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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A014 / Gale, James Scarth(1863-1937, YMCA, NP) / Gale, Ada S. Sale

닉네임
여인구
등록일
2019-12-12 18:41:13
조회수
92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A014_여인구 조형래.pdf (3678336 Byte)
기본사항

이름 : James Scarth Gale / 게일 / 한국명: 기일(奇一)
생몰연도 : 1863.2.19. - 1937.1.31.
출신 및 소속: 캐나다,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기간 : 1888.12.12. - 1927.6.22.
연표
1863.2.19. 캐나다 온타리오주 알마에서 6남매 중 5째로 태어났다.
1884 토론토 대학에 입학
1885.5 프랑스파리로 건너가 선교기관(McCall Mission)에서 6개월 보냄
1886 북미 하령회에 참여해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선교할 것을 결심
1888.12.15. 토론토대학 기독청년회(YMCA)의 지원을 받고 부산에 도착
1889.3 황해도 소래에서 평생의 조사 이창직을 만나 한글, 한문, 풍습 공부
내지 답사를 겸한 순회여행을 시작.
1889. 8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이주 초량거주
1891.8.31 토론토 대학 청년회 해체 미국 북장로 교회로 전직
1892.4.7. 헤론의 미망인 “해리어트”과 결혼하였고 원산지방에서 활동.
성서번역에 참여, 마태복음, 에베소서등 신약성서 일부 번역.
1893. 게일의 『사과지남』
1894.4. 그리스도신문 주간으로 시작 기독신보로 바뀐 뒤까지 10년간 주필로 활동
1896. 일본잡지 “조선문명사”를 간추려 기고
1897.5 『한영 자전』 출판. 『신·구약 성서』 『천로역정』 한국어로 발간
미국 북장로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음
1898. 미국에서 『Korean Sketches』 발간
1900.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창립에 관여하여 간사로 봉사
1900.5. 연동교회에서 선교활동을 시작
1901. 경신여학교 경신학교를 통해 새로운 교육기반 구축
한국성교서희 회장, 황성기독청년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씀
1904.5.31. 미국 하워드대학교 명예신학박사 학위 수여 받음
1908 첫 부인 해리어트 사망,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1908,1910) 선출
1910.4.7. 아다 루이사 세일(Miss Ada Louisa Sale)과 재혼
1916. 한국의 역사와 문화, 문학을 연구하고 집필
1917. 음악연구회 조직 찬송가 개편에 힘씀
1922. 김만중의 『구운몽』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
1925. 한국 최초의 사역으로 (신·구약)전서를 출판
1937,6.22 한국을 떠남
1937.1.31. 74세를 일기로 사망

가족사항
1) 부인: Harriet Elizabeth (1860-1908)
2) 부인: Gale, Ada Louise Sale ()
3) 자녀: Vivian Scarth Gale (1916-1917)
루이스 사이에서 출생한 2세, 2남 1녀 중 둘째 아들

Sarah Anne Heron Gale, Jessie Elizabeth Heron Carroll
존 헤론 미망인 첫 부인 해티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나 전 남편 존 헤론
사이에서 두딸, 사라, 제시가 있었다. 큰딸 사라는 성장하여 J.S.게일의 조카
에손 게일과 결혼하였으며 그들 사이에서 제임스 M. 게일(Gale James M.) 낳는다.


선교사 소개: 게일 (James Scarth Gale, 1863-1937)

개신교 1세대 선교사로서 가장 한국 문화와 문학을 잘 이해하고 특히 한국 문학, 조선시대 문집을 읽으면서 한국 최고의 수준 높은 문학을 이해한 선교사가 바로 게일이었다.
영어권과 한국 문화권을 연결시키는 거의 유일한 선교사가 게일이었다.
게일은 조선을 복음화 하기위해서 그리고 조선 사람을 배려했기 때문에 수단이 되었던 언어만을 익힌 것이 아니라 조선의 문학, 역사 조선 전체에 대한 이해는 결국 조선화가 무엇이었는지 게일이 꿈꾸었던 조선화가 무엇인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준다.


