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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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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Lee, Albert William(1893-1950(?), ANG)

닉네임
윤주환
등록일
2019-12-10 23:39:32
조회수
894
내한선교사_3-4_B039_윤주환


이도암 신부 / Lee, Albert W.(1893-1950(?))

I. 기본사항

이름: Lee, Albert William / 리 / 한국명: 이도암
생몰연도: 1893-1950
출신 및 소속: 영국, 성공회
한국선교기간: 22년
연표
1893. 영국 출생
1919. 더람대학교에서 L.Th.학위 수여
1920.6.25 성공회 부사제로 서품
1920. 한국 선교사로 파송
1921.9.25 사제로 승품
1924. 충북 진천성공회의 주임 신부로 부임
1926. 충북 음성성공회 주임 신부로 부임
1928.11 성공회 신학교(인천 성미카엘신학원) 부원장으로 부임
1947.8.29. 귀국(귀국 일정은 정확히 모름) 후 다시 내한
1948.1.8. 제 4대 성공회 신학원 원장에 취임
1950.7.25 공산군에 끌려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

가족사항알려진 바 없음.


II. 선교사 소개: 이도암 신부 / Lee, Albert W.(1893-1950(?))

1. 한국의 신학 정립을 위해 애쓴 이도암신부
이도암신부는 1920년 한국의 선교사로 파송받은 후 20여년 동안 성직자 양성을 위한 활동에 헌신하였다. 1924, 1926년 충북 진천성공회, 추북 음성성공회의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1928년 트롤로프(조마가)주교의 주도로 다시 개원한 성공회신학대학(성미카엘신학원)의 부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일본의 탄압으로 폐교를 하게 되었지만 1948년 해방 후 다시 개원하면서 이도암신부가 제 4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를 통해 많은 성직자가 철학, 세미나, 사제 수지, 묵상 등을 교육을 받았고, 한국의 성공회 신학을 정립하고 후학을 세우는 일에 크게 쓰임 받았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고, 한국의 신학 정립을 위해 활동했던 그의 업적이 이제 분명 빛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도암은 그밖에도 평신도를 대상으로 신학교육(강습회)을 하기도 했다. 당시 주교였던 쿠퍼(구세실)는 조선 13도 전체에 대한 1930년대까지의 선교결과와 미래의 전망을 하면서, 전국에 교회를 위하여 봉사할 평신도에 대한 명예전도사를 세우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전국에 강습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도암신부의 주관 아래 사제인 윤달용과 부제인 조용호가 강사로 섬겼다. 남한지역의 제1회 강습회는 1933년 1월9일-21일까지 14명을 대상으로, 제2회 강습회는 1933년 2월6일-19일까지 15명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며, 북한지역의 경우는 제1회 강습회가 1934년 3월5일-10일까지, 8명을 대상으로, 제2회 강습회는 1934년 3월17일-23일까지 성천, 순천, 백천 지역의 명예전도사 15명을 대상으로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2. 성공회 신학교(성미가엘신학원)
성공회신학대학의 역사는 1914년 경기도 강회에서 개교했던 성미카엘신학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14년 4월 30일 조마가(트롤로프)주교는 허세실(허지스) 신부를 초대원장으로 하여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과 영성훈련을 목적으로 이 학교를 설립하였다. 1915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야 하는 어려움을 겪다가 세계 제1차 대전 중에 첫 휴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트롤로프(조마가)는 1928년 11월, 젊은 사제들을 세우기 위해 신학원을 다시 개원하기로 하고, 아놀드(안을도)를 원장에, 리(이도암)를 부원장에 임명하였다. 그 결과로 1929년 2월 24일에 4명의 차부제들이 부제성직을 받게 되었다. (김영호, 윤달용, 박병무, 임인재) 이후 많은 대한 성공회의 많은 성직자들이 신학교를 통해 배출되었다.

3. 신학원의 폐교 그리고 이도암신부의 귀환
일제 강점기 일본은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성공회의 쿠퍼(구세실)는 이것이 ‘국민의례’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본 황제에 대한 희생과 기원을 받치는 ‘종교적 행위’라고 해석하면서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1941년 이후 성공회는 비교적 경제적인 어려움은 크지 않았지만, 일본의 종교적인 탄압만이 아니라, 대동아공영을 내세우면서 ‘내선일체’의 정책 아래 신앙적 고난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940년 3월 13일 성공회 신학원은 폐교되었다. 신학교가 폐교되고 선교사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챠드엘(차애덕)선교사가 투옥되고 선교사 탄압이 시작되었다. 1941년 1월20일 쿠퍼 주교가 한국을 떠나고 일본인 사제인 구도 신부가 한국 성공회 총감독이 되면서 암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외국선교사에 대한 강한 압력으로 이도암신부도 휴가를 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945년 8월 15일, 때가 왔다. 쿠퍼(구세실)은 오랜 인내와 기도 끝에 마침내 1945년 3월 말에 영국을 떠나 4월 19일 한국으로 귀환했다. 성공회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6년간 신학원이 폐쇄되었기 때문에 새 성직자를 배출한다는 것은 당상한 기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 성공회 신부들의 편지를 실는 ‘모닝캄’의 편집장이 한국 교회를 위한 기도를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상황은 비록 절망적인 것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은 결코 하느님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우리의 길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기도입니다. 제가 제외하려는 것은 일상기도에서 한국을 위해 기도해 주실 뿐아니라 할 수 있다면 매일 정오에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기도 운동 아래 1947년 8월 29일 이도암 신부가 영국에서 다시 돌아왔다. 성미카엘신학원 건물은 한국경찰대가 임대하여 사용해 왔기 때문에 다시 신학교 개원을 위해서는 상당한 수리를 필요로 했다. 결국 부분적인 수리를 하려 1948년 4월 20일, 부제성직을 준비하는 강준희, 심흥섭과 전도사로 일하고 있던 이천환 등 3명의 학생으로 다시 개원하였다. 강제 폐교된 이후 8년 만에 성공회 신학교는 다시 개원하게 되었고, 이도암 신부와 조용호 신부가 교수로 목회자를 양성하였다.

