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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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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3권 13장 23장 요약 3-5 2016210321 장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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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문
등록일
2019-12-09 16:22:06
조회수
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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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3권 13장,23장 과제 2016210321 장상문.hwp (91648 Byte)
13장 민족의 해방과 남북교회의 재건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의 관심과 다르다. 1517년 10월31일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비텐베르크는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루터와 비텐베르크를 역사의 추로 사용하셨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1차 대각성운동의 주역이 되면서 역사는 조나단 에드워즈에 포커스를 두고 역사는 전개되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셨을까? 모든 교회가 배도의 길을 가고 있을 때 진리를 붙들었던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던 사람들이다.

교회 재건의 원칙 가. 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에 참여했다. 권장한 후 교육에 나아갈 것이다. 나. 권징은 자책,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 2개월 휴직하고 통회자복 할 것
다. 목사 장로 부재중에는 집사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라. 전 한국 노회, 지 교회에 전달하여 실행케 할 것
마.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할 것
그들의 교회재건 원칙은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남과 북은 스스로의 지역에서 모여야 했다. 5도 연합노회가 편성되었고 그 중심에 산정현교회가 있었다.

해방과 남북교회 재건
가. 북한 5도 연합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가지 잠정적 협력기관으로 한다.나. 총회헌법은 개정 이전의 헌법을 사용하되 남북통일 총회가 열릴 때까지 둔다,
다. 신학교년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라. 전도를 통한 부흥운동을 추진한다.
마. 북한을 대표할 사절단을 파송하여 연합군 사령관에게 뜻을 전한다.

김일성 북한교회 파괴 전략 3단계
가. 종교인을 이용할 것
나. 민주개혁을 감행하여 종교의 사회적 기관을 박탈 할 것.
다. 유물론에 입각한 계급의식을 강조하여 종교는 아편이라는 선입견을 심을 것

공산주의자는 위 3단계의 절차로 기독교를 무너뜨려 나갔다. 현재도 사탄은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전략을 실행해 나가고 있다. 11월3일 11시를 선거일로 정했다. 예배시간에 했다. 투표 장소는 교회로 했다. 김일성정권의 이러한 결정에 조선기독교 연맹은 찬성했고 5도 연합노회는 반대했다.

조선 기독교 연맹
가.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나. 우리는 남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 선거에 철저히 임한다.
김일성정권수립을 위해 교회가 시녀의 역할을 했다.


