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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56 / McManis.Samuel.Easton(맹만수/M/미국) / McManis.S.E(부인)

닉네임
3학년5반 이수호
등록일
2019-12-10 17:08:22
조회수
79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McManis.S.E_3-5_B056_이수호.hwp (562176 Byte)
I. 기본사항
1. 이름 : McManis Samuel Easton(한국이름: 맹만수)
2. 생년월일 : 1891(미국 오하이오 윈체스터) - 1952년 12월 7일에 사망(묘소: 뉴욕)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북감리회
4. 학력 :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B.A.1920년)
신시내티 의대 졸업(1924)
St. Mary’s Hospital에서 인턴을 수료(1924년 1월~8월)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의 외과학(1929~)
5. 경력 : 1924.8.30. 샌프란시스코에서 미북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부인과 함께 내한
1925.2 원주 서미감병원(The Swedish Memorial Hospital) 원장으로 의료사업
환자 치료하며 전도, 한글교육 병행, 사경회 기간중에는 위생,
육아교육 등 계몽강연 실시, 간호원 양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임
1929.8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귀국, 병원 폐쇄됨
1957 서미감병원은 원주연합기독병원으로 재출발
6. 가족사항 : Marion Elizabeth Wallace[부인]- Christ Hospital School of Nurse을
졸업/ 원주에서 공중 보건과 유아 복지사업에 헌신


Ⅱ. 원주 서미감 병원

1. 서미감 병원(The Swedish Hospital)의 탄생 배경
첫째로 서양 열강의 선교와 의료에 불안감을 느낀 일제는 일본군 의사와 일본 육군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혜 의원을 춘천과 강릉에 설립하였다. 미국 남감리회의 진료소가 춘천에 이미 개원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로 원주는 의료 선교의 핵심 지역이었다. 아펜젤러의 말에 의하면 “선물을 가득히 든 거인의 손에 있는 보석처럼 보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Collyer가 1905년에 보고한 기록(Report of Chunchen Circuit, Mintues Meeting of MEC)에 의하면 “원주 지역이 대체로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산이 많은데 그래도 평야가 있고 토지가 비옥한 곳이며 큰 도시가 없는데도 인구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곳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셋째 선교 지역의 변화가 발생하였다!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 1892년 5월 23일 선교 지역의 분할 협정(우호 협력 규정)이 추진되었다. 1890년 상하이 선교 협의회의 규칙을 바탕으로 합동 회의가 시작 되었다(참석자: 게일 목사 부부, 빈톤 박사, 아펜젤러 목사, 기포드 목사, 올링거 목사). ‘교계예양’으로 명명된 선교 지역의 분할 협정은 미국 감리회와 미국 북장로회 협의에 의해 성립되었다.(1893년 2월 3일)
위와 같은 이유로 설립의 진행의 기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2. 서미감 병원(The Swedish Hospital)에 대하여
본래 이 병원은 1913년 앤더슨(A. G. Anderson) 선교사에 의해 「원주 서전 감리교 병원」으로 시작된 것인데 1921년까지 유지되었다가 폐쇄되었던 것을 맥매니스가 다시 연 것이었다. 이후 1929년 귀국하기까지 원주지방 의료선교사로서 큰 공을 남겼는데 그는 치료받는 환자들에게 전도하며 1925년 보고서(Korea Annual Report of MEC)에 따르면 맥마니스의 부재(언어 학교)시에는 세브란스 연합 의전을 졸업한 안 의사가 어려운 책무를 수행하였다.」라고 하였다.
즉, 한글교육을 병행하였다. 사경회 기간 중에는 위생이나 육아교육에 대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으며 특히 간호원 양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한 산모에게 10일 이상 방문하여 산모와 영아 보건 관리에 대한 시범 교육을 실시하였다. 지역민에게 위생 관념이 생겼으므로 예방적인 건강 검진을 받는 사람이 많았다고 기록하였다. 맥마니스의 아내는 공중 보건과 유악 복지 사업에 헌신하였다.
1929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후 맥마니스 부부는 다시 나오지 못했다. 한편 그가 귀국하면서 서미감 병원은 다시 폐쇄되고 말았으나 1957년 미 감리회와 캐나다 연합교회의 연합으로 오늘의 「원주연합기독병원」으로 재출발하였다.


