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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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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Welbourn, William Brommell(1896-1981, SA) / Welbourn, Otway(미상,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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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6반최재환
등록일
2019-12-12 23:18:26
조회수
1048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50_최재환.hwp (1021440 Byte)
내한선교사 / B150 / Welbourn, William Brommell (1896-1981, SA) / Welbourn, Otway(미상, SA)


웰번 선교사 / Welbourn, William Brommell (1896-1981, SA)

I. 기본사항

1. 이름: Welbourn, William Brommell / 웰번 / 한국명: 위일빈
2. 생몰연도: 1896.10.29. - 1981
3. 출신 및 소속: 캐나다, 구세군
4. 한국선교기간: 1921.11.26. – 1940.11.19.
5. 연표
1896.10.29. 캐나다에서 출생
1921.6.20. 캐나다사관학교 졸업 후 임관
1921.11.26. 구세군 선교사로 경성으로 내한 및 구제사업
1923.4 오트웨이 사관과 결혼 후 함남 고산영에서 봉직
1925. 서울지방, 1영 담임
1926.3. 개성지방관
1928.7. 서울, 개성지방관 등 역임
1929.11. 전라지방관
1937.6 함강지방관
1937.12. 서울 후생학원장
1938. 사회사업 소좌
1940.4. 만주개척사관으로 파송
1940.11.19. 구세군 개편 차 한국 내한
1941- 인도네시아, 자바 등지로 전임, 마지막 계급은 참령
6. 가족사항
부인: Welbourn, Otway (미상)

II. 선교사 소개

1. 위일빈 선교사가 오기 전 구세군 역사
군대 같은 교회라는 뜻을 가진 구세군은 1865년 윌리암 부스 목사에 의하여 영국에서 창립되었다. 그와 그의 부인인 캐서린은 감리교를 떠나 런던의 동부 빈민가 선교에 나섰고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표어를 가지고 ‘영혼구원’과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감리교를 떠난 후 조직을 갖추게 됐고, 1880년 부터는 해외선교도 시작됐다. 유럽 여러 나라와 캐나다, 미국 등에 전파되었고, 동양 나라 중에서는 1859년에 일본에 전파되었다.
구세군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08년 10월경이다. 영국 선교사 로버트 허가드 사관 일행이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이 시작의 발단은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엄 부스가 1907년에 일본 순회 집회를 하고 있을 때,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 조선 유학생의 요청이었다. 그는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조지 레일톤 부장과 존 롤릴 정령을 한국으로 선교 답사를 보냈고, 이듬해인 1908년 허가드 사관을 한국선교 개척사관으로 임명하여 파송하였다. 이는 세계구세군 사역지로 42번째 였다.
로버트 허가드 사관 부부를 비롯한 본윅 선교사 부부, 힐, 위드 등 7인의 개척멤버는 서울 서대문 밖 평동에서 시작하였다. 그들은 1908년 11월 22일에 한국 구세군의 첫 번째 교회인 서울 제일영을 당주동에 개영한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일제 강점기였는데, 나라를 잃기 직전의 민중들에게 있어서 제복과 군사적 용어를 사용하는 구세군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운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시기에 영국인들이 ‘입대’를 권유하자 군사기술을 가르쳐 주는 줄 알고 독립군에 지원하듯이 많은 민중들이 몰려들었다.
1909년에는 최초 사관 훈련반 교육이 시작됐고, 구세신문창간, 조선 구세군 최초의 구세군회관 헌당식, 전라지방과 대구지방, 충청지방이 개설 됐다. 특별히 절제호라는 특집호를 발행하여 금주, 금연 절제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구세신문은 여성교육, 구습타파, 계몽운동, 농사교육, 성경교육, 한글사용 등을 권장하였다.
1910년에는 구세군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사관을 양성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경성 성경대학교로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1912년에 구세군사학교로 개칭한다. 1914년에는 영동지방을 개설하고, 1915년에 해주지방을 개성지방에 분리한다. 사회사업은 1918년도부터 시작되는데 이때 한 독지가의 기부금으로 서대문구 충정로에 아동구제시설인 혜천원을 설립하는 것이 그 시발점이다.
허가드 사관이 8년간의 선교활동을 마치고 1916년에 돌아갈 때는 목회자가 87명, 집회 장소가 78개, 신자가 1,201명에 이르렀고, 월간으로 발간되는 「구세신문」의 발행 부수는 3,500자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구세군이 선교 초기를 잘 할 수 있었던 것은 통감부와 총독부와의 관계가 원만했기 때문이다.
1917년부터는 동부인을 같이 양성하여 임관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같은 계급으로 일하고 퇴직후 인급도 같이 받게 했다. 이런 구세군 가정부인단은 지교회의 신설과 보조와 더불어, 불신자들에게 접근하여 육아, 요리, 재봉, 수예, 교양 등의 영역으로 활동하여 예배, 교육, 친교, 봉사의 목표를 완수 하려고 하였다.

