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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127 / Talmage, John Edward (1912- )

닉네임
명성인
등록일
2019-12-12 20:56:47
조회수
96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27_명성인.pdf (136716 Byte)
탈요한 선교사 / Talmage, John Edward (1912- )

I. 기본사항
1. 이름: Talmage, John Edward / 한국명: 탈요한
2. 생몰연도: 1912~
3.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장로교
4. 한국선교기간: 1937~1977년
5. 연표한국 전라남도 광주 양림동 출생평양 외국인 대학교 졸업미국 멜빈대학 졸업(물리학 전공)1933년 콜럼비아신학교 입학(신학공부)1937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1939-1940 군산예스병원 경영책임자군산, 목포, 광주지방 등지에서 농촌선교, 17개 교회 개척1941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1948 재 내한하여 군산, 목포에서 활동1960 대전대학(현 한남대) 학장에 취임, 초대 숭전대학 이사장 역임1971 숭전대학교 교수1972 남장로회 한국선교부유지재단 이사장, 주한 장로교선교부 연합기구 대표 등 역임한국교도서 선교의 기틀을 다짐1973 제주노회 선교회 회장1977 65세 정년으로 귀국한국정부는 선교와 교육사업의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을 수여
6. 가족사항 아버지: Talmage, John Van N 어머니: Talmage, Eliza 부인: Talmage, Roslin 동생: Talmage, Janet Crane / Mariella



II. 선교사 소개: 타요한(Talmage, John Edward, 1912- )
1. Talmage, John Van Neste의 선교사역 타요한 선교사의 선교사역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전반은 아버지인 탈마자 선교사가 일구어 놓은 토양 위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사역한 지역과 대상, 그리고 방법은 모두 선대에 그의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터 위에 시작되었다. 마치 다윗이 성전을 지을 준비를 하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것처럼, 타요한이 있기전 그의 아버지 탈요한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탈요한 선교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10년 타마자 선교사 부부는 센프란 시스코에서 아시아로 출항해 구권을 빼앗긴 조선 땅에 도착한다. 타마자는 한국어 공부에 힘을 썼다. 당시 최 씨 성을 가진 상류계층의 남자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는데 한국어뿐만이 아닌 한국어에 도움이 되는 수많은 한자의 지식을 익혔다. 그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의 묘문에 이렇게 말한다.

“한글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면서 일반 서민 언어의 숙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한국 사회는 유교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한자를 배우는 것은 중요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학문의 조예가 깊은 학자들과 정부관리는 물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과 막힘없이 대화를 나눴다”(166)

1912년 1월에 그의 사역은 시작된다. 그 이유는 선임 사역자인 유진벨이 안식년으로 갑자기 귀국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는 맡은 35개의 교회를 맡았는데 첫 순회여행에서 그는 많은 것을 느낀다. 그는 불과 2년 만에 교회의 부흥의 물결이 빠져 나가고 있다 느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고 다방면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했다. 그의 선교보고서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소망을 보여준다 “주님의 나라에서 영혼들이 더 풍요로 울 수 있도록 주님은 행하시고 앞으로도 행하실 것을 믿으며 보고서를 마감한다”. 이후 광주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데 대부분의 사역은 담양에서 하였다. 그는 담양인근에 있는 순담청년성경신학원을 운영한다. 그곳에서는 성경과 함께 언어, 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던 날 타마자 선교사는 일본 순사에 체포된다. 이 체포는 신사 참배 거부와 선교회의 재산을 빼앗기 위함이었다. 일본은 1937년부터 선교활동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계속해 선교사들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미국 내 해외선교위원회에서도 ‘선교사들의 필요에 따라 본국으로 귀환을 인정한다’는 전문을 보낸다. 이런 상황에 타자마는 억압하고 빼앗으려는 일본을 향해 “그것은 하나님의 재산입니다.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고 말하였다. 또한 “내가 체포되자 나는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 하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특히 구약의 예들을 들어 생각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곳에서 주의 은혜와 경화를 누렸다. 일본은 그를 생포함으로 한국 교회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의 수감을 통해 한국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2. Talmage, John Edward의 선교사역
1) 호남지방 선교
타마자 선교사가 담양의 최초 선교사였고, 그 아들 타요하는 아버지를 이어 담양을 중심으로 청년사역을 이어갔다. 가장 큰 도시인 광주에서도 사역을 했지만, 그는 담양, 순천, 목포를 연결하며 광주 주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이를 하나로 묶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는 이로써 아버지를 이어 전남지방에 선교사역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1941년 신사참배 반대로 추방을 당한다. 타요한 선교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 아들역시 천왕을 섬기는 것 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며 조선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신앙인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당시 선교부는 이 위험한 상황에 대하여 선교사들을 소환 주치하였고, 타요한 선교사도 이 때 미국에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순결한 신앙은 당시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 대해서 조선인들의 신앙과 삶에 자유와 자주적 삶에 대한 용기와 힘을 더해 주었다.

