역, Hopper구역 전도사역, 유지재단장, 문서사역.
1928-1929. 광주 북부구역, 북동구역 전도사역, 유지재단장, 문서사역.
1929-1930. 안식년으로 귀국
1931-1932. 광주 북부구역, 북동구역 전도사역, 노회보조, 문서사역.
1933. 광주 북동구역, 북부구역, 남동(Knox)구역 전도사역, 유지재단 업무.
1934-1936. 광주 북동구역 전도사역, 노회조력, 유지재단업무.
1937. 광주 북동구역 전도사역, 유지재단 업무, 제주노회, 성경학교 교육보조.
1938. 광주 북동구역 전도사역, 유지재단장.
1939-1940. 안식년으로 귀국
1941. 일제에 의해 스파이 죄로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 치룸.
1942. 4. 석방되어 추방.
1948. 재내한, 광주 북동구역 전도사역, 성경교수, 제주노회조력.
1950. 6.25 전쟁 당시 일본 코베에 체류, 휴전 후 광주에서 활동
1955. 정년은퇴
1957. 6. 귀국.
1964. 80세로 사망
6. 가족사항
Talmage, Eliza Day Emerson(부인)
- 한국명 : 타에리사
- 생몰연도: 1886.
- 출신 및 소속: 미국 루이지애나 주, 미국 남장로교
- 학력: 소피 뉴콤브대학 학사.
- 한국선교기간: 1910-19587.
- 연표
1910. John Van Neste Talmage와 결혼. 광주 선교부 소속으로 내한, 어학 및 선교부 업무 보조.
1911-1912. 어학, 여성과 어린이 전도, 여학교 보조.
1913-1915. 선교부 전도사역, 여학교 교사 및 업무 보조.
1916-1917. 안식년으로 귀국.
1918-1920. 선교부 전도사역.
1921-1922. 담양 전도 담당, 선교부 전도사역.
1923-1924. 안식년으로 귀국.
1925. 광주 남동구역 여성전도사역.
1926. 광주 북동구역 여성전도사역.
1927. 평양 거주.
1928-1929. 광주 북부구역, 북동구역 전도 사역.
1930-1931. 안식년으로 귀국.
1932-1936. 광주 북동구역, 북부구역 여성 전도 사역 및 병원 전도 사역.
1937. 이일성경학교(전주한일신학대학) 교장.
1939-1940. 안식년으로 귀국.
1957. 6. 귀국.
Talmage, John Edward(아들)
Talmage, Janet Crane / Mariella(딸)


II. 선교사 소개: 탤미지(타마자) / Talmage, John Van Neste (1884-1964)

1. 지역 교회의 복음 전파에 앞장섰던 선교사

그는 해외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낯선 땅 한국에 내한하여, 광주를 기점으로, 복음 전파의 손길이 미약했던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선교 사역에 열정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마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로서 광주선교부에 배치를 받은 그는 담양, 화순, 옥과, 목포 등 전남 일대의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 사업에 매진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선교의 발걸음을 내딛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선교의 손길이 필요한 업무라면 주저 없이 앞장섰던 선교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지방의 미자립 교회에 깊은 관심을 갖고서, 열약한 환경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살폈고, 필요하다면 당회장으로서의 역할을 감당(봉선리 교회 담임)하면서까지 교회의 안정과 기틀을 세워 나감에 있어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한국 선교의 확장을 위해 지역과 지방, 미자립 교회에 복음 전파 및 선교 업무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교육 선교에 온 힘을 다했던 선교사

또한 그는 선교에 있어서 교육적인 면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던 인물이었기도 하다. 교육 선교에 앞장서고자 하는 정신으로 문서 선교에 주력했고, 또한 1913년에는 담양성경학교를 설립하여 학교 교육을 통한 성경 공부와 복음 전파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1913년부터 1918년까지 광주숭일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역임하면서, 성경 공부 외에도 일반 학문에 대한 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는 한국 교육의 부흥을 위해 일조했고, 보다 더 향상 된 교육 수준을 이끌기 위해 다방면에서 앞장섰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어도 일제의 억압과 경제적 문제로 인한 현실적 어려움으로 혜택을 누리지 못한 이들에게 큰 도움과 힘이 되었고, 교육에 무지했던 이들에게 또한 교육에 대한 계몽적 시각을 갖게 해준 귀한 길잡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3.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영혼 사랑의 정신

그러나 그의 선교 사역에도 커다란 장애가 있었다. 1941년, 일제의 압박이 절정에 이르던 시대, 신사참배 강요 등에 강력히 항의한 남장로회 선교부가 철수하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선교부의 재단 책임자였던 그는 당시 사역에 주력했던 여수의 애양원에 잔류하여 끝까지 그 곳을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이 어떠한 선교의 시련과 압박에도 자신이 사역하는 현장의 귀한 영혼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변의 영혼 사랑의 정신을 보여준 선교사였던 것이다. 애당초 자신이 낯선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교육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끊임없는 교육 현장에 매진하고자 했던 그 마음과 열정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던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선교지의 현장을 떠나면 남게 될 병들고 외로운 영혼들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어진 선교 사명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병들고 아파하는 자를 돌보는 주님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진정한 사명자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 선교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포기하지 않는 선교 열정

그러나 그의 뜨거운 열정을 자꾸만 가로 막는 방해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끝까지 한국에 남아 있던 그가 일본으로 하여금 스파이라는 억울한 죄명으로 체포 되어 4개월 동안 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었을 사건은 그렇게 4개월 여 간의 감옥살이를 한 뒤, 석방된 4월에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결코 사랑하는 귀한 영혼들의 품을 떠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불가피하게 그 영혼들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선교의 손길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선교의 열정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1948년 다시 내한하여 1955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열정으로 선교의 현장에서 고군부투하며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가능만 하다면 계속해서 한국에 선교의 문을 두드렸고, 그 험난한 문을 통과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선교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찾아갔던 진정한 선교사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업적과 선교 사역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점은, 그는 그 어떠한 선교사보다도 선교에 대한 한결같은 열정을 보였다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과 상황에도 영혼 사랑과, 복음 전파라는 사명적 삶의 모습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특히나 일제라는 현실적 탄압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았던 그의 선교 열정과 영혼 사랑의 정신은 오늘날, 목회를 하고 교회를 세우는 많은 목회자들에 귀한 가르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1차원적인 말씀 전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선교지의 실제적 삶에 깊숙이 침투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 의료, 심방, 교회 건축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복음이 유입될 수 있도록 하는 지혜로운 선교 전략은 또한 귀한 본보기가 되어준다고 생각한다.
작성일:2017-06-30 16:20:38 49.175.45.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