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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3권 서평 / 2017210294/ 3-5반 / 백창록

닉네임
백창록
등록일
2019-11-30 04:16:11
조회수
148
첨부파일
 3권서평.2017210294.백창록.5반.pdf (105073 Byte)
한국기독교회사 3권을 읽고
(CH13, CH23을 중심으로)

2017210294/ 3-5반/ 한국교회사
화34/ 백창록

[CH13. 근대복음주의운동과 한국복음주의운동]
책은 근대복음주의 운동을 미국복음주의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한 뒤, 이어서 한국복음주의 운동을 소개한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1950년대까지만해도 소수였으나 1970년대에 이르러 미국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복음주의는 20세기에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발흥한 신앙운동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성경과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의 소중한 개신교 전통과 신앙을 계승하려는 신앙사조를 일컬어 사용하는 폭넓은 의미라고 책은 소개한다. 복음주의연맹은 성경의 영감, 삼위일체, 인간의 전적부패, 그리스도의 중보, 칭의론, 성령의 회심과 성화,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말씀의 역사,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을 분명하게 진술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논쟁들은 일어났다.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은 서로 추구하는 방향과 성격이 달랐는데,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당대에 변호하길 원했으나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변화에 기독교 신앙을 조장해야한다고 믿었다. 근본주의자들은 급변하는 현대 문화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려는 나머지 기독교를 점점 더 타세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갔고, 현대주의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사회개혁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근본주의는 급격하게 영향력을 상실하는데, 1차세계 대전 이후, 관용주의가 퍼진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프린스톤신학교의 분열같은 근본주의 안에서의 내부 분열도 이유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복음주의 운동의 지향점은 확실했다. 그들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들인 간과한 대사회적 책임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과거 청교도 공동체가 그러했듯이 대사회적인 봉사나 사회적인 책임 구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복음주의 운동은 1950년대 미국 개신교를 주도하는 영향력 있는 세력이 된다.
한국에서 발흥한 한국복음주의운동은 영미에서 일고 있던 복음주의운동, 특히 1940년대 이후 전개된 미국의 복음주의운동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불씨가 된 것은 초교파선교단체, 대중전도대회, 로잔언약이었다. 한국의 보수주의가 지나치게 분리주의, 반지성주의, 폐쇄주의로 흐르는 현상을 보면서, 복음주의자들은 바른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문화적인 책임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한국 복음주의도 1950년대 신앙의 중심세력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52년 조직된 복음동지회다. 1970-1980년대 한국교회 복음주의 발흥에는 초교파선교단체의 영향이 컸다. 특히 방황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어떤 가치관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깨워졌다는 점에서 기여가 크다. 또한 대중전도운동 복음주의 운동으로 이어지는데 기여한 1974년의 로잔대회와 로잔 언약도 무시할 수 없다.
로잔언약은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천명함과 동시에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명문화시켰다. 한국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근본주의자들이 가진 신학적 폐쇄주의와 분리주의를 극복하는 일과, 토착신학에 대한 복음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조직신학적으로, 역사신학적으로, 선교신학적으로 각자의 전문분야에서 한국복음주의운동의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CH23. 예장합동 : 개혁파 장로교전통과 복음주의 유산] 1020-1068
한국장로교 신학 전통을 논할 때 칼빈, 언더우드, 마포삼열, 평양장로회신학교, 박형룡, 박윤선, 명신홍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 그 신학의 흐름을 CH23에서는 잘 소개하고 있다.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 ‘본교의 목적과 신경’ 제 4항에 평양신학교가 지향하는 목표를 말하며 “본교는 학생의게 복음주의 진정한 전싱과 차에 대한 개인적 책임감을 고취하고 장려하야 내외국인의게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를 확립케하기로 목적함”이라고 분명히 천명한다. 그리고 이 목표는 후에도 한국 복음주의 유산으로 남는다.
평양신학교는 바른 교리를 보호하고 이단을 막을만한 인물을 양섬함을 목적으로 삼고 이를 위해 ‘장로교회의 역사적 표준 즉 신경, 요리문답, 정치권징조례와 예배모범’을 신앙의 기초 교리로 삼았다. 하지만 1959년 WCC에큐메니칼 문제로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이 분열된다.
박형룡은 한국의 보수주의 장로교가 자유주의 영향을 받아 변천하는 것을 깊이 우려했다. 타종교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당대의 흐름 속에서도 박형룡은 단호했다. 그에게 근본주의는 별다른 운동이 아니라 기독교의 전통 신앙을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계승보존하려는 정통주의 운동으로 보며 상당히 우호적으로 봤다. 자신의 신학 정체성을 근본주의에서 찾았고, 총신과 예장합동이 나아갈 방향이라고 봤다.
이런 박형룡을 이어 “칼빈주의 개혁파 장로교의 전통적 복음주의”를 적극적으로 펼쳐나간 인물이 박윤선이었다. 그는 근본주의라는 요어보다는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선호했다.
1979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도 다루지 않을 수가 없다. 59년 예장통합과 분리된 후 처음 있는 일이었고, 특히 총신의 신학이 좌경화되었다며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 총신의 신학적 전통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자룡기 때문이다. “성명서”도 아니었으며 “신앙고백”도 아니었고, “신학적 입장”이라는 객관적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일종의 선언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 내용을 보면, 근본주의가 교회의 대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간과했고, 분리주의로 나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나,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 두 가지를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천명했던 로잔대회의 복음주의 정신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어서 1995년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가를 두 번째로 신앙고백서를 통해 밝힌다. 외국의 많은 대학들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신앙고백으로 만들어 표방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믿는 신앙고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를 통해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 사상이 분명히 명시되었다.

세계의 복음주의운동의 흐름과 또한 현재 나의 신앙 현장인 한국과 비교하는 과정은 큰 유익이었다. 막연했던 합동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으며,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 정도로 계승하고 있는지는 이 책이 아니었다면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부분이 로잔대회 전부터 우리의 선배격인 평양신학교에서부터 충분히 강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작성일:2019-11-30 04:16:11 110.70.1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