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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Laird, Esther J.(1901-1968, M)

닉네임
유미영
등록일
2019-12-09 17:16:49
조회수
1177
첨부파일
 Laird Esther J3학년4반B037유미영.hwp (4701184 Byte)
내한선교사/B037/Laird Esther J(1901-1968)/3학년4반 2017210238

에스더 레어드 선교사 / ESTHER. J. LAIRD (1901-1968)

I. 기본사항
1. 이름: ESTHER. J. LAIRD / 에스더 레어드 / 한국명: 나애시덕(사랑으로 덕을 베푼다)
나부인으로 불림
2. 생몰연도: 1901.-1968.9.20
3. 출신 및 소속: 미국 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26 ~1966
5. 연표:
1901 미국 오하이오주 페어헤븐 출생. 오하이오주 옥스퍼드에서 올리브 크롬 레어드
(William G.& OliveCrom Laird)의 딸로 태어남
1924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Ohio Wesleyan University)
성서와 종교교육을 공부(김활란과 동창)
1926 2.26 내한, 원주 정착
1927 미국으로 돌아가 4년동안 머물면서 한국 봉사활동 자금 마련
1931 원주기독교 여자사회관 설립
1940 일제에 의해 추방당함
페어헤븐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침
신시내티 베데스다 간호대학에서 공부
1947 무의촌 진료활동 개시, 결핵요양소 운영
1950 전쟁으로 미국으로 떠남
1952 『The Five Little Chungs』집필
휴전되자 한국으로 돌아옴. 대전에 정착
파킨슨병 증상 심해짐
1953 대전 기독사회관 건립
1954. 10 결핵요양원 개원
1961. 9. 18 회갑 축하연
1964 결핵퇴치사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공로포상
1966 9. 7 파킨슨 병으로 미국으로 돌아감
1968. 9.20 한국을 떠난지 2년만에 사망
오하이오주 페어마운트 공동묘지에 묻힘

묘비 ESTHER. J. LAIRD
1901-1968
KOREANRY FOR 40 YEARS

6. 가족사항4남매중 셋째로 태어남
II. 선교사 소개: 에스더 레어드 선교사 ( ESTHER. J. LAIRD, 1901-1968)

1. 출생과 성장
에스더 레어드는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생애를 통틀어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01년 오하이오주 올리브 크롬 레어드(William G, & Olive Laird)의 딸로 태어나 1968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40년 동안을 한국에서 빈민구제와 교육에 헌신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리쉬계 사람으로 노래를 잘 불러 교회에서 독창을 부르곤 했다. 어머니는 독일계로 선교정신이 강한분으로 선교사님을 잘 대접하곤했다. 아마 레어드는 어머니의 선교정신과 집에 드나들던 선교사들의 영향을 어렸을때부터 받은 것 같다.

2.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 신학공부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교는 1930년대 한국 선교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교였다. 그의 대학시절은 앞으로의 그의 일생을 변화시키는 일대 중요한 시점이 된다.
에스더 레어드 선교사는 이화여대 총장인 김활란과도 함께 공부했고 구한말 초기 선교사 중 상당수가 이곳 출신이기도 했다 - 호레이스 알렌, L.H세브란스, 메리스크랜튼(감리교 최초여선교사)등- 에스더는 이런 전통 속에서 대학을 마쳤고 한국으로 선교사로 나가는 많은 선배들을 접할 수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한국행을 결심한다.
에스더 레어드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해외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외국선교에 대한 관심과 당시 미국 교회의 외국 선교에 대한 열정이 간접적으로 연향을 끼쳐 성서와 종교교욱을 공부하게 되었고 직접적으로는 웨슬리안 대학 시절에 교수들과 선교사들이었다.

