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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onwick, Frances Evelyn(1903- , UCC)

닉네임
강다니엘, 송정용
등록일
2019-06-26 22:14:57
조회수
1242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3학년2반_030_강다니엘 송정용.hwp (3463168 Byte)
Ⅰ. 선교사 기본정보

1. 이름: Frances Evelyn Bonwick / 프랜시스 이블린 본윅 / 한국명: 반부련(班富蓮)
2. 생몰년도: 1903-?,
3. 경력:
1927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현대사 전공.
1928년 콜럼비아대학 사범대학 영어 교육학 전공.
1908년 아버지가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했을 때 동행.
한국에서 어린시절, 1919년 캐나다로 출국하여 교육.
1929년 캐나다 연합교회 선교사로 내한
1932년 함경북도, 회령의 보홍여학교 교장으로 봉직
1936-1940년 만주 용정의 명신여학교 교장으로 여성교육 종사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송환
1940~? 캐나다에서 여선교회 문서서기, 선교교육자료 편집인 활동
4. 가족사항: Bonwick, Gerald William(부)


Ⅱ. 연구자료 및 사진

<자료1> 토론토 “티모시 캐이턴 기념교회”에서 열린 “캐나다연합교회 훈련학교”의 “연례 모임 및 졸업식(1926-27)”
문학사 : 한국 서울의 프랜시스 본윅(4년차, 현대역사)


<자료2> A. Hamish Ion, The Cross in the Dark Valley: The Canadian Protestand Missionary Movement in the Japanes Empire, 1931-1945, (Wilfrid Laurier Univ. Press, 1999), 163-167.


<163-164페이지, 의료선교사 Black의 Bonwick에 대한 언급 부분 번역>
블랙(캐나다 의료선교사)은 학교에(재단법인에 의해 설립된 학교) 대한 정부의 통제가 과도함을 지적했다: “어떤 교사도 그의 자격, 성격, 과거사와 ‘사상’이 지방 교육청에 의해 승인되기 전까지는 관여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교사도 이와 같은 허가 없이는 해고될 수 없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룽칭춘에서 캐나다인들은 그들의 스승이었던 관세 가큐 학교의 Charles Bates처럼 행운이 따르지는 않았다. 블랙은 여학교의 교장인 Frances Bonwick은 학교 선생 중 한명의 불만족스런 일처리에 대한 상황에서 복잡한 상황을 직면했다고 말한다. 기질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이 교사는 교장이 되기를 원했고, 몇 달 이상 그는 자신이 원한 것을 관철하려고 애쓰며 학교를 혼란에 빠뜨렸다. 블랙은 이렇게 기록한다.

본윅 여사에 대해 그는 너무나도 무례하며 비협조적으로 대한다. 그는 일본인 부인을 가져서 헌병들에 대해 영향력을 높이고자 했다. 이런 근거로 그는 경찰 조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한국인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나머지 직원들 모두를 위협했다. 이 남자를 쫒아낼 방법이 없었다.

본윅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료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효령학교 교장을 룽칭춘에 있는 그녀의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하기로 했을 때, 그의 많은 나이로 인해 취업 허가를 얻기 어려움이 있었다. 사실 나이는 핑계에 불과했다. 비록 룽칭쑨의 교육 당국이 결국 그에게 취업 허가를 내줬지만, 그들은 단지 선교사와 함께 여러 해 동안 일한 기독교인이 학교에서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의사였던 블랙이 생각하기에 본윅은 많은 부담을 받고 있었고 거의 신경쇠약에 걸리기 직전이라고 생각했다.
본윅이 여학교 교장으로 있는 것과 브루스가 남학교의 교장으로 있는 위치에 대해서 블랙은 그들의 직업이 위태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선교사 교장들이 일본인으로 교체되는 경향 속에서 사임해갔다. 하지만 블랙은 “(교육당국의) 규제는 모든 교사들이 일본어로 시행된 시험에 합격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본윅이나 브루스를 대신할만한 다른 외국인은 없을것”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영어는 여학교의 교과과정에서 빠졌고 소년 학교에서도 크게 줄어들어 그들이 교장을 맡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제 모든 교육은 일어로 진행되어야 했고, 한국어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이 일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식민지 관리들과 상대하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었는데, 선교사들 중 몇 안되는 이들만이 일본어로 교육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가졌다. 대만에 있는 캐나다와 영국 장로교 동료들은 한국과 같은 문제를 마주치게 되었다.

<166-167페이지, “식민지 관료들을 상대하다” 부분 번역>
일반적으로, 반도에서 캐나다 선교부는 1942년도 6월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학교 사업은 방해 없이 지속되었고, 스콧 선교사는 1941년 12월 8일에 이르기까지 함흥 소년학교를 자리잡게 하는 과정 속에 어떤 장애물도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브루스와 본윅은, 존경을 받으며 룽칭춘의 학교를 1941년 초에 나왔고, 은진학교와 명신학교는 1942년 3월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운영되었다.
작성일:2019-06-26 22:14:57 121.133.210.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