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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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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Estey, Ethel M.(?-1929, M)

닉네임
김사라
등록일
2019-12-03 20:43:51
조회수
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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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_3-4_B018_김사라.hwp (88576 Byte)
내한선교사 / B018 / Estey, Ethel M.(?-1929, M) / 3-4 2017210209 김사라


에스티 선교사 / Estey, Ethel M.(?-1929, M)

I. 기본사항

1. 이름: Estey, Ethel M.(?-1929, M) / 에스티 / 한국명: 애시치
2. 생몰연도: ?-1929
3. 출신 및 소속:
4. 한국선교기간: 1900-1923
5. 연표1900 미감리회 선교사로 내한
1901 평양을 거쳐 1903 평북 영변에 도착하여 선교활동
모리스(C. D. Morris) 부부와 영변에서 성경학교, 주일학교, 여학교 등 설립하여
교육선교에 주력(‘십일세(조)반’ 전도)
1912부터 밀러(E.M.Miller)와 지방에서 지방여성계몽사업 추진
1923 건강문제로 사임하고 귀국
1929 소천
6. 가족사항
7. 참고문헌: 내한선교사 총람(1884~1984)



II. 선교사 소개: 에스티(Estey, Ethel M., ?-1929)

1. 영변의 개척중심, ‘한국부인회’ (1903-)
미감리회 여선교사이자 교육자로 1900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약칭 WFMS) 파송으로 내한한 에스티 선교사(한국명 애시치)는 1901년 평양을 거쳐 1903년 평북 영변에 도착하였다. 영변은 평북 남부에 위치하여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王儉城),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거친 고도로 강산이 수려하고, 문화와 산업이 번창했던 고을이었다. 한말의 새로운 문물의 수용도 활발하였고 기독교의 전래 또한 타군에 뒤지지 않았다. 영변은 관서지방에서는 드문 감리교지역으로 미감리교회의 선교부(宣敎部; Station)가 개설됨으로 인근지역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그 중심에 홀로 여성의 몸으로 한국에 온 에스티 선교사가 있었다.
미감리회가 한국에서 선교할 때 여성 선교를 담당한 단체는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 WFMS)였다. 한국에 온 첫 여선교사 스크랜튼 대부인을 필두로 하여 일제 시대에 한국 선교에 참여한 미감리회의 독신 여선교사들은 모두가 이 선교회 소속이었다. 이들 독신 선교사들 외에 남편을 따라 함께 한국에 온 기혼 여성들도 여성 선교에 적극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들 기혼 여선교사들은 남편이 소속된 미감리회 해외선교회(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및 미감리회 한국 (선교)연회(Korea❲Mission❳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소속되어 있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던 초기에는 분곡 교회 연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한국에서는 ‘한국선교회’(Korea Missioin)을 조직하여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다가 교회가 발전하자 ‘한국선교연회’(Korea Mission Conference)를 조직했고 좀더 후에는 ‘한국연회’(Korea Annual Conference)를 조직했다. 미감리회의 경우 선교회는 1885년에, 선교연회는 1905년에, 연회는 1908년에 각각 조직되었으며 남감리회의 경우 선교회는 1897년에 조직했고 선교연회를 거치지 않고 1918년에 바로 연회를 조직했다. 한국 감리교회가 총회(General Conference)를 조직한 것은 1930년의 일로, 남·북감리회의 한국 연회들이 통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金光 《韓國監理敎會百年》, pp. 449-452 참조.
즉 같은 미감리회 여선교사였지만 기혼자와 미혼자가 소속이 달랐으며 지휘와 감독 계통도 달랐다. 그렇지만 같은 선교현장에서 같은 일을 했다. 때문에 여성 선교에 있어 상호 협력·조정할 기구가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미감리회 한국부인회’였다.
이 단체의 정확한 명칭은 ‘주한 미감리회 부인회’(The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in Korea)다. ‘부인회’란 명칭은 1912년의 《조선예수교감리회연회일기》에 나타난다. “Constitution and By-laws”. KWC, 1905, p. 66; 《조선예수요감리회연회일기》, 1912, p. 3.
줄여서 ‘한국부인회’(Korea Woman’s Conference)로 불리었는데 선교사들이 주체가 된 단체였기에 이 책에선 ‘미감리회 부인회’(약칭 부인회)라 부르기로 한다. 이 부인회는 1899년에 처음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1905년 수정 통과된 부인회 규칙에 의하면 이 단체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이 회는 한국에 있는 부인과 아동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해외선교회 회원과 일반 선교회 부인 및 가입이 허용된 한국 부인들이 연합하여 사업 방법을 토의하고 선교사들의 사업 보고를 청취하며 사업을 계획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는다.”