5도 연합노회의 입장표명
가. 북한 2000교회와 30만 기독교 신도들은 신앙생활의 규범을 만들고 있는 바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
나. 성수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예배 외 어떤 행사도 참여하지 않는다.
다. 정치와 종교는 엄격히 구분한다.
라. 교회당의 신성을 회복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권리다.
마. 현직 교역자로 정계에 종사할 경우 사면해야 한다.
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당당하고 분명한 입장이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었으므로 예배 외 어떤 행사에도 예배당을 내어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1945년-1950년의 역사는 눈물로 섰다. 5도 연합노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산정현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다. 북한은 산정현 교회 담임목사를 죽였고 후임자도
3개월 만에 사라졌다. 다음 후임자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담임목사가 되었다. 북한 교회는 그렇게 수난을 겪었다. 6.25전쟁도 반대했던 사람의 상당수를 죽이고 전행을 일으켰다. 6.25전쟁이 끝난후 북한ㄱ회는 지하에서 생명을 내걸고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북한 지하교회가 공산 정권하에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뉴스워크지의 보도에 따르면 10년 전 3만명의 지하교인들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모퉁이돌 선교회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 지하교회 성도는 9만명~14만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14만이라는 수는 성경에 의미 있는 숫자다. 로마제국 전체크리스천의 숫자가 14만 명이었다. 적은 수가 아니다. 평양 대 부흥이 끝나고 100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난 후 1916년 한일합병 때 전국 크리스천 숫자가 18만 명이었다. 장로교만 14만 명이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지난 후 14만 명의 숫자가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숫자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해방된 후 북한을 복음화 시킬 준비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한 교회가 준비되지 않았을 뿐이다. 통일되면 교단과 신학교는 하나여야 한다. 신학교 교수는 새터민이 가르쳐야 한다. 남한 교회의 통일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북한은 수난의 길을 걸어갔지만 남한은 미군의 도움을 받았다. 선교사가 있었고 부흥사가 들어와서 사역했다. 남한교회 재건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김치선 목사와 한경직 목사였다. 김치선 목사는 남대문 교회 목사였고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 목사였다. 이들은 엘리트중의 엘리트였다. 김치선 목사는 웨민을 졸업한 후 달라스에서 학위를 받았고 한경직은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영락교회를 설립했다. 남하교회 재건에 박희열이 김치선 목사와 손을 잡았다. 김치선 목사는 300만 구령운동을 전개했다. 손을 잡았다가 얼마 후 끊었다. 그 후 한경직 목사와 손을 잡았다. 김치선 목사는 복음저도에만 집중했으나, 한경직 목사는 빵과 복음을 하께 전했다. 북한에서 넘어온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남한교회 부흥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북한이 공산화 되었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지도자들,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회개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23장 예장합동: 개혁파 장로교전통과 복음주의 유산
평양장로교회신학교 신학전통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장로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주의를 지향한 것은 장로교 목회자를 양성하는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신학교육의 정체성을 밝힌 평양신학교 요람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1931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요람 본교의 목적과 신경 제4항에는 평양신학교의 신학교육이 지향하는 목표가 본교는 학생에게 복음주의의 진정한 정신과 차에 대한 개인적 책임감을 고취하고 장려하야 내외국인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따라서 그리스도 교회를 확립하기로 목적함이라고 분명히 천명하였다. 평양신학교는 바른 교리를 보호하고 이단을 막을만한 인물을 양성함을 목적으로 삼고 이를 위해 장로교회의 역사적 표준 즉 신경, 요리문답, 정치권징조례와 예배 모범을 신앙의 기초교리로 삼았다.

성경의 절대권위와 복음 전파
성경의 절대권위와 복음전파를 강조한 복음주의 신앙은 평양신학교부터 내려온 신앙전통이었다. 주지하듯이 1959년 예장통합과 합동이 분열된 것은 WCC에큐메니칼 운동 문제였다. 예장통합의 지도자들은 WCC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했고 이를 반대하는 이들은 복음주의협회라는 이름으로 반 WCC의 입장에 서서 WCC신학적 입장을 문제 삼았다. 1960년대 접어들어 NAE이름으로 결속했던 이들이 WCC를 반대하는 중심에 섰고 고신과 합동한 예장합동만 아니라 예성과 침례교 감리교중에도 WCC를 반대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가장 영향력 있는 범 연합기구로 발전했다.

축자, 완전, 유기적 영감 변호
박형룡은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을 일관되게 자신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박윤선도 우리의 성경이라는 논고에서 축자 완전 유기적 영삼을 한국장로교가 견지해야 할 성경관이라고 불명하게 밝혔다. 성경의 영감론과 무오성을 변호하는 논고들은 그 후에도 신학지남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1959년 예장통합과 분립된 후 예장합동은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단의 표준문서로 재확인하는 한편 선교사들이 전해준 역사적 칼빈주의 신앙을 그대로 계승하기로 했다. 예장합동은 성경의 절대권위를 중심한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하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1960년대 초부터 예장합동이 추진해온 부흥운동과 전국목사장로 기도회이다. 예장합동은 한국의 초대교회가 견지해온 복음전파의 열정을 다시 회복하며 교세확장에 매진했다. 교단은 외국 선교회의 재정 지원 없이 오로지 복음전파에 매진했다 예장 합동은 그동안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전해준 보수적 복음주의 성경관 곧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복음전파에 생명을 걸었다. 예장 합동을 묶어주는 절대적인 끈은 성경의 무오 신앙과 복음전파였다. 철저한 성경의 권위에 대한 확신은 한국장로교의 소중한 전통이자 평양장로회 신학교부터 전해져 온 아름다운 신앙유산이었으며 WCC 에큐메니칼 운동과 결별한 후 예장합동이 나가야 할 신학적 방향이고 교단이 지향해야 할 신학노선이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침해하는 어떤 신앙운동도 박형룡은 반대했다. 1959년 통합과 분립한 후 박형룡은 WCC 에큐메니칼 운동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장차 교단을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더 강하게 분리주의적으로 나가길 원했다.

