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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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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_3학년6반_B138_이과원

닉네임
이과원
등록일
2019-12-12 23:07:26
조회수
857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학년6반_B138_이과원.hwp (1523200 Byte)
<내한 선교사> 원일한 선교사 / Underwood, Horace Grant Ⅱ (1917-2004)

I. 기본사항

이름: Underwood, Horace Grant Ⅱ / 언더우드 / 한국명: 원일한(元一漢)
생몰연도: 1917.10.17.-2004.1.15.
출신 및 소속: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기간: 1939-2004.
연표1917.10.17. 서울 출생.1939. 뉴욕 해밀턴대학 졸업1939. 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 연희대학교 부임1941. 7. Joan Davidson과 결혼1941. 12. 한국에서 강제 추방1946-47. 해방 후 재 내한, 서울대학교 교무과장으로 재임1947. 9. 연희대학교 복직6.25. 사병 당시 미해군의 해병사단정보부에서 근무전후 연세대 교수, 재단법인이사, 상임이사 연임1954. 연합장로회 선교사로서 전도 활동1955.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석사 학위 취득1956. 경신학교 이사, 왕립아세아학회 회장 겸임1976. 2. 부인 소천, 왓슨(Dorothy C.)과 재혼1978. 교수직에서 은퇴 후, 연세대학교 상임 이사로 봉직2004. 소천
가족사항조부 : Underwood, Horace Grant (원두우)부 : Underwood, Horace Horton (원한경)모 : Underwood, Ethel Van Wagoner동생 : Underwood, John T (원요한)동생 : Underwood, Richard F (원득한)부인 : Underwood, Joan Davison부인 : Underwood, Dorothy Constance아들 : Underwood, Horace H Ⅱ (원한광)아들 : Underwood, Peter A (원한석)



II. 선교사 소개: 원일한(Underwood, Horace Grant Ⅱ, 1917-2004)
원일한, 간략히 소개해보자면 그는 일생을 한국의 교육과 선교에 힘쓴 미국의 선교사이며 교육자이다. 연세대학교 복구사업에 힘썼으며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국 해군의 정보부에서 활동하였고 국제연합군 수석통역관을 맡아 정전협정을 이끌어냈다. 이후 연세대학교 영문학 교수, 재단이사, 한미협회부회장, 대한성공회 이사 등을 지냈다.

다시 자세히 보자. 본명은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이고, 원일한은 한국 이름이다. 1917년 10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한국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설립자인 원두우(元杜尤:Horace GrantUnderwood)이고, 아버지 역시 평생을 한국의 교육과 선교에 힘쓴 원한경(元漢慶:Horace Horton Underwood)이다. 할아버지와는 영문 이름이 같다.

1939년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교육담당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나와 얼마동안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선교사역을 맡았다. 당시엔 일제가 미션학교를 탄압할 때였기에 그에게도 탄압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로 1941년 12월말에 결국 추방을 당하였다. 그가 도미한지 얼마 안 된 12월 8일 일제는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여 결국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 무렵 원일한은 미국 국민으로서 해군에 입대하여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였다. 일제는 진주만을 습격하고 곧 미국 점령을 한다는 소식을 온 국민에게 알렸지만 이것은 잠시뿐이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이미 일본은 전쟁에 승리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일본인 항복을 하지 않자 미국은 8월 9일 또 다시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 이에 놀란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낮 12시를 기하여 전쟁에 패했음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원일한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고향인 서울에 올 수 있다는 기쁨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 그의 전부였다고 한다.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수도가 서울로 환도하자 연희대학교도 서울에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연희대학교가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지만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지원으로 계속 학교는 발전해 갈 수 있었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 한국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 자신의 할아버지가 설립했던 새문안교회에 출석하자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새문안교회 시무장로가 되었다. 여기에 원일한 장로는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연희대학을 통폐합하여 연세대학교로 개명하였다. 그는 백낙준(白樂濬)과 함께 연세대학교 복구사업에 전념하였다. 6·25전쟁 때는 미국 해군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 당시 정보부에서 활동하였고, 1951년 7월 정전협정 때는 국제연합군 수석통역관을 맡아 정전협정을 이끌어내는 데 이바지하였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로 4. 19혁명이 일어나자 한때 학교가 약간 어려움이 있을 때 총장 서리로서 그 직책을 잘 감당하여 교수와 학생들 간의 갈등을 잘 해결하여 연세대학교가 굳건히 자리를 잡고 나갔으며, 교수직을 은퇴하고 연세대학교 상임이사로 학교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연세대학이 일류대학으로 발전하는데 큰 공로자가 되었다.이후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1956~1978), 경신중고등학교 이사(1956), 연세대학교 총장서리(1960)·중앙도서관장·재단이사, 부산 일신병원 이사(1977), 한미교육위원단 운영위원, 한미협회 부회장, 대천수양관 이사장, 대한성공회이사, 광주기독병원 이사, 광주기독전문학교 이사 등을 지냈다.

