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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48 / Maynor, Velma Hartly(미상, MS)

닉네임
정위로
등록일
2019-12-12 23:20:02
조회수
821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B048_정위로.pdf (827586 Byte)
<선교사 조사 보고서> 메이너 선교사 / Velma Hartly Maynor (1888-1979)

I. 기본사항

이름: Maynor, Velma Hartly (Hartley) / 메이너 / 한국명: 미이나
생몰연도: 1888.12.7.-1979.6.20.
출신 및 소속: 미국, 남감리교
한국선교기간: 1921-1939
연표
1888.12.7. 알라바마 주 Blount County에서 출생. 아버지는 약 6개월 전인 6월 21일 낙뢰를 맞고 사망
1898.3.30. 어머니가 John Wilson과 재혼함
--------- 콜럼비아 대학 졸업1917.8.16. Eldridge Maynor 중위와 결혼함
1918.6.25.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Eldridge Maynor 중위가 프랑스 툴(Toul) 근방에서 전사
1921.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배화여학교 영어 교사
1928-1939. 이화여전에서 영문학 강의
1929. 이화여전 제2대 문과과장, 연극활동 지도
1930. 남북 감리교 중앙협의회 초대 서기 역임
1939. 귀국 후 미국 알라바마 주 Blount County에서 학교 교사 및 가정교사로서 스페인어와 라틴어를 가르치고 뉴욕의 선교부(Board of Missions)에서 근무함
1948.1.7. 어머니 사망
1979.6.20. 90세의 일기로 사망. Blount County, Oneonta에 위치한 Oak Hill Cemetery에 장사됨
가족사항
아버지: Hannabel DeForest Hartley (1864-1888)
어머니: Leota Rebecca Hendricks Wilson (1866-1948)
새아버지: John Franklin Wilson (1858-1934)
남편: Eldridge Washington Maynor (1890-1918)
이복형제: William Washington Wilson (1903-1989) / John Robert Wilson (1906-1979)

II. 선교사 소개: 메이너(Velma Hartly. Maynor, 1888-1979)

1. 한국 여권 증진과 여성 교육의 근간을 닦은 조선감리교 선교사
메이너(Velma H. Maynor, 1888-1979)는 한국 감리교 선교역사의 숨은 조역이자 여성 교육의 근간을 닦은 교육가였다. 그녀는 처음 한국에 온 1921년부터 자신의 고향인 미국 알라바마 주의 Blount County로 돌아가는 1939년까지 한국 교회가 일본 제국주의의 멍에 아래 신음하며 사회계몽운동을 펼치던 시대에 자신의 소명을 다한 선교사이자 교육가였고, 남북 감리교의 합동 이후 오랜 시간 중앙협의회를 섬긴 신실한 일꾼이었다.
필자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내한 선교사 총람」, 한국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의 「한국선교총람」, 기독교문사의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조선감리회중앙협의회록외」 등을 통해 한국 땅에 남아있는 그녀에 대한 발자취를 살펴보았고, 또한 그녀의 고향 Blount County에 보존되어 있는 그녀의 기록을 참고하였다. 이를 통해 드러난 메이너는 일신(一身)의 불행을 넘어 소명을 향해 정진(精進)한 사명자요, 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감리교인이었다.

2. 불행했던 유년기와 성년기를 넘어 떠난 한국 선교
메이너는 1888년 12월 7일 미국 알라바마 주의 Blount County에서 태어났다. 그때의 그녀는 6개월 전 지역 신문 The Gadsden Times에 보도된 짧막한 기사의 주인공 H. D. Hartley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낙뢰를 맞고 사망.

County 남쪽에 위치한 Mrs. Mary Hendricks의 소유지 근처에서 두 훌륭한 젊은이가 낙뢰에 의해 안타깝게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6월 20일 목요일, Geo. F. Hendricks와 H. D. Hartley는... (중략)... 영원히 잠들었습니다. Hartley는 농사일을 하면서 학교에서 교사로도 근무하던 훌륭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약 5개월 전에 Miss Hendricks에게 장가갔습니다. 남은 유가족에게 깊은 동정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녀는 태어나기도 전 아버지를 여의였고, 어머니가 재혼하시기까지 약 10년 동안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1917년 8월 16일 Eldridge Maynor 중위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식장의 향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인 1918년 6월 25일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듣는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프랑스로 떠난 그가 그만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뱃속에 아이가 없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한 불행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평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일신(一身)의 모든 안위와 행복을 추구할 것을 거절하고 3년 뒤인 1921년 남감리교 소속 선교사로 내한한다.

