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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29 / Irwin, Ada J.(1896-1965, SA)

닉네임
박서현(3-4반)
등록일
2019-12-12 22:02:19
조회수
887
첨부파일
 한국교회사 선교사조사.pdf (2671446 Byte)
Ⅰ. 기본정보
1. 이름: Irwin, Ada J. / 어윈 / 禹儀仁(우의인) / 캐나다 / SA
2. 생물 년도: 1896.5.28.~1965.7.3.
3. 출생지: 캐나다
4. 학력: 빅토리아군영 출신
5. 경력: 1922.6. 사관으로 임명되어 여자 스카우트 교관으로 활동
1926.2. 구세군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 본영에서 사령관 비서실의 비서 및 서기관 으로 봉직, 부인사업 및 청년사업에도 봉사
1935.3. 군국가정단 서기관으로 부인사업 행정책임관
1938.7. 군군소년서기관 및 참령계급으로 청소년 사업 지휘
1940.11.16.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
1947.9.1. 로드 사령관 재임시 재내한, 재무서기관
1950 6.25사변 직전까지 봉직한 후, 도일했다가 귀국
1965.7.3. 캐나다에서 소천
6. 가족사항: 아버지 1937년 6월, 부친상이 신문에 실림(구세신문, 1937년 6월호 p2)
7. 참고문헌: 기백 11권; 장형일, 한국구세군사, 1975; 구세신문, 1928.2(나의 반장시절의
간증); 구세공보; 캐나다 본영 통신, 1982.8.5.; 구세군역군


Ⅱ. 선교사 소개

1. 서론 : 구세군 여선교사관 어윈, 조선으로 오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에서 시작된 국제적 규모의 교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전파. 신앙공동체 형성, 빈곤과 악을 타파하고 사회개혁을 수행해 나가는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구세군의 모든 활동의 밑바닥에 흐르는 목적은 단순한 복음전도만이 아닌 사회적 약자를 섬기를 사회봉사에 있다.
구세군 여선교사관이었던 우의인선교사는 빅토리아군영 출신으로 1922년 6월 사관으로 임명되었고 여자 스카우트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은 뒤 1926년 2월 내한하였다. 주로 서울 본영에서 사령관 비서실의 비서 및 서기관으로 봉직하는 한편 부인사업 및 청년사업에도 봉사하였다. 1935년 3월 군국가정단 서기관으로 전임되어 부인사업의 행정 책임관이 되었으며 매월 구세군신문 「가정단」의 필자로서, 가정단 공과의 발행인으로서 활약하였다. 1938년 7월 군국소년서기관 및 참령계급으로 승진, 청소년 사업을 지휘하였으나 1940년 11월 일제에 의해 강제 출국당하였다. 해방 후 1947년 9월 로드 사령관 재임시 재내한하였으며 재무서기관 및 공급부 책임자로 부임하여 6.25사변 직전까지 봉직하였고 사변중 일본으로 긴급 대피하였다가 귀국하였다. 캐나다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65년 7월 3일 별세하였다. 이후 그녀의 공적을 기리는 유지들이 코레아드(KOREAD) 클럽을 조직하여 한국의 사회사업을 후원하였다. 그는 교육받은 훌륭한 성악가로서 선교의 선봉에 유능한 주의 종이었다.

2. 본론
어윈은 캐나다에서 사역하던 중 1926년 2월에 조선으로 임명되었다(구세신문 1926년 1월호 p2)
서기관 우의인은 1928년 2월호 구세신문에 “나의 반장시절의 간증”이라는 글을 썼다.
서기관 우의인은 1928년 4월호 구세신문에 “아이들을 어떻게 구해내야 하나”라는 글을 썼다(구세신문 1928년 4월호 p5)
1935년 4월호부터 구세신문 ‘가정부인단란’을 부관 우의인이 연재하였다.(1935년 4월호 p6)
1936년 10월 군국사령관 비서 및 군국가정단 서기관을 겸직하게 되었다(한국선교보고회, 캐나다 본영 ,p4)
1937년 6월, 함경(소좌) 우의인은 부친상을 당했다.(구세신문, 1937년 6월호 p2) 한국구세군사: 구세신문, 1937년 6월호 p2
1939년 4월 중교(부관) 우의인은 소좌(참령)으로 승직되었다.(구세신문 1939 4월호 p2)
1965년 3월 7일 어윈 부령은 캐나다 방쿠버에서 승천하였다. 그녀는 일찍이 캐나다 사관으로 한국에 와서 사령관 내외와 가정단 서기관으로 크게 사역하다가 1941년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으로 귀국하셨다. 1947년에 다시 내한하여 1949년까지 로드사령관과 함께 재무서기관으로 봉직했다. 은퇴후 숙환으로 고생하다가 1965년 3월 7일 방쿠버에서 승천하여 10월 방쿠버 중앙회관에서 장례식을 거행했다. 그는 교육받은 훌륭한 성악가로서 선봉에 유능한 주의 종이었다(구세공보 1965. 4월 p2)

저서(글)
가정부인단(구세신문 1935년 5월호)
하나님이 가지신 우리 친아버지와 같은 마음(구세신문 1937년 2월호 p4)

3. 결론
구세군대학원대학교에 방문하여 어윈선교사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는 것이 참 의미있는 일이었다. 여성 사역자로서 조선의 어려운 상황에도 비서 및 서기관으로서의 사역과 함께 부인사업과 청년사업에 활발히 활동한 모습을 보며 충성스러운 선교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싱글선교사였던 그녀는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을 당했으나 해방 후 1947년 재내한하여 6.25사변 직전까지 사역하였다.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재내한한 것을 통해 적어도 그녀가 신실하고 열정적인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구세군은 가난과 문맹과 미신과 음주 등으로 낙후된 농촌지역에 들어가야만 했다. 당시 장로교와 감리교가 이미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세군 선교사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자연스럽게 ‘구세군 분규사건’도 알게 되었고 초기 선교사들의 종교 식민주의적 통치근성, 저개발국에 대한 서구적 선진국의 우월성, 문화적응에 대한 비도덕성과 몰이해에 관한 것들을 알게 되면서 이러한 부분이 한국 구세군 역사에 아쉬움을 남기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것을 정죄하기 보다는 반면교사로 삼고 새로운 미래선교를 지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성사역자인 나는 여선교사관이었던 어윈선교사를 통해 여성으로서 강점일 수 있는 영역에서 전문성과 탁월함을 가져야 하며,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부르심에 대한 신실한 충성심을 가지고 사역해야함을 다시한번 결단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작성일:2019-12-12 22:02:19 180.230.22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