4. 이도암신부의 수난과 순교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의 한국동란은 5명의 사제와 1명의 수녀가 공산군에 체포되어 순교하는 등 대한성공회에 큰 수난을 안겨주었다. 이원창(미카에) 신부가 평양에서, 윤달용(모세) 신부와 홍갈로 신부가 서울에서, 조용호(디모데)신부와 이도암 신부는 인천에서 그리고 마리아 클라라 수녀가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하여 체포되어 서울과 또한 북쪽으로 끌려가는 가운데 순교하였다.
이도암 신부는 6.25가 터지자 다른 교파의 선교사들은 모두 피신하였으나, 자신은 주교의 지시가 없으니 신학교를 지키겠다고 하며 남아 있었다. ‘모닝캄’의 보고에 따르면, 선교사들이 서울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지킨다’는 목회적으로 ‘당연하고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1950년 7월 25일, 인천에서 이도암 신부와 조용호신부가 체포되었다. 그 후 1주일 만에 서울로 압송된 후 그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 이도암 신부.

▲ 성공회신학교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는 역대 원장 사진 중

▲ 1928년 인천 성미카엘신학원에서 강의하는 이도암 신부.

▲ 1948.12.19. 심바울로 부제, 이도암 신부, 이바울로 차부제, 강에단 부제와 구세실 주교

▲ 1921.9.29. 인천 성누가병원으로 옮긴 성미카엘신학원, 위 사진은 9월 30일 신학원을 축성한 조마가 주교와 이도암 신부, 신학생들의 기념촬영이다.

▲ 이도암, 강베드로, 이미카엘 씨의 서품기념 촬영 (중간줄 왼쪽부터 홍갈로 신부, 이도암 신부, 조마가 주교, 강희선 부제, 이원창 부제, 구세실 신부).

▲ 이도암 부제가 사제로, 강베드로와 이미카엘 씨가 부제 신품을 받은 후 강화읍교회 경내를
순행하고 있다.

▲ 1914년 강화 신학원의 모습.

▲ 1914년 9월, 강화 신학원의 초기건물 모습. 당초에는 6명의 원생을 수용한 숙소다. 1921년 수녀원 이전 후 여학교, 서당 등 교육집회로 이용, 후에 전도부인 사택으로 활용

▲ 강화도 신학원 채플의 내부 모습.

▲ 1937년 전도사 교리과정.

▲ 1953년 파괴된 인천신학원 및 이도암신부 사택.

▲ 1923년 7월10일 음성교회 사제관 앞에서.

▲ 이도암 신부가 곧 청주로 옮기게 됨을 알림. 교회월보 1924년 6월.

▲ 이도암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간 이유 1925년 7월호.

▲ 이도암 신부가 청주교회를 조직했음을 알려줌 교회월보 1924년 12월.

▲ Albert Lee (이도암 신부 사제서품) 1921년 9월 25일.

▲ 부제서품증.

▲ 사제서품증 1.

▲ 사제서품증 2.

▲ 승인증명서


IV. 참고문헌

[단행본 및 논문]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대백과사전」 제5권, 1982.
대한성공회 강화 선교100년사 편집위원회, 「강화 선교백년사」, 1993.
대한성공회 출판부, 「사진으로 본 대한성공회 백년」, 1991.
이재정. 「대한성공회 백년사(1890-1990)」, 1990.
대한성공회 출판부, 「선교 백년의 증언(대한성공회 선교100주년 회고록」, 1990.
대한성공회 출판부, 「대한성공회 관구요람」, 1993.

[웹사이트]
한수당, 1950년 순교한 분을 위해 1990년 세워진 순교추모비
블로그, 피살.납북된 목사 신부등 358명 명단 발굴

[직접 방문]
성공회대학교 역사자료관
박정숙(모니카) jspmonica@hanmail.net
작성일:2019-12-10 23:39:32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