3. 원주기독교여자 사회관
에스더가 한국에 도착할 때 상황은 일제가 토지수탈을 목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일제가 만든 기구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고통받던 시절이었다.
국내에서 생산되던 쌀까지 일본으로 강제로 공출당하면서 사람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고 간도와 만주로 떠나는 각박한 시대였다. 일제치하인 1926년 美 감리교단의 선교사로 한국에 와 원주에 정착한 그녀는, 1966년 지병인 파킨슨병이 악화돼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주로 여성, 어린이, 결핵환자 등 그동안 국가가 배려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쳐나갔다. 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은 주로 학교와 병원을 세워 교육과 치료에 힘을 썼는데 에스더 레어드는 조금 달랐다.
1925년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후 1926년 2월에 여자해외선교회(WFMS) 파견 선교사로 26세 한국 땅 강원도 원주로 파견되었다. 그해 3월 원주에서 모리스 부인과 함께 교육사업을 하게 되었다.

에스더 레어드는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잠시 귀국하여 여러 가지 준비물을 갖추고 친구들을 만나서 선교비를 모금하였다. 한국에 다시 귀국하여 1931년까지 전도사업과 사회봉사사업을 담당하였다. 이때 그녀의 활동으로 4000여원의 거금으로 2층 양옥을 원주읍 중심지에 건축하여 원주기독관이라 칭하고 1층은 원주 유치원으로 2층은 남자관으로 사용하면서 원주 남자청년들은 무료로 그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방법과 목욕을 주기적으로 시켜줌으로 위생을 가르쳤고 전쟁중에 남편을 잃은 부녀자들을 자립할 수 있도록 탁아와 훈련으로 도와주었다. 야학부, 소녀부, 부녀부를 세워 종교에 상관없이 교육을 받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육아와 아이들의 질병치료방법을 가르쳤다. 원주사람들은 에스더 레어드를 나부인으로 불렀다. 나부인이라는 호칭은 당시 남자인 스톡스 선교사도 불릴 정도로 대명사로 선교사를 부르는 대명사가 되었다.

1) 육아원 운영
특별히 에스더는 육아원에서 일하는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에스더 레어드가 평생 애착을 가진 사역은 육아였다고 볼 수 있다. 육아원에는 언제나 버려진 아이들, 아이를 키울 수 없는 가정의 아이들이 20여명이 있었다. 사과궤짝으로 침상을 만들고 보모는 보통 한사람이 다섯명의 아이들을 돌봤다. 5명 정도로 아이들 수를 줄인 것은 보모가 아이들을 어머니처럼 사랑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서 염소를 키우기도 했다. 젖소보다 값싸고 키우기 쉬웠기에 가난한 사람들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젖병만 물려주지 말고 아이를 안아서 눈길을 마주치면서 우유를 주라고 보모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담당하는 보모들에게는 다소 엄격했다. 그녀는 아기를 위해 필요한 기저귀, 비누, 베이비로션, 베이비파우더, 젖병, 분유, 영양제 등 모든 물품을 미국에서 들여왔다. 세탁비누로 기저귀를 빨면 아기의 피부가 상할 수 있다하여 고급 세수비누로 빨게했다. 그녀는 위생관념도 철저했다. 젖병은 반드시 삶아 사용하고 손으로 직접 만지지 않고 핀셋을 사용하도록 했고 주방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소독하게 했다. 아기에게 소홀한 보모는 즉시 육아원을 떠나야했다. 어떤 직원도 아기에게 소홀하거나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또다른 중요한 일은 염소를 키우는 일이었다.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완전제품인 우유를 먹이고 싶었지만 우유는 값이 비쌌고 염소는 젖소보다 값싸고 키우기 쉬웠기 때문이다. 염소를 키우는데 실패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단념하지 않고 직접 중국에서 8마리의 염소를 원주까지 가져오기도 했다.

2) 야학교 운영
원주 여자관의 경우 크게 세 가지 모임을 운영하였는데 야학교와 소녀반 그리고 부녀반이다. 야학교에는 해마다 주로 5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는데 여기에서 주로 일본어, 수학, 한굴, 성서, 위생학, 지리학, 음악등의 과목을 가르쳤으며 1935년에 1회 졸업생을 내기도 했다. 소녀반에서는 주로 가정생활에 필수적인 과목인 성서, 생리학, 위생학, 탁아반, 일반과학, 원예, 지리학등이었다.
부녀반의 경우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의 질병을 연구하고 아이들의 인형을 만들고 함께 가정문제를 통의하는데 그 시간을 보냈다. 여기에 게임, 노래, 재봉, 지리학, 일반과학 등의 과목을 수강하기도 했다. 유치원과 청년사업도 벌렸고 도서관도 설치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미국의 후원자들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의 후원 덕분에 원주 지역 여성들은 기독관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에스더는 후원자들에게 “보내주신 비누 고맙습니다.. 오늘은 목욕하는 날입니다.. ”라는 편지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곤했다.

