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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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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B058 / Miller, Lula Adelia (187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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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문
등록일
2019-12-09 16:17:39
조회수
818
첨부파일
 3학년5반 장상문 내한선교사 (밀러).hwp (2314240 Byte)
1. 기본사항1) 이름: Miller lula / 밀러 룰라2) 생몰연대: 1870 - 19583) 출신: West Saint Johmswille Cemetery. West Saint Jofnswille, Montgomert County, New York, Usa 미국 감리회 여선교사4) 연표- 1870년 미국 출생 - 1901년 한국에 선교사 파송- 1907년 수원지방 부녀사업 및 교육 사업을 위하여 파송- 1907년 삼일여학교 (현 매향여자중, 상업고등학교) 교장 취임 (30년)- 1916년 감리교인이며 유지, 교육가로서 학감으로 초빙- 1919년 3.1운동의 경기, 충청 지역 책임자- 1924년 수원지방 일대의 문맹퇴치를 위한 강습소 설치- 1926년 미 감리교회 새 기숙사 건축, 힐만기념관- 1925년 인천 우각리 교회 시무- 1938년 귀국 5) 동역자: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며, 초기에는 힐만(Mary R. Hillman) 부인과 함께 일하였으며 1916년에는 Lula E, Fery와 함께 교육사업 및 수녀사업을 일함.
2. 밀러 선교사의 사역가. 매향여자 중학교 (밀러 룰라와 나혜석)1902년 6월 3일 미국 북감리 여선교회 M.F Scrantn여사에 의해 여학생 3명으로 개교된 아래 총 18,87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본교는 지역 사회에서 신뢰받는 중등 교육의 요람으로 교양인 실력인을 기르는 수원 교육의 명문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사랑 봉사의 이념으로 교사와 학생이 혼연일치가 되어 각종 특별활동의 활성화 교사와 학생간의 사랑의 대화 상담으로 인성 교육을 위해 오늘도 교육의 현장에서 시간과 정열을 다해 학생들을 돌보는 교사들이 있는 본교는 명실상부 인간 교육의 장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밀러 선교사는 1907년 제2대 교장으로 취임이 되었고 1910년 3년에 첫 졸업생으로 나혜석 박충석, 차우르다, 황보배 등 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중 나혜석은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근대적 여권론을 펼친 운동가이다. 그를 기념하는 거리가 현재 수원에 가직도 남아있다. 밀러 룰라는 나혜석이라는 걸죽한 인물을 길러낸 선교사인 것이다. 나. 수원지방 선교사 사역과 밀러 선교사 이곳에 여선교회가 시작되기는 1902년 부터이며, 선교사로서는 Mrs,,Scranton이 부녀자들과 어린아이들 앞에 놓고 풍부한 생의 의미를 가르쳐 준데서 시작되었다. 처음 그녀는 어떤 작고 낮은 초가집에서 3명의 소녀를 데리고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 교회가 지금의 수원종로 교회의 시작이다. 스크랜톤 (Mrs,Scranton)은 매우 긴 순회를 하였다. 그가 닿은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대부인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뒤를 이어서 알리스하몬드(Alice Hammond) 네리피언스(Nellie pierce) 엘라 우이스(Ella Lewis) 구파트(Minerna Guthafe) 등이 내한하여 여선교회의 사업을 도왔다. 1907년에 와서 힐단양(Mary R. Hillman) 과 밀러양(Lula a, Miller)이 피선되어 왔가 1938년까지 밀러가 수원지방의 WFMS의 유일한 대표자로서 일했다. 수원 비장의 그간 사업내력에 대해서는 자세한 문헌이 없어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단편적인 지식으로서는 이곳에서도 성경학원, 사경회, 기타부녀반들이 조직되어 정규적으로 그리고 때마다 매우 효과적인 선교 및 여성사업을 펼쳐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원지역에는 1920년부터 실시되어 온 가정연구과정이라는 것이 있다. 이 과정은 부녀자들에게 성경을 집에서 일고 공부하는 것으로 당시 여성들에게 성서의 지식을 공급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아울러 문맹자를 퇴치하여 주는 좋은 제도였다. 시작한지 몇 년이 못되어 이지방에는 전 교회를 통털어서 글을 모르는 여자가 겨우 하나 있었다고 보고한 바있다. 이 제도는 아마도 다른 지방에는 찾아올 수 없는 새로운 선교방식으로서 복음선교에 상당한 효과를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다. 1932년에 와서 힐만양은 죽기 전에 친구였다. 미러(Lula Miller)에게 지금까지 하영 hs 사업을 좀더 쉽게 하고자 약간의 돈을 준 것이 있었다. 이 돈으로 수원시 교외 옆에 기숙사를 짓는데 썼으며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데 가주 적절히 사용했다. 말하자만 수원 여성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부녀사업의 일환으로 가정의 날이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가정을 보다 행복하게 그리고 보다 좋게 할까라는 주제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1년 365일 일일이 주제를 걸어서 하나한 해야할 실천사항을 불어 놓은 것이다. 수원 지방은 이 방법에 의해서 복음전파는 물론 복음의 내용을 생활화하는 선교교운동을 실시했던 것이다. 선교매체로 또 하나 사경회를 뺴놓을 수없다. 사경회는 해마다 모이지만 여기서는 성경은 물론 기타 기독교교육의 전 과정을 듣고 배운다. 1939년도 연회록에 보면 부인대사경회는 금년 3,31일부터 25일까지 모이는 중 방훈 감리사의 의미 깊은 설교에 사경회원마다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은 이 지방에서 매우 뜨겁고도 활발한 선교 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다. 1905년 건축한 갬블홈 (여선교사기숙사)