3. 서미감 병원의 의료진
서미감 병원에 근무한 서양인은 5명이다. 초기에 운영한 선교의사 안도선(A. G. Anderson)의 부부와 맹만수(McManis. S. E.)부부 그리고 마취 업무를 담당한 레퍼트이다. 맹만수의사와 관련된 중요한 인물 중 안사영은 1925년 2월부터 서미감 병원에 근무하면서 내과 진료를 담당하였다. 또한 맥마니스 보고서(1925년 7월)에 의하면 그는 진료 외에도 사회 사업에 매진하였으므로 지방 인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언급하였다.
특히 함께 일하던 한국인 의사 안사영은 1925년 10월에 청년회를 조직하였고, 신간회(원주)를 준비하였다. 그는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사회 운동을 펼쳤다.
한국인 의사는 윤선옥, 이은주, 김봉열, 외과의사 이상옥과 김영석 조교가 함께 일하였다.

Ⅲ. 한국 의료 선교의 시대적 구분

억압속의 성숙기(토착화 모색기, 1924-1940)
일제는 1920년대에 문화 정치를 실시하였으므로 기독교 의료 사업의 탄압이 다소 약화되었다. 일제는 세브란스 의전을 총독부 지정학교(1923), 일본 정부 문부성 지정학교(1934)로 인정하였다. 세브란스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의사 면허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선교 본국에서 선교의 열기와 헌신자의 기부가 감소하였다.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재정이 감축되어 의료 사업은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선교 병원은 20~30개의 수준을 유지했지만, 도립 병원은 27개(1920년)에서 56개(1940년)로 증가하였다. 환자가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찾으면서 외래 환자는 줄기 시작했고, 선교 본부의 재정 지원도 감소했다. 세브란스 병원의 무료 환자 진료는 1920년대의 45-50%에서 1940년대 초반에는 10% 정도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1923년 미국 북장로회는 의료 사업의 철폐를 제안함으로써 의료 선교사는 1924년에 의료 선교의 존폐를 논의하였다. ‘기독교 의료 사업은 계속 유지되어야 하며. 한국인 의료진을 양성하고 한국 교회의 자생력 확보 및 의료 사업을 한국인에게 이전하는 작업을 조속히 시행한다’는 새로운 정책이 채택되었다. 의료 사업의 주체를 선교회와 선교사에서 한국 교회와 한국인 의료진으로 이전되었다. 세브란스를 중심으로 배출된 한국인 의료진의 역할이 증가되었다. 미국 남장로회의 의료 선교사는 5명 내외로 변함이 없었지만, 한국인 의사는 4명(1910년 후반)에서 10명 (1940년 초반)으로 증가하였다. 1930년의 후반기에 평양 연합 기독 병원은 14명의 의사 중에 12명이 한국인이었다. 1920~1930년대에 선교 병원은 선교회의 재정 지원 축소에 따라 시설 확장과 진료 인원이 감소했다. 그러나 한국인 의사들이 새로운 주체로 성장하였으므로 ‘억압속의 성숙기’ 또는 ‘토착화 모색기’라고 지칭한다.
무료 진료의 확대, 무의촌 지역에 대한 병원 설립과 공중 보건, 계몽 활동을 강화하여 기독교 의료 사업의 본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30년을 기점으로 극심한 재정난에 의해 기독교 병원의 의료 실적은 급격히 감소하였지만 1930년 중반부터 증가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의료 선교사의 조수 역할을 담당한 한국인 의사들이 독자적인 의료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국 교회와 병원의 후원회를 조직하여 건물 신축의 추진과 같은 한국인의 기여도가 점차 높아졌다.


Ⅳ. 맥마니스의 편지
4년(1925~1929)의 의료 선교 후에 미국에서 휴가 도중에 보고한 맥마니스의 편지를 소개한다. 미국에 도착한 직후(1930.6.1.)에 선교회 본부의 간부에게 보낸 내용이다. 서미감 병원의 폐쇄가 눈 앞에 보이는 분위기이며, 한국 의료 선교의 현황과 선교회 본부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본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원주 서미감 병원의 재개원은 선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맹만수(McManis. S. E.) 의사의 고집스러운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원주 서미감 병원의 재개원은 기쁨과 은혜를 제공하는 것이며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은 희망적이며 계산할 수 없는 무한한 가치라고 하였다. 본국의 선교회와 현지 사역자의 견해 차이에 의해 발생한 상황을 통해 본국의 선교회는 힘을 잃고 정체된 사역을 보면서 재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 것이고 사역을 유지하기 위한 업무에 매달리겠지만 풍부한 경험을 가진 다수의 현지 사역자의 의견을 거스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 판단은 최고의 섬김을 이끌어 내거나 기관의 안녕을 저해하는 애매한 상황으로 몰아갈 것이다라는 것이다. 끝으로 맹만수는 한국이 원하는 미래의 의학적 요구는 의료 선교를 담당하는 선교회의 개념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의학 교육 기관의 설립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Cartright 박사에게 편지 하였다.
작성일:2019-12-10 17:08:22 211.211.176.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