부인회 회원은 두 종류로 나누었는데 정회원과 협동회원이 그것이다. 정회원은 ‘규측과 헌장에 서명한’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의 모든 대표들과 해외여선교회 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부인들과 일반 선교회(남성들이 소속된 미감리회 해외선교회를 의미) 소속 부인들로 규정하였다. 이 부인회가 소속이 다른 두 종류의 여선교사들의 협의체로 출발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 기구를 통해 소속은 달랐지만 서로 협력하며 조화 있는 선교 사업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이 부인회 역대 임원 명단에 1911년 재13회 회장으로 E.M.Estey 선교사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이덕주, 『한국감리교 여선교회의 역사』, 기독교감리회여선교회전국연합회, 176

영변을 인근지역 선교의 케이스캠프 역할을 감당하게 한 이 부인회는 에스티 선교사의 교육선교, 특히 ‘십일조회‘운동을 통하여 그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게 된다.

2. 모리스 부부와 함께한 교육사업 (1905-)
에스티는 1905년 부임한 모리스(C.D.Morris) 부부와 함께 영변지방에 복음을 전하는 한편 성경학교, 주일학교, 여학교 등을 설립하여 교육선교에 주력하였다.
해외선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미감리회를 통한 영변의 기독교 선교는 1905년 미감리회 모리스(C.D.Morris; 慕理) 선교사의 도래로 기독교의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북지방 장로사로 선교책임자가 된 모리스 선교사는 곧 영변에 미감리회 선교부를 설치하고 인근 영변군 내는 물론 평북의 희천(熙川), 태천(泰川), 운산(雲山)지방 및 평남의 순천(順川), 개천(价川), 성천(成川), 양덕(陽德), 맹산(孟山)지방의 선교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1907년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영변면에 가옥 한 채를 예배당으로 구입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 주도적 역할을 한 교인들로는 선신제(宣信濟), 김창희(金昌禧), 오영룡(吳泳龍), 선원제(宣元濟), 김홍제(金弘濟), 유병식(柳秉植), 정학수(鄭鶴洙), 김신온(金信溫), 이메리, 김사은(金謝恩), 이승연(李承淵) 등이 있다.
그 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구성된 후에는 서부연회의 영변지방회로 주직, 인근 여러 지역의 교회를 관할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육사업도 활발하여 영변교회 설립이후 교회부설로 숭덕(崇德) 남녀 소학교를 설립하였고 1909년에는 정규과정의 숭덕중학교도 설립, 운영하였다. 그리고 진료소 「제중원(濟衆院)」을 설치하여 의료선교도 활발히 전개했다. 영변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로는 모리스 부부를 비롯하여 에스티(E.M.Estey), 딜링햄(G.Dillingham;숭덕중학교 교장), 밀러(I.M.Miller), 왁스(V.H.Waches), 밀러(E.Miller), 쇼우(W.E.Shaw) 부부, 사우어(C.A.Sauer) 부부, 버딕(G.M.Burdick), 매키(A.E.MeQuie), 새먼(B.Salmon) 등이다. 그리고 한국인 교역자로 영변지방 감리사를 지냈거나 영변군내에서 목회한 인사들로는 장낙도(張樂道), 이진형(李鎭亨), 김찬흥(金燦興), 김창식(金昌植), 김재찬(金在璨), 정진수(鄭鎭洙), 이태열(李泰㤠), 이겸로(李謙魯) 등이 있다.
당시는 에스티 선교사가 1903년 영변에 와서 선교의 터를 닦고 있었던 때였고, 모리스가 숭덕 남녀소학교와 숭덕중학교를 설립하던 1909년 에스티는 ’십일조회‘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어 교육보다는 전도를 중심으로 한 선교를 펼쳐나간다.

