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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61 / Moore David Hastings (1838-1914) / 3학년 5반 2017210305 유신혜

닉네임
유신혜
등록일
2019-12-03 19:09:29
조회수
77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5반_B061_유신혜.hwp (5575168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Moore, David Hastings
2. 생몰연도: 1838.9.4-1915.11.123
3. 출신 및 소속: 미국 오하이오 주 출생,
4. 한국선교기간: 1900-1904년으로 추정
5. 연표1838.9.4.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 미 하원의원 엘리아킴 해스팅스 무어의 아들로 태어남1855-68. 오하이오 주에서 목회; 자네스빌 2가1860. 오하이오 주립대학 학사학위, 오하이오 연회에 가입, 줄리아 소피아 카펜터양과 결혼(6.21)1863. 동대학 석사학위1862 남북전쟁시 「오하이오 자원보병부대」 제 12연대 중령으로 복무, 이 부대는 치카마우가의 토마스 장군에 의하여 「오하이오의 호랑이들」이라고 불려짐. 부상을 입고 예편.1855-68. 오하이오 주에서 목회; 세인트 폴교회1868-70. 오하이오 주에서 목회; 멜라웨어의 세인트 폴교회1870-72. 콜럼버스에 있는 웨슬리안 교회1872-75. 신시내티에 있는 트리니티교회1875-80. 신시내티 웨슬리안여자신학교 교장1888. 동료 E.크랜스톤과 함께 콜로라도 신학교 교장1880-89. 멘버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총장을 지냄1889-90. (서부감리 교회 보)의 편집 장1900-04. 감독으로 피택되었고 이후 4년동안 한국과 일본, 중국 등을 관할(북청사변시기)1904-08 포틀랜드지역 목회1915. 월든(John Morgan Walden)감동의 전기 저술 (아래있는 내용은 알렌꺼)1915.11.23. 신시내티로 가는 여행길에 죽음.
6. 가족사항부인: Julie Sophia Carpenter 줄리아 소피아 카펜터 (1840-1911)자녀: Eliakim Hastings Moore / Kingsley Moore / Amy Moore Pitkin / Marion Moore. (총 6남매이나 4명만 확인 됨)
7. 저술활동
Introduction, Echoes from Peak and Plain, I.H. Beardsley, 1898.
Tribute to Elizabeth Walden, pamphlet, 1900.
Introduction, Life of Emily J., by Thomas Harwood, 1903.
Address: The Open Door in Eastern Asia, First General Missionary Convention, Cleveland, 1903.
John Morgan Walden, 35th bishop, 1915.
Bishop Moore also wrote a description of the Russo-Japanese War. He witnessed this event while in charge of missions in China, Japan and Korea.


II. 선교사 소개: Moore, Bishop. David Hastings

1. 개신교 최초의 한국인 목사에게 안수를 줌

무어는 1900-1904년 동안 한국, 중국, 일본의 감리교 감독이었다. 그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개신교 최초의 목사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이 바로 김창식, 김기범이다. 1901년 5월 14일 서울 상동교회당에서 회집된 한국선교회에서 김창식, 김기범은 무어 감독의 집례로 집사목사(세례와 혼례·예배·전도의 거행권 만이 부여됨)로 안수를 받고 한국 개신교 중 최초로 목사가 되는 영광을 차지했다. 윤춘병, 『한국감리교성장사』. (과천: 감리교출판사, 1997), p375


2. 초기 한국내 감리교회의 설립 등에 관여

상동교회는 한국 감리교 최초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 박사가 남대문로에 세운 교회이다. 이 교회의 봉헌식때 무어감독이 사회를 본다. 윤춘병, 『한국감리교성장사』. (과천: 감리교출판사, 1997), p100
후에 이 상동교회당에서 최초의 개신교 목사가 탄생했으며(위의 항목 참조), 일제강점기시대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07년 상동교회당 지하실에서 헤이그특사사건의 모의가 이루어졌으며, 같은 해 이 곳에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어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049, (2019년 12월 3일 접속)


남산현교회는 1893년 4월 미북감리회 의료선교사 홀(W.J. Hall)과 조사 김창식(金昌植)이 평양에 설립한 교회이다. 이교회의 증축에 무어감독이 도움을 준다. 남산교회는 한옥집 두 개로 시작했는데 후에 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1898년에는 학습인 473명, 세례 입교인이 52명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학습인 703명, 세례 입교인이 77명으로 늘었다. 그러자 1903년 교인들이 벽돌로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예배당을 짓기를 원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962, (2019년 12월 3일 접속)
무어 감독은 이 계획을 승인하면서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기공 예배를 주재하였다. 감독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교인 800여명이 다나와 도열하여 감독을 맞았다. 그리고 남여를 구분하게 마당에 질서있게 앉아 감독의 설교를 들었다. 무어 감독은 평양교인들의 역동적인 신앙에 무척 고무되어 이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미국에 돌아간 무어 감독은 사진과 함께 한국교회의 열정을 소개하면서 미국 선교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내었고, 노블 역시 가족과 친구에게 편지하여 적지 않은 선교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http://kmc1.kr/3-1%EC%9A%B4%EB%8F%99%EC%9D%B4%EB%B6%81%ED%8F%89%EC%96%91-%ED%95%B5%EC%8B%AC%EC%A7%80-%EB%82%A8%EC%82%B0%ED%98%84%EC%98%88%EB%B0%B0%EB%8B%B9/
작성일:2019-12-03 19:09:29 220.117.1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