Ⅰ. 제임스 게일의 삶과 선교활동

게일은 스코틀랜드게 이민자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서 6남매중 5섯째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며 청년시절부터 선교사로서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1884년 토론토 대학에 입학해 인문학을 공부하며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게일은 토론토대학교 YMCA 선교위원회를 통해 1888년 독립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파송된다. 하지만 얼마 후 그를 파송했던 선교부가 해체되며 제정지원이 중단된다. 마펫 선교사의 초청으로 1891년 8월 미국 북장로교선교사로 임명된다. 이후 안식년과 동시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그는 한반도 곳곳 선교여행을 다니며 조선 땅에서 펼칠 선교 여행의 길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흑암에 땅에 복음의 빛을 전하고자 숭고한 소명을 안고 멀고먼 조선에 발을 내딛은 이방인이었으며 격동의 시기에 이 땅에 찾아와 그 누구보다 조선인을 사랑하고 조선인의 마음을 닮고자 했던 사람이 제임스 게일 선교사였다. 40년 동안 조선인으로 이 땅에서 사역했다. 게일은 한국최초로 편찬된 한영사전 총 3만5천자의 어휘가 담긴 첫 한영사전에서부터 7만 5천개가 담겨있는 3차 한영사전까지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다. 게일의 한영사전은 현재까지 한영사전의 모체가 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선교역사에 있어 조선 정부는 기독교가 자국의 오랜 관습과 법규를 위협한다 판단하여 1883년 예수교 전도를 금지하는 금교령을 선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전도의 뜻을 굽히지 않고 한반도 전역에 복음을 전한다. 게일은 조선에 온지 1889년 3월 정동을 떠나 황해도 소래로 떠난 게일은 먼저 조선인의 삶과 조선인의 심성을 닮기를 원했다. 게일의 코리언 스케치에서 그는 조선에 대한 압도됨을 잘 기록하고 있다. 유교의 옛법과 오래된 전통을 이해하고자 했고 스스로 깨우치고자 했다.


게일이 누이에게 쓴 편지

“조선에 있는 몇몇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을 자기들과 같이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조선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조선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된다 해도 여전히 조선 사람이며
동시에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게일은 스스로 조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가장 알맞게 복음을 전하고자 노력했다. 게일은 조선에 있으면서 순회한 일이 27회나 된다. 이것은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굉장히 많이 이동했고 이것은 게일이 마음속으로 한국의 역사, 관습, 민속, 문화, 문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고 이것은 조선을 깊이 알자는 의도가 게일에게 있었다.
게일에게 있어서의 조선화는 단지 조선 문화와 조선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게일은 진정한 조선화였다. 다른 선교부에서는 왕실에 초점을 맞추고 양반층에 초점을 맞춰서 위로부터의 선교를 이루려 하여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전하기 위한 선교에 관심이 있었지만 게일의 경우에 그의 조선화는 밑으로부터의 조선화를 실행했다. 당시 외국인이 많이 모여 있는 정동대신 게일은 스스럼없이 소래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소박한 조선사회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만났고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읽어 나갔다. 게일은 소래를 떠나며 사진을 남겼을 정도로 게일은 소래 사람들을 사랑했고 소래 사람들 역시 게일 선교사를 누구보다 사랑했다.

19세기 서울의 정동은 서양화된 상류 사회였다. 하지만 제임스 게일은 낮은 곳에서 헐벗고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복음을 전하고자 호화스러운 정동을 떠나 곤당골로 향한다. 곤당골은 상민과 천민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곤당골은 천민과 백정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제임스 게일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도록 하였다. 게일은 자연스러운 조선 사람들과의 접촉하기를 노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경의 말씀을 전했다. 서양의 선교는 순회전도를 기본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게일의 선교는 다가가는 선교였으며 이것은 조선의문화와 사람들을 이해한 선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기다리는 조선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갔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Ⅱ. 천로역정 번역과 조선의 세계화