3) 이동건강 진료차
일제는 선교사들을 추방할 목적으로 “만국기도회 사건”을 꾸미고 세계기도의 날에 관련된 모든 선교사들을 가두고 심문하였다. 외국 선교사들을 압박함으로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때 에스더 레어드도 제 2차 세계대전으로 한국에서 철수하였는데 귀국하여 그녀는 오하이오주 씬씨내티 베데스다 병원 부속 간호병을 졸업하고 1945년 정부 공인 간호사 면허를 받았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올 때 우수한 설비를 갖춘 이동건강진료차를 가지고 왔다. 이 차는 데이튼 지방 여선교회가 에스더 레어드의 선교사업을 위해 1700달라라는 많은 기금을 모아 구입할 수 있었으며 이 차는 구급장비 뿐만 아니라 불임시술 장비와 교육용 영사기까지 갖춘 다목적용 차였다.

4) 영어를 가르침
그녀가 육아원 못지 않게 힘을 쏟은 또 다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녀는 시간을 내어서 원주농업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위한 영어수업을 마련했고 해방이후 부터는 낮에는 봉사활동을 했고 밤에는 숙소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
이때 에스더 레어드에게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최규화 전대통령, 장재용 전스페인대사, 대한적십자가 총재 이윤구를 비롯하여 대학교수, 의사, 외교관 실로 다양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사역은 아주 독특해서 일반 선교사와는 다르게 교회를 직접돕는것보다 사회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회관을 통해서 신앙인 비신앙인이든 인생을 조금 더 낫게 살게 하려는 노력으로 가르침에 열심이었다.

4. 대전기독사회관 설립

에스더 레어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5년간 떠나 있으면서도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52년 전쟁이 휴전이 되자 곧 배편으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미국에서 모은 대량의 구호물자로 인해 군 작전에 지장을 줄 수도 있었다. 함께 간 몇몇 선교사들이 노력하였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 구호물자를 가지고 나올 수 없었지만 에스더 레어드는 포기하지 않고 남아서 계속 협상을 했고 결국 에스더는 다섯 대의 2.5톤 군용 트럭으로 화물을 싣고 선교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특히 한국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해 공헌했고 생애와 복지사업에서의 어려움을 굴하지 않고 용기와 신앙심으로 맞섰다.
1952년 7월 미감리교 여선교부를 통하여 대전에서 대지를 매입하고 건물등을 지었고 1953년 1월 대전 대흥동에 대전 기독사회관을 세웠다. 그녀는 사회관을 세운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종교를 초월하여 사회적, 영적, 정신적, 육체적 발달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점차 기독교적이고 민주적인 생활방식을 터득하도록 봉사한다.

1931 원주기독교 여자사회관 설립과 1953년 대전기독사회관 설립은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한국인들에게 도움을 주고자하는 에스더 레어드의 설립 목적이 담겨져 있었다.
즉 사회관에 오는 사람들에게 종교와 상관없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기독교적이고 민주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종교를 넘어 생명을 제일 먼저 생각했다.

1) 육아원 사업
육아원 사업은 조산아로부터 만 4세까지 어머니가 결핵이나 나병, 그밖의 질병으로 양육할 수 없는 40여명이나 되는 아기들을 임시격리 보호하는 사업이다.
그녀가 가져온 인큐베이터는 대전 충남지역에서 유일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산모들이 영양부족이 많아서 미숙아들을 많이 낳았기 때문에 인큐베이터는 위태롭던 갓난아이들을 많이 살려낼 수 있었다.
사회관에서는 육아원의 또 다른 중요한 사업은 탁아사업이었다. 탁아방은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당시에는 유일한 시설이었다. 육아원은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기관이었고 탁아방은 일하는 엄마들을 위해 아이들을 돌보는 기관이었다.
1953년 5월에 이르러 야간 위탁 아동의 수가 증가하여 2부로 나누어 주간탁아 사업은 근로 여성의 자녀들을 맡아 도왔고 주야탁아 사업은 어머니가 질병으로 양육할 수 없는 아기들을 돌보았다.

