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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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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Wilson, Thomas W.(18871-1958, SA) / Wilson, Ausust Mardell(미상, SA)

닉네임
최현혜
등록일
2019-12-10 22:58:09
조회수
88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55_최현혜.hwp (829952 Byte)
내한선교사 / B155 / Wilson, Thomas W.(18871-1958, SA) / Wilson, Ausust Mardell(미상, SA)


Ⅰ. 기본사항

1. 이름: Thomas W. Wilson / 윌슨 / 한국명: 위일선(魏一善)
2. 생몰연도: 1871-1958.12.26
3. 출신 및 소속: 영국 / 구세군(救世軍, The Salvation Army, SA)
4. 한국선교기간: 1936-1940
5. 연표
1899 영국 에니스킬른 군영에서 사관에 임관, 영국에서 6년간 봉사
1906 일본구세군 청년부 서기관으로 7년간 봉직 후 귀국
1926.1 아프리카 케냐 군군사령관으로 8년간 헌신
1936.5.8. 한국사령관으로 내한하여 농촌 중심으로 목포, 광주, 부산, 포항, 신의주, 평양 등지의 지방으로 구세군의 진영 확대, 영동병원 설립, 여객지우 설치
1940.12 귀국하여 심령부흥에 힘씀
1952 부인 소천, 부인의 소천을 계기로 서대문 영문(현 구세군 본영)에 회개석을 헌납함.
1958.12.26. 소천
6. 가족사항
부인: Ausust 원래 이름은 ‘August’인데, 『내한 선교사 총람 (수정 증보판)』에서 오타로 ‘Ausust’로 기록된 것으로 보임.
Mardell Wilson



Ⅱ. 선교사 소개: 위일선(Thomas W. Wilson, 1871-1958)

1. 구세군의 역사 및 구세군의 한국 선교
구세군은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Heart to God, Hand to man)란 말을 자주 쓰면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단체이다.

구세군은 19세기 후반에 퀘이커교와 감리교의 연장선 위에 출현하였다. 구세군의 창립자는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인데 퀘이커교와 감리교의 창립자를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부스는 부인 캐더린(Catherine Booth, 1829-1890)과 함께 가난한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런던지역의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동런던선교회(East London Mission)를 설립하였고 이를 1870년에 기독교선교회(the Christian Mission)로, 1878년에 구세군(the Salvation Army)으로 변경하여 교단을 설립하였다.

당시 영국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기였으므로 영국의 군대 조직을 흠모하고 모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구세군은 군대 조직을 모방하여 브라스 밴드를 이용하여 파격적인 선교를 했는데 이것은 최하층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이유가 되었다.

구세군은 일본에서 1895년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공창폐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구세군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08년 10월인데,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을 계기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국과 일본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구세군이 들어온 지 2년 채 안되었을 때 한국이 일본에 합병 되었다.

구세군이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 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과 일본이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국제정세의 변화로 영일관계가 멀어졌다.
1926년 허시모 사건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을 때, 구세군 제2대 대장 브람웰 부스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목회자들이 구세군 내부의 문제점을 전하려 했지만, 외국인 선교사들의 방해로 공식적으로 제출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 목회자 상당수가 구세군으로부터 제명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구세군 외국인 선교사들은 인종우월주의에 빠져 한국인들을 업신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말기에 한국 구세군은 영국 구세군 국제 본영으로 이탈하여 별도로 활동하면서 일본 구세군으로부터 지휘, 감독을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에 일본 구세군과 마찬가지로 국제본영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했고 미국 구세군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2. 한국 구세군 역대 사령관 7대 참장 위일선 (1936-1941)의 일대기

위일선 선교사는 1899년 영국 에니스킬른 군영에서 사관에 임관되었으며 이후 영국에서 6년 동안 봉사하였고, 1906년 일본에 건너와 일본 구세군 청년부 서기관으로 7년 동안 봉직하였다.
잠시 영국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일본에 돌아와 구세군 의용단원 지휘자 및 전장 서기관으로 봉직하였다. 일본에서는 총 21년간 사역하였다. 1926년 1월에는 아프리카로 전임, 케냐 군국사령관으로 승진되어 8년 동안 헌신하였고 1936년 5월 한국사령관으로 파송 받아 부인과 함께 내한하였다.
위일선 선교사는 낙후된 농촌 중심의 한국 구세군을 도시권에로 확장시키기 위해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남쪽의 목포, 광주를 비롯하여 부산, 포항, 진주, 북쪽의 신의주, 평양, 청진, 성진 등지의 지방에까지 구세군의 진영을 넓히는 업적을 남겼다.
위일선 선교사는 구세군 사관학교 학생 숙사를 개조하고 군국사업 1년 계획표 및 매년 표어를 작성하여 공표하는 등 한국 구세군의 대 개혁기를 몰고 왔다. 이 기간 동안에 위일선 선교사는 영동병원의 설립과 부산여객지우를 설치하였다.
1938년 이후 신사참배 강요 및 제2차 세계대전의 확대로 구세군도 박해를 받음에 따라 1940년 12월 본국으로 돌아갔으며 고국에서 순회부장으로 심령부흥에 힘썼다. 1956년 그의 부인이 별세하자 그 기념으로 서대문역에 회개석(悔改席) (구세군 교회에 있는 독특한 의자이다. 나무로 된 장의자 등받이 안쪽에 ‘속죄’ ‘화평’ ‘성결’ 세 단어가 새겨져 있는 회개석은 강대상 아래에서 회중석을 바라보게 놓여 있다. 의자처럼 생겼지만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리이다.)을 헌납하였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위일선 선교사는 1958년 12월 26일 별세하였다.