3. 시간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전국으로 퍼져나간 십일조회운동
교육이나 친교 및 자선사업을 주요 목적으로 삼은 보통의 여성 선교단체들과는 달리, 미감리회에는 ‘전도’를 목적으로 삼은 여성 선교 단체인 ‘십일조회(十一條會)’가 있었다. 영어로는 ‘Tither’s Class’ 혹은 ‘Tithing Class’로 표기된 이 단체는 에스티를 통하여 1909년 평북 영변에서 한국적 상황에 맞게 만들어진 특별한 여성 선교회였다. ‘Tithing Class’에 대한 정확한 한글 명칭을 밝혀주는 자료는 없다. ‘Tithe’란 ‘십일조’ 혹은 ‘연보’로 번역될 수 있다. 1912년 당시 평양지방에 “十一됴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이 〈그리스도회보〉에 수록되어 있다. 필자는 이 기록에 근거하여 ‘십일조회’로 표기하였다. “내보”, 〈그리스도회보〉, 1912.10.30.
에스티(E.M.Estey)는 혼자 힘으로는 넓은 지역을 모두 순회하며 여성 집회와 사경회를 인도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한국인 가운데 자질이 있는 이들을 교육시켜 전도인으로 파송하기로 했다. 1910년 에스티의 보고다.

“자질이 있다고 여겨지는 여인들에게 특별 훈련을 시킨 후 그들에게 각자 시간의 10분의 1을 주님께 바칠 수 있느냐고, 즉 2주간은 준비하는데 3주간은 지방 사업에 헌신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파송하는 곳이 어디든 가야할 것이며 우리가 준비해서 가르친 것만을 가르쳐야 하며 훈련받는 기간 중에도 훈련받는 지역에서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사업에 선발된 이들에겐 각자 순방할 지역을 인쇄해 나누어 주는데 준비 과정에 있더라도 더 이상 준비시키는 것이 현명치 못하다고 판단될 경우엔 지체없이 지방으로 파송합니다.”

