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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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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Haysmer, C. A.(1898-?, S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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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재
등록일
2019-12-05 00:53:48
조회수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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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한선교사_3-4_B024_김현재.hwp (1395200 Byte)
내한선교사 / B024 / Haysmer, C. A(1898-?, SDA)/3-4반 2017210218 김현재


Ⅰ. 기본사항

1. 이름 : Haysmer, C. A. / 헤이스머
2. 생몰연도 : 1898 - ? 미국에서 출생
3. 출신 및 소속 : SDA(안식교)
4. 연표
1925 : 안식교 선교사로 내한, 평남 평원군 순안의 안식교 원장으로 부임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은 12세의 김명섭의 볼 양쪽에 염산으로 ‘됴덕’이라고
써서 상해를 입힘
1925.6월 : 일본인 검사 발각, 대서특필 – 선교사추방, 반기독교운동, 청년기관에서
안식교회에 격문발송, 안식교선교사 사과문
1926.8.2. :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 선고 이후 병원장직 박탈
1926. 12 : 본국으로 송환됨, 좌익단체와 일제는 이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여 비판

Ⅱ. 선교사 소개: 헤이스머(Haysmer, C. A. 1898 - ?)

1. 안식교 선교의 배경

감리교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톤을 한국 선교사로 내정하였고, 장로교는 언더우드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알렌을 한국 선교사로 전임시켰다. 그리하여 1884년 9월 20일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 호레이스 알렌이 가장 먼저 한국에 입국하였고, 이어 1885년 4월 5일 북장로교 선교회 언더우드와 미 감기교 선교회 아펜젤러가, 5월 1일에는 미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이, 그리고 6월 21일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이 입국하여 북장로교 선교회와 미 감리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한국선교를 개시했다.
이렇게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이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1905년 11월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W. R. Smith)목사가 내한 1906년 선교본부를 평남 순안에 두고 서울과 함께 전도, 교육, 의료, 문서를 통해 전국적으로 선교를 확장해 나갔다.
타 개신교단에 비해 안식교는 처음부터 토요 안식일 준수와 재림신앙으로 인해 기성교회, 정부, 일반 사람들 모두로부터 적극적인 호응을 받지 못했다.
안식교 선교사 스미스(W. R. Smith)목사는 평남안도 순안에 선교본부를 설립함으로써 헤이스머(Haysmer, C. A.) 선교사에게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 헤이스머 선교사(Haysmer, C. A.)도 1925년 안식교 선교사로서 내한으로 평남 평원군순안의 안식교 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2. ‘허시모(헤이스머) 사건’의 경위