3. 위일선 선교사의 한국 선교
당시 한국의 상황에 의해 한국 구세군의 역사는 일본 구세군과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일본에서 21년이란 상당히 오랜 기간 선교했던 위일선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할 때도 일본에서 활동했던 경험들을 살려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일선 선교사는 한국에서 1936년에서 1940년 동안 선교 활동을 했다. 매우 짧은 기간이지만 그 사이에 한국 구세군의 여러 기틀과 업적들을 남겨둘 정도로 활발하게 사역하였다.
사령관 참장(Lt. - Commissioner)으로 임명 된 위일선은 1936년 5월 14일 목요일 오전에 사령관에 도착하여 사관회를 인도해 사관들의 심령에 많은 복과 큰 감화를 끼쳤다.
그가 구세군에 세운 첫 번째 표어는 ‘세계를 주께 인도하자’였다. 그에 따라 한국 구세군은 ‘조선을 주께로’(1936)란 표어 아래 영혼 구원에 힘썼다. 위일선은 1936년 2월 1일 종전의 대한제국의 계급 명칭을 일본 군대계급 명칭을 따라 개칭하였다.
이것은 당시 한국 상황이 일제 강점기의 가장 극렬한 탄압을 받던 시기인 사회 분위기와 위일선이 일본에서 오랜 기간 사역한 것을 전제하고 평가해야 한다. 위일선은 일본과 한국이 합병된 나라로 인식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한국인들이 독립을 원하는 것을 억압하거나 반대하지는 않았다.
위일선의 부인은 위일선과 함께 심령 부흥에 힘썼고, 사령관의 경성시내 순회를 따라 경성시내 영문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위일선 사령관은 7월 9일 함남 안변군 구고산에 있는 사립 대흥 학교의 낙후된 건물을 새로 신축하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10월에는 부산에 여객의 벗이라는 시설을 개설하고 일제 상황에서 20세 미만의 사람이 결혼한 후 생활로 인하여 남편은 일본으로 가고 여자는 조선에 남아 있어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4,5년 지나다가 부산까지 내려와서 여비조차 떨어져 방황하는 여인이 많았다. 이들을 돕기 위해 구세군에서는 여객의 벗이라는 시설을 개설하여 그 여인들을 보호한 것이다.
이를 통해 위일선이 당시 일제 감정기라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일선이 세운 두 번째 표어는 ‘일어나 함께 건설하자(1937)’다. 이에 맞춰 위일선은 13개의 매일 학교를 설립하고 관인 사립학교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외된 지역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구세신문이 낙후된 지역까지 구세공보를 전하도록 했다.

1937년 1월 1일부터 지방, 영문, 지방관, 영문사관이란 명칭을 국제 본영에 상정하여 참모 총장이 결정하였고 소대, 대대장, 소대장으로 개정했다. 1937년 7월 1일부터 조선군국내 지방 명칭을 바꿨는데 이 같은 개정은 당시 위일선 사령관이 일본에 근무했을 때 받은 영향 때문에 조선 구세군에 일본식 용어 개정을 적용한 것이었다.
위일선 사령관은 4월 5-8일 사관학교에서 대대장 회의를 인도하고 8일(목) 오후 8시에는 사관학교 강당에서 연합병사회를 인도하고, 9일에는 일본인 사관회 미 병사회를 인도하였다.
사령관은 각 지방을 순회하여 11월 7일 주일부터 14일 주일까지 전국에 영적 각성운동을 전개하였다. 11월 구세신문에 처음으로 일본어 사용 기재를 시작했는데, 1945년 구세단 시대를 마치면서 끝났다.
위일선이 세 번째로 세운 표어는 ‘따라 따라 예수 따라(1938)’였다. 그는 조선 선교 30주년을 기념하여 구세군 찬송가를 발행했다. 위일선은 대도시 중심으로 구세군의 활동 영역을 옮겼다. 당시 구세군의 사회활동은 조선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후생학원의 브라스밴드는 조선 최고의 밴드로 인정받고 있었다. 10월 8일 충북 영동에 구세군 영동병원을 건축하기로 결정되어 공사에 착수하고 충북도지사 김동훈의 사식 하에 위일선 사령관은 정초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위일선이 네 번째로 세운 표어는 ‘위기 속의 전진(1939)’였다.
구세군은 집 없는 젊은이들과 장년을 위한 노숙자 야간 숙박소를 서울 후생학원 구내에 설치하여 3달 동안 운영하였다. 그동안 3,581명이 숙박하고 4,016명에게 따뜻한 음식이 제공되었다.