2) 호의의 집 운영
호의의 집(Anderson Good Will House)은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을 위한 재활기관으로 전쟁으로 홀로된 여성들은 이곳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그것에서는 수예. 재봉, 구호물자 재생, 편물, 베틀짜는 일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의지할 수 없이 가계가 어려운 부녀자들의 생계를 도와주기 위해 미국에서 보내오는 구제품 의류에서 바느질감을 마련해 주고 후한 품삯을 주었다.
그곳에서 여성들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호의의 집에서 에스더 레어드 원칙은 ‘자립할 수 있는 만큼 돕는다’였다. 그들을 위해 거처를 마련해 주고 부복한 생계비도 지원했지만 일하지 않게 내버려두면 자활의지를 망치게 된다고 항상 강조했다. 도움을 받더라도 항상 자립정신이 있어야 장래에 발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스더 레어드는 1966년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최현자에게 호의의 집 운영을 맡겼으며 이후 몇 년간 계속 운영되었다. 후에 사회관 건축비 마련을 위해 직원 기숙사를 매각할 때 호의의 집도 함께 처분했는데 그곳에 기거하고 있던 두 가정을 위해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도 지원해주었는데 그녀의 도움으로 학비를 받아 도움을 받은 사람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정도로 많았다.

3) 장학사업
에스더 레어드는 1955년부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학비를 보조해주는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장학사업은 장기적 안목으로 인재를 길러내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그 외 가족계획사업, 장의 차량, 노동자 위안잔치를 통해 정부시책에 앞서는 의료사회봉사의 선구자로서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데 앞장섰다. 대전기독사회관은 초종교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주게 하는 꼭 필요한 사업들이었다.


5. 결핵 요양원 사업

1) 원주결핵예방원
에스더 레어드가 처음 결핵퇴치 운동에 앞정 선 것은 1947년 원주 남산에 천막 형태의 결핵예방원을 세우면서부터다. 하나의 천막에 2~3명씩 모두 10명 안팍의 환자가 기거했으며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 2명과 식모도 고용했다. 결핵 환자의 진료를 위해 원주기독사회관에 X-ray 사진기를 들여놓고 필름도 마련했다. 그녀는 폐결핵 조기발견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폐결핵도 빨리 발견해 적절히 치료하면 완전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6.25전쟁으로 불과 2년여 만에 문을 닫게 되었지만 원주 결핵예방원은 폐결핵 퇴치에 선구적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2) 대전결핵요양원
에스더 레어드가 결핵요양원 설립을 추진하던 중 기독교연합봉사회 부지 중 일부를 감리교 몫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결핵 요양원 운영을 위해 MCOR에 보조금을 요청했고 원주에서 결핵퇴치 운동을 벌였던 그녀의 공적을 인정해서 보조금을 지원해주기로 했다. 대전시 대덕구 일대의 산기슭에 결핵요양원을 지었다. 1954년 12월 결핵요양원은 개원식을 가졌고 대전 결핵요양원은 20년동안 천여명의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선교사이자 간호사이기도 한 에스더 레어드는 이곳에서 결핵환자들을 직접 돌보았다. 남자병동 2개와 여자 병동 1개, 전염병이 강한 결핵환자들을 격리 입원시키는 이 시설은 당시 획기적인 일이었다. 치료방법으로는 휴식과 영양보충을 하는 정양이나 ‘스트렙트하이드라지드’와 ‘스트렙토마이신’ ‘이소니아지드’ ‘비타민’ ‘철분’ 등을 투여하는 시약치료가 있었다.
당시에는 인구의 70프로가 결핵을 앓고 있을 정도로 결핵환자가 많았기에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대기중인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에스더는 환자를 받을 때 자신이 정한 원칙이 분명했다. 교인이 먼저가 아니라 엑스레이 상으로 확인해서 증상이 심한 환자가 항상 우선이었다.
1964년 13회 세계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원주에서 시작해서 30여년만에 에스더 레이더의 공로를 인정하여 결핵퇴치 공로 표창을 수여받았다.