3) 대전(군산) 선교
이후, 타요한 선교사는 1948년 다시 한국을 찾는다. 일제의 핍박으로 선교 사역아 잠시 멈춰져 있었지만, 조선 땅을 향한 타요한 선교사의 마음을 막을 순 없었다. 마침 1947년 대구를 중심으로 한 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었고, 이 선교회는 제 1차 연례회가 개최하며 타요한을 포함 29명을 선교사들을 초대한다. 그들은 당시 한국 발전에 필요한 교육 을 해줄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학위를 가진 선교사들이었다. 여러 해 동안 이 선교회는 호남지방의 노회를 향해, 이 지역의 기독교 학생들을 위해 문리대학을 설립하여 고등교육 분야로 진출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런데 대학을 설립하자는 제안은 1950년 어려 환경적인 변화로 인해 이 모든 것을 철수하려하던 선교회 앞 주어진 제안이었다. 결국, 선교회의 1954년 회의에서 그런 대학을 설립하자는 결정이 이루어졌고 많은 토의 끝에 투표하여 대전을 설립 후보지로 결정했다. 이 때, 타요한 선교사는 대전 스테이션 위원회에 군산 재산 처분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은 그의 판단에 따라 군산의 재산을 처분하고 그 돈으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여유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요한은 군산 재산을 처분했고 이를 통해 신학교와 대학을 세우는 계획이 진행되게 된다. 타요한 선교사는 이 재정으로 대학 부지의 매입했고, 확정 짓는다.

최초 린튼 박사가 이 대학을 이끌도록 선정됐다. 발전 계획 덕분에 건물 계획이 추진 되었다. 엘라베마 주 버밍햄에 있는 남부 하일랜드 장로교회의 장로이며 건축하인 데이비스Charles C. Davis 씨가 대학 캠퍼스의 청사진을 그리기 위해 현장에 왔다. 데이비드씨는 자신의 시간과 봉사를 헌신하면서 한국에서 한 달간 머물렀다.

대학은 1956년 4월 10일 82명으로 개교했다. 이 기관은 학관으로 운영하기 위해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1959년 2월 드디어 대학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 인가에서는‘학관 ’에서 공부한 3개 학년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대학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됐다. 대학의 큰 손실은 초대 학장 린튼 박사가 테네시 주 녹스빌에서 1960년 8월 13일 사망한 일이다. 이후 1960년 존 에드워드 탈메지 John E. Talmage 목사가 학장으로 선임되었다.

대학은 정부의 교육 오건에 맞추기 위해 그리고 한정된 예산으로 등록학생들의 필요에 맞추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모두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어야 했다. 대전 선교부는 이렇게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전북, 충청남도 복음 사역도 책임졌고, 기독교 연합 봉사회를 헙력했다. 뿐만 아니라 지역 농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독교 농민잡지도 만들어 진다. 타요한은 이 모든 사역이 가능 하도록 자신이 가진 자리에서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고, 그 결과 얻게 된 돈을 통해 꼭 필요한 사역들이 세워져 갈 수 있었다. 타요한은 학장이 된 후에도 전도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단지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는 자신이 선교라사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자신의 삶의 목적되신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자신이 은퇴하는 순간까지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참 선교사였다.
작성일:2019-12-12 20:56:47 211.184.4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