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Maw Thelma B/2017210254/3학년 4반/정금성

닉네임
정금성
등록일
2019-12-10 16:22:10
조회수
712
첨부파일
 선교사2017210254.hwp (33792 Byte)
Maw, Thelma B. (마/모우숙/미국)선교사는 1916년 2월19일 미국 캘리포니아 출생하였다. 그녀는 버클리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49년 미연합 감리회 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리고 서울, 인천, 원주, 세브란스에서 물리요법으로 봉사하였으며 1982년 5월 귀국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녀의 가족사항이나 논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1946년 1월 17일에는 지난 남부대회의 결의에 따라 조선기독교회 기관지 기독교공보를 간행했다. 편집 겸 발행인은 김춘배 목사였고, 발행소는 기독교 남부대회 출판부였다. 초기 남부대회는 비교적 활발히 운영되어 나갔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그 지도자들이 일제에 부일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각 교파들이 제각기 자기 교파로 환원 독립하게 됨으로써 남부대회는 일시에 와해되고 말았다.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였던 기독교조선교단 회합에 참가했던 감리교 교역자들 가운데 이규갑, 변홍규, 김광우 목사 등이 조선교단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퇴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동대문교회에 회집하여 감리교회 재건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4월5일에는 3월에 개교한 감리교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중부 및 동부 연합연회를 개최하고 선언문을 발표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연합에 이관하기로 하고, 이를 제 3차 유엔총회의 의제로 상정하였다. 신탁통치문제를 포기하고 직접 독립방안을 가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련과의 마찰이 컸으나 결국 11월 14일 총회에서 “유엔 감시하의 한국 총선거안”이 가결되었다. 그 중요 내용은 공정한 선거를 감시할 목적으로 9개국으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고, 1948년 3월 13일 이전에 한국에서 동 위원단의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며, 선거 후 국회와 정부가 수립되면 90일 이내에 양 점령군이 철수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월부터 유엔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활동을 시작했으나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다. 이에 유엔은 다시 “총선은 가능한 남한에서만 추진한다”는 안을 가결하고, 미군정 당국은 1948년 3월 18일자로 총선거법을 공포했다.
한국은 6.25전쟁 중으로 선교사들은 수난을 받았다. 전쟁 전 38선 이남 지역인 개성에서 활동하고 있던 젠센과 젤러스, 스미스, 다이어, 로서 등은 전쟁 중 공산군의 포로가 되어 3년간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일제 시대 공주지역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내한해서 한국 군목제도를 창설하는 데 기여한 쇼 목사는 자신의 아들이 미해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수도탈환작전 중 서울 근교 전투에서 희생되는 슬픔을 겪었다. 전쟁과 전쟁 후 미국 감리교회는 해외구제위원회와 세계선교부(DWM) 등을 통해 막대한 선교비를 한국에 보내왔고 이 자금은 교회와 학교, 병원 등 기독교시설 복구와 웨슬리구락부, 십자군장학금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한 복지시설 자금과 일반 사회복지시설에도 교회 선교비가 지원되어 전후 복구 과정에서 큰 몫을 하였다. 한국 감리교회는 1960년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였다. 전쟁을 딛고 일어선 신앙인들의 재건 의지와 목회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교회 성장이 이루어졌으며 대규모 부흥 전도집회도 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웨슬리 신앙을 전도운동에 접목시키려는 취지에서 1974년부터 실시한 ‘5천교회 1백만신도운동’과 1987년부터 실시한 ‘7천교회 2백만신도운동’은 교회 개척과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해방 당시 5만 명 수준이던 교제가 1955년에 11만 4천 명, 1960년에 30만명, 1976년에 42만 명, 1979년에 59만 명, 1984년에 90만 명을 기록하였고 1988년에 1백만 명, 1994년에 1백 30만 명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 이후 기록적인 경제 발전과 인구의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교인 5천 명 이상을 보유한 교회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그래서 이런 대형 교회들은 막강한 경제적, 인적 자원을 국내외 선교와 사회 선교 영역에 부입할 수 있었다. 6.25전쟁으로 한국 감리교회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한편으로는 크게 부흥하는 계기를 얻었으니, 외국 선교비와 복구비를 바탕으로 감리교 낙후지역에 교회 개척과 목회자 파송이 이루어져 해방 전까지만 해도 감리교회가 들어가지 못했던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지역에 많은 감리교회가 개척되었다. 그 결과 1955년에 충남과 영,호남지역 교회를 관장할 ‘남부연회’가 조직되었고 다시 1967년에는 영,호남지역만을 떼서 ‘삼남연회’를 조직하였다. 6,25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년 11월 피난지 부산에서 특별총회가 열렸고 남북된 김유순 감독 후임으로 류형기목사를 선출하였다. 분열 4년 만인 1959년에 감리교회는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기는 하였으나 잦은 교회 내의 갈등과 분열과 합동 과정에서 교회 안에 지역과 인맥을 중심한 서클이 형성되어 계파정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4년 9월 3일 40개의 병상으로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 세브란스병원이 문을 열면서 한국의료사의 새로운 시기가 열렸다. 근대식 병원에서 의료의 질적 향상을 이루는 가운데, 세브란스는 기독교 의료의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게 되었다. 1904년 9월 두 번째 전담의사인 허스트가 부임해 옴으로써 세브란스 병원에는 2명의 의사가 함께 일하게 되었다. 허스트는 그때까지 10년간 혼자서 왕실 주치의로서 왕과 고관들의 건강 관리를 맡았던 에비슨을 돕는 부주치의로 임명되었다. 세브란스에서 일하던 간호사 실즈는 1906년 이래 간호사 양성학교의 일에 힘을 집중하였고, 외국인을 상대로 개인 간호사로서 뱁콕이 일을 했는데 1908년 5월 후임으로 버피가 내한했다. 세브란스는 병원과 의학교 그리고 간호학교 등 3개 기관에서 의료 및 교육사엽, 그리고 전도활동을 했다. 이런 활동은 점차 여러 부분으로 확장되어 1909년에는 부속기관을 포함해서 병원의 사업영역이 14개 분문으로 화장되었다. 1909년 교육령 개정이 되면서 세브란스는 에비슨의 신념에 따라 큰 원칙하에 운영되었는데, 여러 선교회가 연합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각주첨가
작성일:2019-12-10 16:22:10 121.168.15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