예장합동 ICCC 근보주의 교류단절
NAE라는 이름으로 WCC 에큐메니칼 반대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박형룡이 근본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고 전국에서 모인 지도자들 앞에서 이를 지지하는 강연을 하면서 신학교와 교단 안에는 보이지 않는 이상 기류가 형성되었다. 이것은 예장합동이 취한 ICCC와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일각에서는 ICCC의 극단적 분리주의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때문에 예장 합동과 ICCC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960년 45회 총회에서는 WCC와의 단절을 재확인하고 본 총회는 ICCC에 가입하지 ㅇ낳고 우호적 관계만 가지기로 결정했다가 그 이듬해 1961년 46회 총회에서는 아예 ICCC의 도움을 받아 용산교사를 마련했지만 대외적으로 예장통합과 연합 움직임이 있는데다 상당수의 지도자들이 매킨타이어의 근본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신앙
박형룡은 1969년 통합과 분열된 후 잠시 근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그는 이내 그 용어 사용을 지향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예장합동의 정체성을 잘 대변해주는 신학적 신앙적 표현으로 보수적 복음주의나 칼빈주의 개혁파 장로교의 전통적 복음주의 신앙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해방전까지는 정통주의를 주로 즐겨 사용하였으나 해방 이후에는 복음주의를 선호하였다. 박형룡은 WCC 에큐메니칼 논쟁이 한국장로교회 안에 강하게 일던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복음주의 신앙을 지속적으로 변호하며 강조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5년 7월20일 서울 남산 총회신학교에서 전국학생 CE하령 대회 때 행한 복음주의신앙의 현세라는 강연이다. 박형룡은 위 글에서 복음주의가 어원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이나 웨슬리안주의자들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용어 대륙에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계승한 개신교도들을 카톨릭과 구별할 때 사용하는 용어, 웨슬리 부흥과 그 영향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 진보주의자들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보수주의 정통주의 신앙의 전용에 가까운 명사라고 이해했다. 이처럼 박형룡은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지니는 언어적인 다의성을 인정하면서도 복음주의와 정통주의 두 가지 용어를 동일한 의미로 교호적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볼 때 복음주의는 성경의 완전영감과 성경의 근본진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신앙이었다. 그가 복음주의 신앙의 현세를 보수주의 정통신앙의 현세나 정통주의 성경적 신앙의 현세와 동일시하고 복음주의와 정통주의를 교대로 사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본주의신학
신학은 점점 인간중심의 인본주의 이기주의로 퇴락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지위는 점점 더 낮아지고 사람의 지위는 점점 더 놓아지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신학이 일어날 정도로 퇴락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위하여 존재한 것이 아니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 것이다. 시편에 있는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다. 칼빈의 주장 그대로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창조하셨으니 우리가 그를 경외하며 순종하고 기쁘시게 하여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 신학의 근본정신이 되어야 한다.

계시의 신학
현대신학은 하나님의 모든 계시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을 가지고 만들어 낸 바 인조신학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에게 성령의 영감을 베풀어 특별계시를 하시고 직접 성자 예수 자신과 그의 교훈을 통하여 계시하셨으니 성경은 이상의 모든 특별계시의 기록으로 정확무오하여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의 법칙이다.
작성일:2019-12-09 16:22:06 222.118.32.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