3. 헌신된 교육행정가
1921년 한국에 입국한 메이너는 배화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가르치기 시작한다. 1928년부터 1939년까지는 이화여전에서 영문학을 강의하였는데, 특별히 1929년에는 이화여전 제2대 문과과장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의 연극활동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조선감리회중앙협의회록외」에는 그녀가 감리교 소속 선교사로서 실천한 교육 선교의 기록이 남아있다. 1931년 2월 16-17일 남감리교 대표 8인 중 1명으로 참석한 남북 감리교 중앙협의회 1차 회의에서 그녀는 재정위원회(Finance Committee)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는데, 재정위원회 소속으로서 그녀는 감리교 협성신학교(Union Methodist Seminary)와 여자신학교(Woman’s Methodist Seminary)의 요청을 받아들여 모든 장학금이 공동 교수진(joint faculty)에 의해 집행되도록 하자는 재정위원회의 제안, 그리고 5월 회의에서 해외여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를 대상으로 긴급 재정 1,300엔의 지원을 요청하자는 제안을 제시했다. 또한, 그녀가 속한 재정위원회는 영변(Yeng Byen) 남자고등학교를 존속시켜달라는 학교의 요청을 거절하고 광성(Kwang Sung) 남자고등학교와 배재(Pai Chai) 남자고등학교만 재정적으로 지원이 가능하다는 전 회기 재정위원회의 결정을 유지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영변학교와 관련된 결의는 1932년 2월 5일 5차 중앙협의회에서 수정안이 채택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변학교에 500불의 기금을 할당할 것, 영변학교가 다음 해 예산안을 상신하도록 할 것, 그리고 학교의 자립을 위한 진흥회(Promotion Association)를 조직하도록 허가하는 것이었다. 1931년 9월 18일에 있었던 3차 중앙협의회에서 그녀는 원산 루씨여학교(Lucy Cunningham High School, Wonsan)의 담당자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고, 또한 한국교회협의회(KNCC) 담당자 27인 중 한 명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이때는 아직 한국장로교 총회가 KNC를 탈퇴하기 전이었다. 1931년 12월 18일 4차 중앙협의회에서 그녀는 해외여선교회(WFMS)의 장학대부기금(Student Loan Fund) 위원회의 일원으로 선정되어 당시 조선에서는 받을 수 없던 고등교육을 희망하는 여자 학생들을 위한 기금 마련에 힘썼다. 1933년 6월 16일 9차 중앙협의회에서 그녀는 루씨학교의 이사로 추천되었고 1월 15일 15차 회의에서 임명되었다.
당시 한국 감리교는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치면서 교세가 눈에 띄게 성장한 상황이었다. 미국 북감리교와 남감리교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 이후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켜나갔는데, 특히 교육과 신학 교육의 협력을 통해 이러한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교육 분야에서의 협력으로 좋은 분위기가 형성된 감리교는 1930년 하나의 감리교회로 통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한국 선교의 시대적 배경에서 메이너가 수행한 교육 분야에서의 헌신적인 사역은 신학 교육의 발전뿐만 아니라 양 교단이 하나의 감리교로 통합되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3.1운동 이후 무력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며 청년 세대를 해체하고 일제에 충성하는 엘리트를 양성하려고 했던 일제의 만행 앞에 그녀의 교육 활동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 의식을 증진시켰으며, 특히 배화여학교와 이화여전, 루씨여학교 등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실천한 교육은 한국 근대사에서 여성의 인권을 신장한 귀한 헌신이었다.

4. 미국 북감리교와 남감리교 통합의 기여한 선교사
지속해서 협력관계를 유지해오던 남북 감리교는 1930년대에 이르러 합동의 길을 모색했고 1930년 5월 미국 남감리교 총회의 승인을 얻어 조선감리교회를 조직하였다. 필자는 메이너의 이름을 이듬해 2월 16일에 열린 첫 중앙협의회부터 1938년 1월 19일 열린 18차 중앙협의회까지의 참석자 명단에서 찾을 수 있었다.
1차 중앙협의회에서 한국어 서기로는 김인영이, 영어 서기로는 메이너가 임명되었다. 「기독교조선감리회중앙협의회록외」 (1930-1938)과 (1931-1940)에는 중앙협의회의 회의록들이 담겨있는데, 당시 서기였던 메이너는 1931년 2월 1차 회의부터 1933년 1월 8차까지의 회의록을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그녀는 8차 회의에서 서기 직책을 Miss Cooper에게 넘겨주고 실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와 감사팀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계속해서 실행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메이너는 1933년 6월 16일에 열린 9차 중앙협의회에서 1934년 4월까지의 안식년을 승인 받았고, 1934년 9월 6일 12차 회의에서는 그녀가 학업을 계속하도록 안식년을 연장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필자가 그녀의 이름을 회의 참석자 명단에서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36년 1월 15일에 열렸던 15차 회의에서였다. 따라서 그녀는 12차 회의와 15차 회의 사이의 어느 시점에 한국으로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감리교의 중앙협의회에서 남감리교 대표자 중 한 명으로 참석하여 약 10년 동안이나 수고하고 헌신한 그녀의 공헌은 비록 주역의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 귀중한 조력자의 역할이었다. 그녀의 보이지 않는 수고와 섬김을 통해 조선감리교는 하나의 감리교로서 한국에서의 교육 사업과 선교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갈 수 있었다.
작성일:2019-12-12 23:20:02 36.39.4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