당시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1895년 순우리말로 게일에 의해 번역 조선에 소개된다. 이것은 조선에 소개된 조선의 최초 서양 문학이었다. 게일은 조선인 독자들을 위한 42장의 삽화와 조선의 풍속화가에게 의뢰한 예수는 선비로 천사는 선녀로 남녀가 구별된 유교사상을 벗어나 남녀 함께 갈수 있는 천국의 모습을 그려냈을 정도로 게일은 기독교를 전략적으로 전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게일은 기독교의 조선화를 이뤄냈다. 게일은 기독교 세계관과 조선의 세계관의 차이를 외면하지 않고 문학적 교류를 통해 조선의 역사와 문명을 오히려 세계에 알리기 원했다. 더 나아가 춘향전, 구운몽 소설을 세계에 소개했을 정도로 게일은 조선인의 마음을 알고자 했다. 게일은 문학이야 말로 조선인들의 본질이며 내면을 비추는 것으로 생각했고 따라서 조선인을 잘 알 수 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문학을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하듯 게일은 조선의 문학을 이해하고자 노력했으며 수많은 책들을 집필했다. 게일은 조선의 문화를 알리고자 하는 사명을 가지고 외국에 조선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을 알리기 위한 선구자가 된다. 매일 두 시간씩 한자를 익혔으며 조선의 말과 글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정도였다. 게일은 어떤 문화적인 것도 이해하려고 했다. 실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어떤 문화적인 것도 배제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조선의 가락에 복음을 집어넣고자 했을 정도였다.


Ⅲ. 성서번역

최초의 한글 성경은 존 로스 선교사가 중국 심양에서 1887년 완성한다. 그 후 1900년 첫 신약 전서가 조선에서 편찬된다. 선교지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한 것은 선교사의 첫 번째 의와도 같았다. 성서번역 위원회 활동 초기인 1890년부터 위원회였던 게일은 양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한글 성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신약 전서가 출간되고 1911년 드디어 한글판 신 구약전서가 완성된다, 더 나아가 게일은 상류층을 전도하기 위해 1925년 신역신구약전서 개인적으로 번역한다. 게일의 성서변역도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서양적 언어를 전하는 것보다 조선인의 하나님이 조선인에게 하시는 말씀과 문화와 언어를 이해했기 때문에 게일은 이런 원칙들을 가지고 번역했던 것이다. 하나님이란 칭호 역시 선교사들에게 논쟁이 되었지만 게일은 민족의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신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고 게일은 정확하게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는 신의 관념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Ⅳ. 연동교회와 교육활동

격변의 조선 후기 기댈 곳 없는 힘없는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희망으로 섬기고자 했다. 연못이 많았던 연못골에 현재 연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부름을 받는다. 게일은 선교활동과 더불어 교회를 통해 교육의 장을 열어갔다. 게일이 담임 목사로 목회뿐 만아니라 연동소학교, 예수교중학교를 세워 교육에 임했다. 게일은 나라의 파탄의 이유를 교육에 두며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부흥한다 생각하며 게일은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다. 조선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배우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수 있었다. 1894년 청일 전쟁이후 일본의 제국주의로 조선은 침략대상으로 전략한다. 게일은 불안한 조국 앞에 놓인 젊은이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 위해 애썼다. 근대교육과 계몽활동을 위한 YMCA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을 위해 주도적으로 앞장섰으며 조선의 젊은 인재를 서구로 유학시키는 일에도 적극 동참한다. 게일은 이승만을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훗날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게일의 목적은 마지막까지 조선에 남아서 조선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근대화를 돕는 거라 생각했고 이싼 3세라는 필명으로 조선인들의 고통을 서구에 알리는 일을 한다.

서구인의 눈에 봤을 때 지극히 낯선 문화를 자신의 복음 전도를 위해 겸손하게 배우고 수용했던 선교사 진정으로 조선인을 이해하고 사랑하고자 했던 선교사가 바로 게일이었다. 그의 모든 삶은 조선의 가치와 복음의 정신을 조선에 스며들게 하고자 했던 선교사 그가 게일이다.
작성일:2019-12-12 18:41:13 121.134.5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