‘허시모사건’은 의료선교사 허시모(許時模, C. A. Haysmer: 1925년 봄 평남 순안안식교 병원의원장으로옴)가 1925년 9월 선교사 사택정원에 열린 사과를 서리하던 어린아이들 가운데 김명섭(당시12살)을 잡아 서리한 과일값을 받으려다 일어난 사건이었다. 서리한 과일값을 배상할 돈이 없었던 아이엄마는 흉터가 지워진다는 말을 믿고 김명섭의 뺨에 초산은으로 ‘도적’ 이라고 새겨 넣는 것을 허락하였다.
허시모는 불려온 김명섭의 어머니에게, 경찰서에 고발하지는 않을 테니 5원을 내거나 두 뺨에 글씨를 쓰거나 택일하라고 한다. 어머니는 돈이 없다고 하자, 허시모는 5원을 2원으로 깎아주고 대신 2주일 동안 소년에게 노동을 시키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2원마저
낼 형편이 안 된다고 했고, 일체의 금전적 배상을 받지 못하게 된 허시모는 최후의 수단으로 소년의 두 뺨에 글씨를 쓰겠다고 한다. 소년의 어머니는 글씨가 2주쯤 뒤면 없어진다는 허시모의 말을 믿고 그렇게 하도록 한다. 글씨가 지워지지 않자 허시모를 찾아간 김명섭에게 허시모는 1주일 동안 노동을 시키려 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노동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허시모가 쓴 약품은 염산이 아닌 초산은이며, 소년의 얼굴에 영원히 글씨를 남기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2주 정도면 지워질 줄 알았다. 사건 당일 김명섭은 다른 한 소년과 같이 서리를 하다가 혼자서만 붙잡혔는데, 허시모는 다른 한 명이 누구인지 추궁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허시모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선 한국에 온 지 몇 달밖에 안된 그가 소년 및 그 어머니와 쉽게 대화를 나누었을 리 없다. 또 그가 과연 「도적」이라는 글씨를 어떻게 알았는지도 의문이다. 지금으로서는 간호부 임신일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사건 당일 소년의 어머니를 불러왔으며, 뒷날 사건이 불거지자 허시모와 함께 소년의 집을 찾아갔고, 신 문에서도 그녀를 ‘문제의 간호부’ “부녀를 달내여 야반에 화해성립,”
라고 표현한 점 등을 볼 때 그렇게 짐작된다. 이 사건은 한동안 불거지지 않고 해를 넘겼으며, 이후 김명섭은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외출도 하지 않으며 지내게 되었다. 김명섭은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받았다. 부끄러워 학교에 오래 나가지 않아 제적된 것인지, 학교에서 그의 행동을 탓하여 퇴학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김명섭에게 심한흉터가 남게 되면서 주변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일이 커지게 되엇다. 이런 ‘허시모사건’이 처음 보도 된 것은 ≪조선일보≫ 1925년 10월 31일자였다. ≪조선일보≫의 기사내용은 허시모가 북경에서 돌아왔는데 그가 김명섭에게 문제의 흉터를 남기게 한 것을확인 했다는 것이다.
김명섭이 얼굴에 난 상처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어린이의 작은잘못을 과도하게 처벌하여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는 비난이 일어나게 되었고, 소문이 퍼지면서 쟁점화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곧 바로 여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다. 사건이 일어난 지 9개월이 지난 1926년 6월말≪조선일보≫가 처음 보도하였고, 7월이 되면서, ≪조선일보≫·≪동아일보≫·≪시대일보≫·≪매일신보≫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 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교회는 ‘허시모사건’을 지방에서 일어난 안식교선교사 개인의 작은 잘못으로 치부하고 침묵하였다. 하지만 중앙 일간지에 한 동안 실리면서 세인의 관심을 촉발시켰으며, 소년운동단체들의 비난 성토대회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조선 전체의 소년 문제로 비화되었다. 여론은 선교사가 어린이에게 저지른 체벌을 비판하는 소년인권보호운동으로,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의 사랑 없음을 성토하는 반기독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더구나 미국인이 저지른 사건이기에 미국을 비판하는 반미적 성격도 포함되었다. 극히 작은 상해 사건이었지만 일제 검찰도 동조하여 기소하였다. 그러므로 작은 사건이 커다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이유가 무엇인지, 이렇게 사건을 키운 세력이 누구인지를 살피는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제의 간섭과 억압이 이 사건에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도 사건의 발전방향과 그 영향을 가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3. 허시모 사건의 확산