훈련받고 선발된 여성들은 자기 시간의 10분의 1(1년 52주 중 5주간)을 전도 사역에 바친다는 뜻에서 ‘십일조부인’(Tithers)라 불렸고 ‘십일조회’에서 이들의 교육 및 파송을 전담하였다. 선교부는 이들에게 고정 월급을 주지 않는 대신 ‘십일조부인’들이 교육을 받는 동안에 드는 경비와 지방 여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만을 부담했다. 이러한 면에서 부인회 소속 ‘전도부인’(Bible Woman)과 차이가 있었다. ‘십일조회’는 한국 여성 교인들의 자발적인 ‘시간 헌납’을 기초로 한 제도라는 점에서 백만명구령운동 때 유행했던 ‘날 연보’ 제도와 유사했다. 그러나 ‘날 연보’는 헌납인의 자의로 ‘날’ 수를 정하고 그에 대한 감독이나 지휘 체제가 없었던 반면, ‘십일조회’는 선교사들의 주관 하에 훈련 → 파송 → 보고에 이르는 조직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1909년 9월, 영변지방 부인사경회가 끝나는 날 에스티가 이같은 계획을 발표하자 10명이 자원하였다. 에스티는 영변교회 전도사 방기순 및 모리스(C.D.Morris) 부인과 함께 이들을 교육시키기로 했다. 이들 중 중병으로 도중하차한 1명을 제외한 9명이 10월 23일에 모여 2주간 교육을 받았으며, 교육 과목은 모리스 부인이 준비한 <죄 요지>(Outline of Sin)와 <기도법>(Talks on Prayer), 성경의 마태 5~8장과 빌립보서, 그리고 감리교 교리문답 등이었다. 교육을 마친 이들은 두 반으로 나누어 한 반은 미개척지로, 한 반은 교회가 있는 지역으로 둘씩 짝을 지어 파송되었다. 파송된 이들은 담당 구역 안에서 흩어져 전도하면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사경반을 만들어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변에서 시작된 ‘십일조회’는 다른 지역 선교사들에게도 자극이 되었다. 1910년 1월에는 평양에서도 십일조회가 조직되어 52명이 교육을 받고 자원전도에 참여했는데 마침 백만명구령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와 맞물려 여성들의 호응이 날로 증가했다. 그 결과 에스티는 9개월 동안의 ‘십일조회’ 전도성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할 수 있었다. 십일조회 96개, 수업 일수 450일, 수료자 1,719명, 가정방문 2,840회, 방문 대상자 5,647명, 신입교인 830명, <마가복음> 반포 2,000부, 순회기간 9개월.
1910년 에스티 주관 하에 십일조부인을 위한 성경반이 5회에 걸쳐 개설되었으니 영변에서 2회, 평양에서 2회, 서울에서 1회 열렸다. 그 결과 199개 십일조회가 지방에서 개최되었다. 또한 에스티가 1910년 12월 해주 부인사경회를 인도하고 역시 십일조회를 소개하여 해주에서도 십일조부인들이 지방에 나가 61개 사경반을 인도했으며 인천에서도 힐만(M.R.Hillman)과 밀러(L.A.Miller) 주도 하에 십일조회를 운영했다. 인천에서는 교육 내용을 십일조부인들에게만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피교육자들에게도 나누어 주도록 준비한 점이 에스티의 십일조회와는 다른 점이다. 같은 해 가을 진남포에서도 로빈스(H.P.Robbins)와
에스티가 인도하는 사경회가 열렸고 사경회 후 십일조회를 구성한 결과 80명이 참여하였으며 이들도 교육을 받고 지방에 파송되어 활약하였다. 계속해서 1911년에는 수원, 원주 지방에서도 십일조회가 조직됨으로 미감리회의 전 선교구역에서 십일조회가 조직, 운영되었다.
십일조회는 인력이 부족안 초기 선교 상황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모임과 운영은 에스티, 모리스 부인 등 선교사들이 주도하였으나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한국인의 적극적이고도 주체적인 선교 활동이 십일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다. 십일조회가 처음 조직되던 때 에스티가 보고한 내용 속에서 그 같은 열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십일조회’란 명칭이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부인들이 자기 시간의 10분의 1만이 아니라 5문의 1까지도 기꺼이 바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영변에 있는 어느 부인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이 같은 기쁨과 평안을 주셨는데 이정도 밖에 드리지 못한다면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 저는 매 3개월마다 한 달만 집안일을 하고 나머지 날들은 주님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 부인은 실제로 지난해 약속한 날 이상을 일했습니다. 여행하는 데 드는 경비를 제외하곤 봉급은 한 푼도 받지 않은 채 말입니다.“ E. M. Estey, “Tihting Class” KWC, 1910, p. 76.


이처럼 십일조회는 영변에서 시작되어 평양, 해주, 인천, 서울, 수원, 공주, 원주 등지로 확대되어 실시되었으며, 한국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좋은 성과를 얻었다. 이 십일조회는 적어도 1920년대 초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 평양지방의 무어(J.Z.Moore) 감리사 보고 중에 ”하기 사경회가 시작되면서 9월 첫째 주일을 십일조주일로 지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81개 교회에서 많은 십일조회들이 조직되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렇다. 또한 무어의 보고를 통해서 이 무렵 십일조회가 더 이상 여성들만의 조직이 아닌 남성들도 참여하는 성격으로 변화되었음도 알 수 있다. 인천지방의 경우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십일조회는 지방의 선교적 상황에 따라 유동적 형태로 운용되었다. 이는 십일조회가 자발적인 참여와 조직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조직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1911년 10월 조직된 평양 십일조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감리교 기관지였던 <그리스도회보>에 실린 기사이다.