2. 위일빈 선교사의 한국 사역
위일빈 선교사는 캐나다 출신이다. 캐나다에 구세군이 들어가기 시작한 연도는 미국과 프랑스 다음인 1882년이다. 즉 그는 캐나다에 구세군이 들어 간 후 9년 후에 맺힌 열매인 것이다. 그는 본국에 남아 있기 보다는 아마도 가기 꺼려했던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였고 캐나다 사관 최초로 1921년 11월 26일에 경성으로 내한한다.
그가 내한하기 전에 1914년에 덴마크에서 사리영 선교사가, 1916년에 미국에서 프렌치 사령관이, 1920년에 뉴질랜드에서 배더신 선교사가 내한했다.
한편, 위일빈 선교사가 한국에 오기 전인 1920년에 신태빈 참장 동부인이 제3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는 1922년 12월에는 원산으로 몰려온 러시아혁명의 난민 8천여 명을 위하여 구세군사관 쿠퍼 부관과 ‘위일빈 부관’을 임명하였다. 이 밖에 다른 업적으로는 1921년 3월에 금주호 20,000부를 발행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절제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2년 5월에 홍성에 구세약방을 개설한 것들이 있다.
위일빈 선교사는 1922년 12월에 러시아 혁명의 난민들을 위해 봉사한 후, 이듬해 4월에 이미 한국선교사로 먼저 활동하고 있던 영국인 선교사 오트웨이 사관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5월 1일에 함남 고산영 담임으로 부임하게 된다.
1924년에는 배일수 참장이 제4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에 위일빈 선교사는 서울지방 1영의 담임으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서울 1,2,3영은 1924년부터 1,000여명에게 국밥을 제공하는 등의 구세군만의 특색 있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었다.
1926년 8월 16일에는 두영성 정령이 5대 한국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위일빈 선교사는 개성지방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같은 해에 구세군 제2대 대장인 브람웰 부스가 총회 인도 차 한국을 방문했는데, 한국인 목회자들이 구세군 내부의 문제점들을 진정서에 담아 대장에게 제출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외국인 선교사들의 방해로 진정서가 제출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한국인 목회자들의 상당수가 구세군으로부터 제명당하는 분규사태가 발생하게 됐다. 이로 인해 8,509명이었던 교인 수가 3,396명으로 줄어들어 구세군의 교세가 급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위일빈 선교사는 1928년에 개성지방관뿐만 아니라 서울지방관까지 역임하게 된다. 그리고 구세군은 개성지방과 경성지방을 합병한다. 같은 해 12월에 구세군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선냄비운동을 펼쳐서 빈민들이 무사히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쌀, 급식, 숙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2월에 자선냄비 모금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1928년 9월 22일에는 박준섭 정령이 제6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위일빈 선교사는 다음해에 전라지방관으로 부임해서 8년간을 섬기다가 1937년 6월에 함강지방관 부임했다가, 서울 후생학원장으로 발령이 난다. 그 후 1938년에 그는 본영참모 자리인 사회사업 소좌로 임명된다. 한편 1938년에는 대대적인 신사참배 강요가 있어 장로교가 9월 10일, 감리교가 10월 5이에 굴복하였고, 성결교, 성공회, 구세군도 이쯤 하여 굴욕적 복종을 강요당하였다.
위일빈 선교사는 본영참모로 지내다가 1940년, 만주개척사관으로 파송된다. 그 후, 같은 해 11월 달에 구세군 개편 차 한국에 내한하고, 이듬해인 1941년부터는 인도네시아 자바 등지로 사역지로 옮겨서 사역을 하다가, 마지막 계급은 참령으로 끝을 맺는다. 1941년부터 위일빈 선교사가 타지로 옮기게 된 이유가 1940년부터 정황상 한국 구세군이 일본 구세군으로부터 지휘 감독을 받게 되고 영국의 구세군 국제본영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는 등의 어려움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작성일:2019-12-12 23:18:26 121.133.21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