우선 기독교청년회나 각지방의 청년기관, 그리고 안식교 자체에서도 세계 안식교회에 격문을 발송하여 민족 모욕의 의분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충격을 받은 것은 교회, 그리고 선교사들 자신이었다. 안식교 선교사들은 곧 회의를 소집하고 “전 세계 인류 앞에 사죄 한다”고 밝히고 피해자의 요구는 무엇이든지 들어준다고 밝혔다.
헤이스모 자신도 사과문을 일간지에 게재하였고 피해자측에 돈을 주어 화해하려 하엿다. 그러나 사회의 빗발친 여론으로 평양감사국은 그를 불구속 기소하였고 1926년 8월 2일 평양지방법원은 그에게 징역 3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검사측의 상고로 다시 그해 11월 18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열려 상고를 기각함으로 표면상 이 사건은 일단락된 셈이었다. 이후 그는 병원장직을 박탈당하고 12월에 본국으로 송환되어 돌아갔다.
그런데 이 문제는 한국교회가 일제하에서 겪은 모든 문제의 심각한 요소들을 축소한 듯한 의미를 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우선 그 타이밍이 묘했다. 1925년과 1926년은 공산당이 민족 민중운동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고 판단하고 공개적인 기독교 공격, 선교사 비판에 나섰던 해이다. 그때 좌익계의 신문기자들이 많았던 신문에서도 1925년과 1926년에는 묘하게 선교사나 교회 비행이 자주 지명에 오르고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그때 이 사건이 터진 것은 보도의 객관성 문제보다, 이러한 좌익계 음모의 한 일환일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실제 경성 학생연맹이란 좌익단체에서는 1926년 7월 3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이 기회에 현재 종교의 흑막과 침략의 전위인 선교사류의 진면목을 폭로하여 종교교육의 반대운동을 전개”한다고 하고, ‘학생 데이’를 정하여 우익 민족단체와도 협력하여 구체적인 투쟁을 하겠다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한편, 일제도 참 묘한 반응을 보였다. 일제는 이런 기회에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말살하고, 한국민족과의 친근한 관계를 훼손시킬 계획이었다. 그래서 ‘상애회’라는 일종 낭인 규합의 국수주의 단체를 통하여 선교사들을 공격하고 한국민족을 이러한 백인의 쇠사슬에서 구원해 준다는 감언이설로 이간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 ‘허시모’사건으로 인해 오랜 한국의 혈맹인 서양 선교사와의 관계 손실을 알게 된 한국민족은 좌익계나 일제의 이러한 정략적 음모에 휘말릴수 없다고 판단하여, 기왕에 날카롭던 필치를 돌려 신문 사설에 <우인 허시모씨>란 제목으로 글을 싣기에 이르렀다.
민족의 이간 중상을 목적으로 하는 정략적 희국에 좇아 다닐 수 없고, 그래서 오랜 세월의 선교사들의 업적을 적대시하는 경솔한 행동을 삼가야 한다는 논지였다.
이 사건은 일제치하의 한국교회가 일본과 공산주의의 틈에서 그 민족적인 성향을 보존하면서 선교사들과의 민족운동을 위한 협력을 확인할 때 생기는 독특한 역사적 상황을 나타내 보여준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4. 허시모 사건의 재판과 결과

세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허시모에 대한 첫 공판이 7월 28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렸다. 판사는 아라마키, 검사는 시모무라, 변호사는 미쓰였으며, 평안남도 통역과의 곤도가 통역을 맡았다. 이 공판에서 검사는 ‘징역 3개월’을 구형했다. 이 날 허시모측의 변론 요지는 아래와 같았다.

초산은으로 그와 같이 된다는 것의 의학상으로 보아 의심이 적지 않은바 혹은 피해자가 집에 도라가서 소곰으로 몹시 씨슨 까닭과 또는 의사 최영재 씨가 무슨 약을 나종에 발럿는지도 몰으겟으니 그를 진단한 총독부 의원 片岡박사가 경홀히 검사한 것이나 아닌지 몰으겟슴으로 한번더검사를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과 피고로서는 한두번이 아니오 늘 도적을 맛는 까닭으로 그를 방지한 것이니 정당한 일이며 상처라는 것도 피부를 조금 상하야 얼마 후에는 낫겟다는 것이니 피해자의 생활에는 조곰도 관계되지 안는 것임에 상해죄로 처벌할 만한 일이 아니라

요지인 즉 변호사는 글씨가 얼굴에 남게 된 책임을 피해자와 최영재에게 돌리는 한편, 허시모의 행위는 절도를 막고자 한 차원이며 소년이 이 상처 때문에 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상해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어 8월 5일 열린 공판에서 판사가 ‘징역 3개월 집행유예 2년’을 언도하자 검사는 이에 불복했고, 9월 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같은 판결이 나오자 검사는 상고했다. “검사상고,”
그런데 공판 직후 허시모는 9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여행허가를 받아 갑자기 북경으로 떠났고 한동안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놓고 이런 저런 추측이 나돌기도 했지만, 예정대로 돌아온 그는 검사측에 답변서를 제출했다.
그 요지는 “아즉까지 자긔 의학상 경험한 것으로 보던지 △리로 보아도 그와갓흔 약으로 그갓흔 상처가 남아잇다는 젼례가 업스며 만약 그와갓치 상처가 남아 잇다 하면 그때 약을 바른
때에 좀더 큰 고통을 밧을 것은 정한 리치이니 김명섭 자신이 혹시 약 칠한 곳을 손으로 비비여서 염증을 일으키여 그와갓치 험집을 내이게한 것이요 결코 자긔의 책임이 안이란 것과 또 이번 공판에 출두할 필요가 업다는 것”이었다. 결국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않았다. “김명섭의 상흔은 마찰한 염증에 기인,”