위일선이 마지막으로 세운 표어는 ‘기틀 잡힌 사회사업(1940)’이었다. 최초 영동병원을 건립하고, 리처드슨 대위(Captain Dr. Richardson)의 감독아래 봉사를 하였다.
1940년 12월에 위일선 사령관은 일제의 탄압으로 영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940년 일본 구세군은 일본 정부에서 국제적인 관계를 단절하라는 강요를 받아 새로운 이름과 형식을 채택하도록 했으며 군대식 용어사용과 제복 착용이 금지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구세군도 일본 구세군에 통합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위일선 선교사는 36년 반 사관으로 봉직한 바 6년 반을 영국에서, 21년을 일본에서, 8년 반은 아프리카에서, 5년을 한국에서 근무하였다. 영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그는 심령 부흥에 힘썼다.

4. 위일선 선교사와 1938년 구세군 사관학생들의 신사참배 거부 사건

1938년은 위일선 선교사가 내한 한지 3년째 되는 해이다.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발전시키면서 조선총독부는 1938년 전국교회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기도하라고 강요했고 불응자 2천명을 투옥시켰다.

구세군 사관학생들은 신앙의 이유로 인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압박은 더욱 심해져 갔다. 김성활 정령은 구세공보에 따르면 구세군이 1940년에 신사참배에 순응하였음을 말해준다.


“구세단이 시작된 직후 비록 강압에 의한 것이요 역부족이었다고 할지라도 1940년 11월 10일에는 교사(사관)와 단원(교인) 일동이 신사참배를 했다.”

대구의 사관회에서 위일선 사령관이 남편 노천도 사관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진보유치장에서 구류를 살고 있었다. 그의 부인 최남선 원로정교에게 위일선 선교사는 ‘얼마나 수고하느냐?’ 며 위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증언에 따르면 위일선 선교사는 당시 신사참배에 반대해 압제 당하고 있던 한국인들을 세심하게 돌보고 있었다.

조선 구세군 개전 30주년 기념일에도 일본의 지배적인 조건에 의해 국군총회가 보류되었다는 기록이 재무서기관 뉴먼 참령 부인이 미국의 친구에게 전쟁의 위협에 대해 편지하면서 알리고 있다.
성장하기 어려운 시점에도 위일선 사령관은 구세군 사역을 강화하며 재임기간에 14개 도시에 영문을 설립하고, 서울 영문을 3개에서 6개로 증가시켰다. 충북 영동에 구세군 병원을 건설하였다.
1940년 10월 16-23일간 사카모토와 함께 일본에 가서 한국 구세군 개편문제, 고문임명 등을 논의하였다. 1940년 10월 29일 황종률 정령보(황종률은 1940년 5월 1일에 전장서기관에 임명됐었다)가 사령관에, 사카모토 라이지 참령이 총무서기관에 임명되고 위일선 참장은 자문위원으로 남았다. 그러나 10월 30일 황종률과 사카모토는 총독부 학무국에 구세군 개편을 제한하였다.
전쟁의 위험을 생각할 때 위일선 선교사가 한국인을 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매우 획기적인 시도였다. 조선인 사관들이 이 임명은 조선 구세군 조선사관들에 의해 전진하는 것이라 말할 정도로 기뻐하였다.

1940년 모든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일본의 반미 반영정책에 의해 선교사 축출을 단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위일선 참장이 재임한 동안 한국 구세군은 불규칙적인 성장의 패턴을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이후 일본 구세단에 속하므로 영국 본국과 단절된 상태에서 구세군의 공식적인 성장은 기록되지 않았다.

1942년에 완공되어 종합병원으로 개원한 영동 구세병원은 근대 의료시설이 낙후한 영동지역의 의료 혜택을 베풀었으나, 구세군이 일본의 2차 대전에 협조하지 않아 강제 폐쇄됨에 따라 구세병원 역시 일본의 소유가 되었다.
위일선 선교사는 혹한기라 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기에 한국 구세군 선교를 놀라울 정도로 부흥시키는 다양한 사역들을 펼쳤다. 비록 일제의 탄압이 심각해져서 영국으로 귀국해야 했지만, 위일선 선교사는 일제의 억압 아래에서도 한국 구세군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한국인을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결단을 내리면서까지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후 위일선 선교사의 부인이 별세한 뒤, 위일선 선교사는 한국 서대문 본영에 회개석을 헌납했다. 그만큼 위일선 선교사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작성일:2019-12-10 22:58:09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