”평남 평양군 울미면 대천동 김풍한씨의 통신을 거한즉 동군 백목사의 관할하는 구역내 각 교회 형제 자매들은 작년 10월 간에 십일조회를 조직하고 매월 첫 토요일에 통상회를 열고 성경말슴으로 토론한 후 각각 소득에서 10분지 1을 교회에 밧친 것이 5백여 환에 달한지라. 이것으로써 경비를 삼고 전도인을 선택하야 각처로 파송할새 장석간씨는 현남교회로 고용필씨는 루동교회로 김풍한씨는 대천동교회로 파송하야 전도케 되엿스니 하나님께 영화를 돌니고 찬송하며 이 십징로회의 본규측은 각 회원이 돈을 내여 전도인을 세울 뿐 아니라 각각 사욕을 이기고 날마다 성경1,2장식 보고 타인을 사랑하야 기도하는 것이니 이는 전국 신자들의 모범될만한 일이니 교회마다 이와갓흔 회를 세워 하나님 나라를 속히 흥왕케 하기를 바란다 하엿더라.“ <그리스도회보>, 1912. 10. 30.


십일조회 구성원이 남성과 여성의 연합 형태였다는 점과 헌신의 내용이 ’시간‘이 아닌 ’돈‘으로 바뀐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형태의 심일조회가 어떤 규모로 얼마나 조직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한국인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전도 매체로 1910년대 한국 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엡윗청년회, 보호여회 등 종래의 미감리회 여성 단체들이 친교와 교육 및 자선에 주력한 단체들이었던 것에 비해 십일조회는 전도를 목적으로 삼았던 단체였다는 점에서 균형있는 여성 선교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처럼 기능과 성격에 따라 별개로 운영되던 미감리회의 여성 단체들이 통폐합되어 1923년에 ”조선미감리회 내외국여선교회“로 발전하였다.

4. 이후 이어진 지방 여성계몽운동
1909년부터 약 3년간에 걸쳐 전국으로 퍼져나간 에스티의 십일조반운동은 전국의 여성들의 가슴에 복음의 불을 지폈고, 자신들의 시간과 재정을 복음에 헌신하는 자원자들을 통하여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한국선교 초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한국의 인프라를 닦는 작업을 할 때, 에스티는 복음전도운동에 박차를 가하며 내한선교사들의 사회적책임과 복음전도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감당했다. 초반에는 그도 함께 교육사업에 동참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그 과정에서 한국 여성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들을 깨우는 일을 감당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티의 예상은 적중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한국의 여성들에게는 저력이 있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여 에스티의 십일조반 선교운동에 동참했다. 그 결과 이후 1936년 당시 영변군내 감리교회 현황만 보아도 서부동(영변면 서부동), 동부동(영변면 동부동), 신천동(영산면 신천동), 용산시(팔원면 용산동), 용강(소림면 용강동), 수우동(독산면 수우동), 무창(봉산면 고성동), 묵시동(오리면 묵시동), 구장(용산면 구장동), 행정(북신현면 노하동)교회 등 10개 교회와 도관동(남신현면 도관동) 기도처 등 5개의 기도처가 있었고 총 신자수는 3천여명에 이르렀다.
이에 힘입어 에스티는 1912년 영변에 온 밀러(E.M.Miller)와 함께 지방여성계몽사업도 적극 추진하였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를 찾지 못하였지만, 1923년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할 만큼 아마도 그녀는 여성계몽운동에도 열정을 다했을 것이다.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한 그녀는 결국 1929년 별세하였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 소가 끄는 썰매를 타고 전도 여행을 떠나는 영변의 ’십일조부인들‘을 사진 찍고 있는 에스티 선교사



IV. 참고문헌

[단행본 및 논문]
Itinerating Experiences in Korea, Missionary Review, N.Y.,1907.2.
50Years of Light, 1938: 구미인조사록; 영변군
기독교대백과사전 11권
평안북도지, 1973; 감서년, 1933-38; 감연합년 1931-; 감리교요람 32,36; 감리교회사Ⅰ; KMYB; 구미인조사록; 독립운동사 제2권.
이덕주, 『한국감리교 여선교회의 역사』, 기독교감리회여선교회전국연합회
평안북도지, 1973; 감서년, 1933-38; 감연합년 1931-; 감리교요람 32,36; 감리교회사Ⅰ; KMYB; 구미인조사록; 독립운동사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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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활란” . 2019년 12월 2일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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