그러자 이에 대해 최영재는, “무릇 무슨 병에든지 반다시 그 원인이 제일인대 나종은 엇지아얏든지 김명섭의 뺨에 초산은을 칠하야준 이상 거긔에 쫏차서 이러나는 일을 모른데서야 되깃슴니까. 마찰을하야서 염증이 낫다는 것은 물론 잇슬 뜻한 말이다. 그것도 초산은을 발너준 결과 그 자리가 따가워서 부빈 것이니 그것이 누고의 책임이겟슴니까”라며 반박했다.
결국 11월 4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허시모는 나오지 않고 대리인으로 미쓰이 변호사가 자리를 지켰다.
가사이 검사는 ‘3개월 징역’을 구형했으나 오가와 판사는 원심대로 ‘징역 3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후 11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그를 불러 “상고 기각된 뜻을 고달”했다. 그리고 마침내 허시모는 12월 7일 순안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감으로써72)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허시모 사건’은 매듭지어졌다.

5. 결론

‘허시모사건’은 1926년을 뜨겁게달군 사회적 이슈 였으며, 한국교회에게는 일대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선교사들 에게 그러했다. 사건이 허시모 개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선교사들 전체 및 서양인들의 ‘백인우월주의’로 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개인적․ 우발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1920년대에 들어와 일어난 선교사들관련 사건들을 보면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가 빚어낸 사건으로 비쳐질 소지도 있었다. 예컨대 선교사들은 한국인에게 폭언하거나(1924.10) 구타하기도했고(1925.6/1926.11/1930.1), 여학생을 감금하거나(1923.1) 추행하기도하는(1925.8) 등 심심찮게 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학생들이 선교사와 갈등을 일으켜 ‘선교사배척운동’을 벌이기도했는데, 1924년 10월의 정여학교, 1925년6월정명여학교, 11월경 성성서학원, 1926년11월 구세군사관학교에서 일어난 분규가 그러했다.