여선교사 기숙사 건축은 1904년 한국서지방의 선교영역이 제물포, 강화. 남양, 황해도 연안 등지 확장되면서 여자신자와 매일학교 학생을 가르치는 전문 여선교사가 주재하기 시작했다. 힐만, 밀러, 스나블로 등 4명의 여선교사가 활동했다. 그러나 마땅히 거주할 숙소가 없어 고민하던 중 1905년 당시 한국서지방 담당 선교사인 케이블이 미국 신시내티 지부 윌리암 겜블여사의 기부금으로 아담하지만 호화로운 여자기숙사를 건축했다. 케이블선교사가 직접 인부를 동원해 건축감독을 할 정도로 치밀하고 튼튼하게 건축하도록 했다. 1층은 여자 신자 사경회 등 교육공간으로 활용하고 2층은 여선교사 숙소로 활용했다. 특히 여름철에는 서울, 평양, 개성, 공주, 수원 등지의 선교사들이 하기 휴가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3. 여성들에 의해서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
1920년부터 조직된 여선교회는 안과 밖으로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 사업은 지금까지 없었던 이례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외국인 즉 선교사들에게 의존하던 것을 이제부터는 한국여성 스스로가 앞장서서 주도하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점이다. 지금까지 국내 선교는 언어와 풍습이 생소하고 낮선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선교의 걸림돌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성 싶다. 선교는 언어적인 표현이나 대화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역시 행동을 통하여 마음에 파고들어 갈 때 비로소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 법이다. 어디를 가나 전국은 신앙의 뜨거운 열심과 진리의 간구와 사모로 충만 되어 있었던 시대였다. 이들에게 선교사 일동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거기다 일 년을 가도 한 두 번 만나기가 어려운 그들이고 보면 말이 선교지 제대로 잘 되어 질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여성 지도자들이 들어서면서부터는 선교는 종래와 차원을 달리해서 보다 신속히 그리고 보다 널리 퍼져가게 되었다. 그 노력과 열심도 대단하여 선교는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멀리 만주 시베리아를 위시한 해외에까지도 뻗어가는 눈부신 활동을 보여준 바 있다. 우리는 이 시기를 한국여성 선교회의 가장 활발하고 정열적인 황금기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시기의 선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장 활발하고 정열적인 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놀라운 결실을 가져온 시대였다. 여선교회 회원들은 가는 곳마다 선교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능력과 수단에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확신 하에 교회마다 밤을 세워 기도하고 기도가 끝나면 전 회원들이 짝을 지어 마을로 들어가서 전도한 사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이런 열의와 기도를 통한 그들의 전도는 이미 각처에서 많은 재미를 가져왔다. 김자선씨의 보고는 좋은 예의 하나이다. 작년 대회 후에 성신의 도우심으로 복도 많이 받고 한없는 재미와 사랑을 보았습니다. 예배도 늘 재미있게 인도하였습니다. 주님 예수의 도가 흥왕함을 감사합니다. 김자선씨의 보고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우리 회원들이 선교적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와 또한 그것이 가져온 놀라운 선교의 결실을 입증하는 내용이다 개성지방 같은 동에서는 선교회 처소가 한 동에 56개소가 신설 증가된 것이라든지 포천 구역에서도 김수산나가 들어서 20여 처에 전도했는데 92인이 믿고 교회에 나오는 놀라운 일도 있었다. 송우리에서는 여성회원이 들어가서 교회를 설립하고 마을 사람 30명에게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했다는 보고도 있다. 이렇게 서 각 처에서는 많으신 신자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나오는 일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던 일이었다.

4. 참고 자료 내한선교사 총람 자료총서 제 18집 수정 중보판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소 2007)
기독교 대백과 사전편찬위원회 (서울 기독교문사. 1996)

웹 사이트https://www.findagrave.com
http://www.incheonmaeul.org/?mod=document&uid=743&page_id=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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