그는 1976년 부인을 먼저 보내야 하는 아픔도 있었다. 부인의 시신을 아버지가 잠들고 있는 양화진에 안장했으며, 원일한도 2004년 생을 마감하고 부인 곁에 안장하였다. (2006. 7. 29. 한국장로신문)잠시의 미국생활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한국에서 보낸 교육자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合井洞) 절두산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공원에 묻혔다. 국민훈장 모란장, 5·16민족상, 인촌문화상, 한미우호협회상을 받았고, 저서로는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2002)가 있다.

#그의 소천 1년 후

그의 소천 1년 뒤, 연세대학교에서는 그의 추도예배를 드렸다. 일종의 행사였던 이 시간은 원일한의 한국 교육과 선교 발전의 뜻을 잘 담아내었다.원일한 박시의 추도예배는 1월 15일 오전 10시 30분 루스채플에서 거행됐다. 박정세 교목실장의 집례로 진행된 추도예배에서는 고인이 장로로 봉직했던 새문안교회에서 찬양으로 고인을 추도했으며, 충신교회 박종순 목사가 ‘예수의 흔적’을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정창영 총장은 추모사에서 “언더우드가의 창립정신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가는 일들을 연세의 중요한 비전과 주제로 삼아 적극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으며, 박사님의 생전에 시작했던, 여러 가지 언더우드기념사업 활동 및 언더우드가 기념관의 효율적 운영과 확장도 잘 추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고인의 장남인 원한광 박사-원은혜 여사 부부, 삼남 원한석 씨와 다이에나 언더우드 여사 등 언더우드 가족들을 비롯해 정창영 총장, 이천환 전 법인이사장, 박대선, 안세희, 송자, 박영식, 김병수 전 총장 등 400여명이 참석, 일생을 한국의 교육과 선교 발전에 바친 고인의 뜻을 기렸다. 고인의 장남인 원한광 박사는 “돌아가신지 1년이 지났어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한국과 기독교를 사랑했던 아버님을 기억해 주어 감사한다”며, “아버님만큼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봉사한 사람은 다시없지 않을까 생각될 만큼 아버님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새삼 느끼게된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이어 원두우, 원한경, 원일한 등 언더우드가(家) 3대(代)가 나란히 안장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서 추모기도회를 가졌다.

#연세와 한국에 대한 사랑과 발자취

원일한 박사는 연세대 설립자인 원두우 박사의 장손자로 대를 이어 연세대와 한국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헌신을 몸소 실천하다가 2004년 1월 15일 소천했다. 1대인 원두우 박사가 1885년 선교사로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2대 원한경 박사를 거쳐 3대인 원일한 박사는 평생을 연세와 더불어 살면서, 연세의 발전에 혼신을 다하여 오늘의 연세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공로자의 한 분이었다. 일찍이 연세의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여러 보직은 물론 총장 직무대행으로 행정의 쇄신을 기하였으며, 오랫동안 학교법인 연세대학교의 이사로 봉직하며 연세의 나아갈 방향을 지도한 어른이었다. 또한 원일한 박사는 한국전쟁에 종군했고, 휴전회담 때 한국과 유엔 측을 대표한 수석통역을 맞는 등 한국 근현대사 수난과 질곡의 순간을 함께 했다. 이와 더불어 한미우호관계의 선봉에 서서 두 나라 현대 외교사의 중추에 있었으며, 상호 이해와 신뢰를 형성하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원일한

원일한, 그의 삶을 돌아보면 선교사의 삶을 볼 수 있다. 교육담당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한국의 교육을 담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고, 중요한 자리에서 통역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조국교회에서 장로로서 열심히 많이 이들을 섬기기도 했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는 선교사의 삶이었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 교육자 원일한의 사진.

▲ 연세대에서 거행된 추도예배에 참석한 원일한의 아들 원한광-원은혜 부부.











▲ 주한미군 사령관 Lion J. La Porte와 그의 아내가 장례식장에서 고 원한일 박사를 추모한다.











▲ 원한일 박사가 한국계 미국인 협회로부터 상을 받는 모습.







































▲ 언더우드가의 가계도.
IV. 참고자료

김흥수. 『내한 선교사 총람』.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한영제. 『기독교대백과사전11권』. 서울: 기독교문사, 1984.
Harry A. Rhodes, Archilbald Campbell.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II)』.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4.
http://www.kocis.go.kr/eng/webzine/201911/sub05.html
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51026001140
http://theseoultimes.com/ST/?url=/ST/db/read.php?idx=233
https://www.yonsei.ac.kr/ocx_en/news.jsp?mode=view&ar_seq=25302&sr_volume=71&list_mode=list&sr_site=E&pager.offset=0
https://www.yonsei.ac.kr/ocx_en/news.jsp?mode=view&ar_seq=24806&sr_volume=35&list_mode=list&sr_site=E&pager.offset=0
http://www.kocis.go.kr/eng/webzine/201911/sub05.html
https://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원일한&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329463
https://blog.naver.com/kjyoun24/60026756812
http://hanseog.egloos.com/9333290
https://www.yonsei.ac.kr/_custom/yonsei/_app/ocx/news/app.jsp?mode=view&ar_seq=9945&sr_site=S
작성일:2019-12-12 23:07:26 175.112.11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