‘허시모사건’이 사회적 이목을 끈것도 이 같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재판때 검사는 “작년에도 선교사가 조선여학생을 농략하려는 사실도 있었고 또다시 이와 가튼 사실이 잇는 것을 보아 조선에 와 잇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행동이 매우 횡포해지는 모양이니 이들을 징계하기 위하야”라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최근에 이르러서 조선기독교계에는 각지에서 선교사의 오만을 증오하는 소리가 놉하지고 배척하는 운동이 치성(熾盛)하는 오날에 그 만행의 일사(一事)는 확실히 그 포장한 심성의 일부를 우리의 안전(眼前)에 폭로식힌 것으로 보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는 기사도 그 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
허시모는 법정에서 “미국인이라도 그러케 번번이 (절도를) 하면 그러케 하얏슬 것이고 특별히 조선인 일본인의 생각은 업섯습니다” 라 했지만, 이는 변명일 뿐 그 역시 부지불식간에 ‘백인우월주의’를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일제 당국은 이 사건이 반기독교운동이나 반미운동으로 확대되는 것은 바라지 않아 진화에 나섰고, 〈동아일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개인의 죄를 전체에 미텨서 민족적으로 반감을 일으키는 것은 크게 삼갈 바”라고 밝혔다.
그런데 의아스러운 점은, 이 사건에 대한 한국교회의 공식적인 반응이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선교사들의 대책회의가 열리고 입장 표명이 있었지만, 한국교회나 교인들의 동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표적 교계신문인 〈기독신보〉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했으며, 일반신문에서도 교계의 동향은 드러나지 않는다.
결의문이나 성명서 하나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허시모가 장로교나 감리교 소속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수방관했을 수도 있다. 그저 몸을 움츠리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는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람 앞에서의 반성에는 인색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허시모가 소년의 얼굴에 영원히 글씨를 남기려 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가 쓴 약품도 염산이 아닌 초산은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작정한 것이 아니라, 배상을 받기가 어려워지자 ‘징벌’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너무도 깨닫지 못했으며 죄의식도 거의 없었던 듯하다. 사건이 크게 번지자 부랴부랴 사과문을 내며 반성하는 듯했지만, 몰래 피해자측과 합의를 하고나자 곧 태도를 바꾸었다. 법정에서도 시종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가 ‘후회’는 했을지 언정 ‘참회’는 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것이,
‘허시모 사건’이 마무리되고 2년 뒤인 1928년 8월, 명사십리에 피서간 선교사가 “외 따간 소년의 뒤를 쫒다가 잃어버리고 다른 소년을 난타”한 사건이 일어나 ‘제2 허시모’라 불린 것도, 선교사들이 제대로 각성하지 못했음을 짐작케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의 주체로서 중심에 서 있다. 수많은 젊은 선교사들이 세계각지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열매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보다 못 사는 지역에서 선교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우월감을 가질 수 있다. 만약 아프리카 오지에 갔다면 흑인들이 야만인이나 미개인으로 비쳐질 수 있고, 자칫하면 허시모가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혔듯이 스스로 ‘황인우월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문명’의 잣대로 재단한다면, 허시모가 ‘서리’를 ‘절도’로 간주했듯이 예기치 못한 사태를 일으킬 수있다. 요컨대 ‘허시모 사건’은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과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활동해야 하는 젊은 선교사들에게 언제라도 닥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 ‘허시모 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면교사’요 ‘타산지석’인 것이다.

6. 느낀 점

‘허시모 사건'은 한국기독교사상 가장 불미스러운 사건의 하나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 사건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알려져 왔다. 허시모가 화학약품으로 소년 의 얼굴에 ‘도적’이라는 글씨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염산이 아닌 초산은이었고, 영원히 자국을 남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 동안 이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는 별다른 연구가 없었다. 당시 신문에는 관련 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살펴보고 그 영향과 반향, 그리고 재판과정을 알아보고자 했다.
이 사건은 허시모 개인은 물론 그가 소속되어 있는 안식교, 나아가 선교사들과 한국교회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사건이 불거졌을 때 허시모가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면 그 파장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몰래 피해자측과 만나 합의를 본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고, 합의와 관계없이 이 사건은 도덕적․윤리적 문제, 나아가 인종차별문제로 비화되었다. 여러언론과 사회단체에서 그를 성토했고, 일본의 우익들도 그를 비난했다. 1920년대 들어와 터져 나온 선교사들의 비행과 추문은 은연중 그들이 품고 있던 백인우월주의를 보여준다.
‘허시모 사건’을 통해 백인우월 주의와 우리가운데서도 나타날 수 있는 황인우월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가 타국에 선교할 때 그들의 문화를 오인하여 우리 생각대로 생각하여 판단해버리는 실수가 절대로 있으면 안될 것이다. ‘허시모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의 선교적사명과 연관되어, 우리에게 바른 그리스도적인 바른 선교적 마인드를 심어주었다는데서 엄청난 의의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즉, 이 사건은, 세계각처에 파송되는 한국 선교사들이가슴에 새겨야 할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이번 과제를 하면서 처음 ‘헤이스머’선교사가 주제로 선택되었을대, “왜 하필이면 안식교선교사가 걸려서 자료도 없고 힘들어서 불평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과제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과제를 나에게 주셨는지 알게 되는 위한 시작이었다. 자료가 없어서, 삼육대학교 도서관을 찾아가기도 했으며, 안식교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왜 그들의 신앙과 사상이 잘 못되었는지 정확히 이해하게 하셨고, 선교사 지망생인 저에게 이들과 같은 과오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적인 선교를 어떻게 해야되는지 깨닫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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