6. 귀국
1966년 상반기는 에스더 레어드가 정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한국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10월 14일에 작성된 활동보고서에 따르면 그녀가 병으로 요양을 떠난 기록이 있다. 1952년 대전에 온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증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깊어진다. 한국을 떠나기 전 그녀는 미국의 집을 팔아서 미망인 2명에게 집을 마련해주었고 나머지는 직원 숙소 건축비로 내놓았다. 이후 에스더 레어드는 미국에서 양로원에서 지냈고 한국을 그리워하며 한복을 즐겨입었다. 그곳에서도 후원금을 모아 학생 30명에게 남몰래 학비를 보내주던 에스더 레어드는 1968년 9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Ⅲ. 에스더 레어드에 관한 기사와 증언 모음

1. 웨슬리안 대학자료-선교사들 연례활동보고서(Year book)
-1936년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염소와 벌을 가지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나옴
-1937년 육아원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미스레어드가 직접 작년에 염소를 가지고 갔다고 기록


2. 빛의50년 - 1938년 간행된 미 여선교사들의 활동 보고서
그녀는 이 시설에 야학부, 소녀부, 부녀부를 세워 종교에 상관없이 교육을 받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육아와 아이들의 질병치료방법을 가르쳤다. 미국의 후원자들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원주 지역 여성들은 기독관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후원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3. 39년에 발행된 조선감리회 연회록- 당시 상황기록
나애시덕이라는 선교사가 원주기독관을 세우고 활동

4. 1940년 에스더레어드의 인사기록카드
일제가 한국의 선교사를 추방하자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베데스다 병원의 간호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진주만 공격이 시작된 후 에스더레어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는데 신시내티에
베뎃다 병원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고 자격을 취득했다”(대학동창 헬렌홀증언)
학점을 얻기 위해 과외로 봉사활동을 했는데 주로 자신의 요청으로 빈민가에서 일했다. 사실 꼭 빈민가에서 일해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서 얻은 경험이 나중에 한국에 돌아가 일할 때를 대비해 더 좋은 준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전기 제작을 위한 증언 중)

5. 1947년 발행된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 동문회보 기사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 상세히 기록- 45개 단체가 싱크대, 소독기, 응급조치 세트, 영사기, 작은 도서관 등이 장착된 차를 구입하는데 공헌했다.
45개 단체가 동원하여 의료용 차량을 만듦.
한국에서 봉사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정식 간호사가 되었고 한국에 가져갈 구급차와 물품을 가져가기 위해 1700달러 이상의 돈을 모금함으로 치밀하게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1952년 한국전쟁이 휴전상황에 접어들자 에스더 레어드는 곧 배편으로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는데 짐이 하도 많아서 운임을 천 달러나 물어야 했다. 그녀는 음식 약품 병원도구등 인동 진료차를 위한 것 이외에도 비타민 3000병 침대보, 병마개 등 천달러이상이나 되는 돈을 꾸어 서 수톤이나 되는 옷을 한국으로 가져갔다“(헬렌홀 증언)
한국사람들에게 이 짐들은 꼭 필요하나 것이라며 그 많은 짐을 가져가기 위해 돈까지 빌린 것이다.

6. 기독교 연합봉사회 이사회 회의록(1954년 1월 14일 제 10회)
감리회 여선교사로부터 초기발생 폐결핵 환자 정양원 시설할 것을 청원함에 있어 실행부 위원에게 기지선택을 적당한 곳으로 할 것을 맡기는 동사에 此를 허락한다

7. 1960년 에스더 레어드 인사기록카드
활동 보고서에 파킨슨 병으로 요양을 떠난 기록 남아있음. 56-57년 사이 3개월 홍콩에서 요양(오른손을 심하게 떠는 파킨슨 병)
작성일:2019-12-09 17:16:49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