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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Wagner, Ellasue(1881-?, MS)

닉네임
정이레
등록일
2019-12-05 02:17:45
조회수
90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44_정이레.pages (1171267 Byte)
내한선교사 / B144 / Wagner Ellasue


1. 기본사항
1) 이름: Wagner, Ellasue / 와그너 / 한국명: 왕래(王來) 또는 왕래수
2) 생몰연도: 1881.8.4~?
3) 출신 및 소속: 미국 / 남감리교회
4) 한국선교기간: 1904-1940
5) 연표
1881.8.4 미국 버지니아주 출생
1899 버지니아주 마리온대학 졸업
1903 스카릿신학교 졸업
1904.12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1904 개성선교부 부임
1904.12.4 캐롤(Arreana Carroll)선교사와 함께 개성여학교에서 교육시작
1906 개성여학교를 두을라학당으로 개칭
1922 두을라학당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로 승격
1906.4 크램(W.G. Cram)이 시작한 미리흠여학교에 관여
1920-1923 모친의 건강분제로 귀국
1925-1926 루씨여학교 제9대 교장으로 봉직
1927-1934 주필로 활약
1931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연합연회에서 목사 안수
1931-1935 서울에서 지방여선교회 사업, 태화여자관 사업
1933-1934 <기독신보> 상무이사로 근무
1933.9 미국으로 귀국하여 휴양
1938 개성에 부임 (호수돈여고 교장 및 오수돈여자보통학교 교장을 겸임)
1940 일제 말 강제 출국


2. 선교사 소개

1_ 혈혈단신 24살의 여성 선교사, 황무지로 오다

와그너 선교사가 1940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기 직전 그녀가 작성한 보고에 따르면 조선에 처음 왔던 그날의 기억은 참혹하리만큼 처참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녀가 1904년 조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찬 바람이 세차게 불던 12월이었다. 버지니아 출신의 그녀에게는 한국의 날씨가 익숙할 수도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누리던 현대적인 것들은 눈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하는 그의 기록을 보아서는 그에게 1904년 12월의 송도는 그가 한국을 떠나게 되었던 1940년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첫 기억으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그녀가 남긴 기록에는 조선의 조명들, 기차길, 전보(를 통한 의사소통), 심지어 물까지, 기타 등등 미국 생활에 익숙했던 24살 젊은 청년 와그너에게는 조선의 생활이 너무 다르게 보였던 것이 확실하다. 지금으로써는 대한민국의 24살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할 생활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런면에서 와그너는 선교를 위해 준비되었었고 복음의 열정을 안고 조선땅에 온 것임에 틀림없다.

2_ 준비된 교육가

와그너는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사역을 시작한다. 아마도 이것은 이미 조선에 들어와서 준비하고 있던 선교사와 동역하게 된 모습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그녀는 개성에서 1904년 12월 4일 캐롤선교사와 함께 한옥 한 동을 마련하여 여자 아이들 12명을 데리고 교육을 시작했다. 이 이름은 개성여학교이며, 후에 이 학교가 설립될 때부터 직간접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두을라학당으로 학교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후 학교는 거듭하여 발전하게 되는데 1909년 6월 스텔리(DR. E. Staley)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하여 친구들이 준 거액을 학교에 내놓았다. 이로 인해 학교명이 스텔리 박사의 거주지 이름인 “Holston”을 한자음역으로 바꾼 호수돈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호수돈여학교는 “남을 위해 살자”라는 교훈으로 전교생 774명(1018년 5월 1일 기준)이 이곳에서 꿈을 키우며 1904년의 12명의 여아를 가르쳤던 그 마음으로 교사들의 교육을 받고 있다.

3_ 죽어도 교육선교

“당신은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종종 하거나 듣고는 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있게 “네!”라고 말 할 수 있으리라. 이 말에 누구보다도 자신있게 “YES!!”라고 말 하리라 생각되는 사람이 바로 와그너 선교사다.
와그너 선교사는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있으면서 본국에 두번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왔었다. 먼저는 1920-1923년까지 모친의 건강문제로 미국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그로부터 12년뒤인 1935년 다시 미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이 때는 본인의 휴식문제로 돌아갔다가 2년뒤 1937년 그녀의 나이(한국나이) 57세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당시의 나이로 57세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온 것은 조선 땅에 대한 선교적 열정이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었음을 옅볼 수 있다.
그녀가 두번째 다시 돌아온 1938년 2월 7일. 그녀는 다시 돌아와서 개성으로 가 호수돈여자고등학교 4대 교장과 호수돈여자보통학교의 교장을 겸임하는 것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녀가 60이 가까웠던 나이에 가족도 없이 다시 조선을 돌아와 호수돈여자보통학교에서 다시 일하게 된 것은 그녀가 조선 여성들을 계몽시키고, 이들이 민족을 발전 시키며, 학교가 기독교 학교로 선교적 역할을 감당하는 일에 매우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학교는 1940년 까지 1,13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이 만큼의 숫자의 여성들이 사회속에서 이전과 다른 역할과 지위를 찾아가고 있었다. 단적인 예로, 학교 주변 동네에는 여성이 홀로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했으며 반짝이는 눈만 내어놓고 다니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한 낮의 풍경이 바뀐 것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길거리를 누비게 된 것이다. 이 광경은 마을 공동체가 학교를 바라보는 태도를 변하게 만들었고 여성을 보는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4_ 사회를 변화시키는 변혁가

와그너는 교육선교에 힘을 쏟는 만큼, 사회 속에서 깊이 침투할 여선교회 조직에도 힘을 쏟았다. 와그너는 학교를 운영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았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고등학교 등에 아이를 보낸 학부모들의 모임인 ‘어머니회(Mother`s Club)’를 발견한 것이다. 이들의 공동체를 활용하는 것이 선교에 큰 동원력이 될 것을 보았다.
한 예로 1908년에는 개성여학교에서 와그너와 캐롤의 주선으로 집사회를 조직하고 그들간의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며, 강사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으며, 회비를 모아서 선교사업을 돕는 일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의 모임은 후에 여선교회를 바뀌게 되는데 이러한 여선교회는 많은 지역에 남감리회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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