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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3-6_B115_서미두선교사_권영성

닉네임
6반권영성
등록일
2019-12-13 00:28:19
조회수
925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15_권영성.hwp (200192 Byte)
내한 선교사 B115
Smith, william H(1892-,)
2017210340
3학년 6반 권영성
박용규 교수님 “한국교회사”


1. 들어가는 말
필자는 대구 출신으로 1906년 창립한 미션스쿨인 계성고등학교에 98회로 입학하여 3년동안 종교반장으로 활동했다. 입학할 땐 건학이념이 크게 와닿지 않았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체험하고 경험한 복음으로 변화되고는 그 건학이념을 묵상하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던 기억이 있다. 이후 계명대학교에 있는 기독교학과로 진학하여 교목실에서 교내 근로와 채플장학생을 3년 동안 지내며 학교의 다채로운 행사 가운데서 회자되는 선교사님들을 볼 때 가슴 뜨거워졌다. 선교사님들의 관사를 꾸며 놓았던 청라언덕에서 사과나무를 보며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고자 먼 땅 가운데서 고민하고 함께 울던 그들을 생각하며 필자도 선교사의 꿈을 꾸고 있다. 복음의 빚진 마음을 어찌 다 갚을 수 있겠냐 만은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빚을 또한 복음의 통로 가운데 흘려보내고 싶어 마음을 다지며 우리나라에 오셨던 ‘서미두’ 선교사님에 대해 써내려 가려 한다.

2. 기본사항

이름
Smith, william H(1892-,)
한국 이름
서미두 김흥수, 「내한 선교사 총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474

생몰연도
1892.10.27.-1983.10.24 이상정, 「구세군 사관학교 100년사」, 구세군 사관학교, 2010, 88

가족
아내 Dorothy W. Smith
딸 Doreen(1924-1928.6)
3남
출신 및 소속
영국(UK). 구세군(SA)
한국 사역기간
1925-1940(16년)
학력
런던 만국사관학교


3. 선교사 소개
1) 연표
1892년 10월 27일 출생

1924년 딸 Doreen을 낳음
1925년 12월 6일 내한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
1929년 딸 Doreen의 죽음
1929년 7월 11일 참모정위 승진 및 제 5대 구세군사관학교 교장 임명
1939년 4월 30일 전장 서기관 임명
1940년 뉴질랜드 파송
1978년 내한
1983년 10월 24일 사망

2)서미두
1892년 영국에서 태어난 Smith, william H 서미두, 그는 런던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제본영 사관학교에서 여러해 동안 사역을 했다. 그리고 1925년 겨울 구세군 선교사로 한국으로 온다. 본영사관학교에서 사역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구세군 사관학교에서 일하다가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 이상정,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7
이 일어났다.
3) 구세군 분규 사건
1926년 한국 기독교인의 자아의식이 고양되고, 선교사 중심이었던 한국 교회를 한국인 중심의 민족교회로 만들고자 했던 자각과 주체의식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구세군에서도 동일한 움직임이 나타나는데, 영국 중심의 서양사관들의 한국 문화와 이질감 있는 운영방식의 부정적 행태에 반항하여 분규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909년 한국 사관의 월급을 15원에서 10원으로 감했고, 1911년 사관학교 2기생이 따지자 학교가 임시 휴교가 되었다. 당시 한국 사관생도들은 극도의 생활고와 영양부족에 시달리고 있언 시절이다. 권경찬, 「한국구세군사(10)」, 사관 제 26권 3호, 1966, 3
더 나아가 3대 사령관 스티븐슨이 대전 지역에 후생학원 후생학원은 1956년 10월 23일 설립, 구세군 정신을 바탕으로 보호가 필요한 0 ~ 18세 아동 및 청소년의 보호 및 양육, 교육, 생활지도를 통한 자립성을 지닌 건강한 민주 사회인으로 육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원사를 지을 때, 변소를 짓지 않도록 했는데 그 이유가 인도에는 변소가 없고, 대변은 까마귀가 치운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본영에서 중요한 일을 진행할 때 한국 사관들을 고의로 빼고 진행하는 것이 불만을 느낀 김덕준 사관이 진정서를 제출하자 한국사령관이 그를 면직시켜버린다. 1926년 동아일보 “구세군도 말성 조선사관과 영국사관 서로 틀려 문제”, 「동아일보」, 1926년 10월 10일
와 조선일보 “대구 백인사관 수해구금을 횡령, 조선인 구세군 일동은 회계장부 공개 육박”, 「조선일보」, 1926년 11월 16일
“해주구세군영에도 사관배척운동”, 「조선일보」, 1926년 11월 19일
에서도 구세군 사건을 기사로 다룬다.
구세군 분규사건의 원인은 일부 서양 사관들의 인종·민족 차별적 문제, 본영에서 한국 사관들의 소외와 기회 박탈, 재정적 불신과 생활고, 서양 사관들의 윤리적 문제, 마지막으로 부모 봉양과 같은 문화적 차이 등이 촉매제로 작용해 한국 사관과 구세군인들은 선교사관들에 대한 반감이 폭발하며 세계 구세군 대장이 한국을 방문하는 일정 가운데, 가장 성하였던 영덕 덕평에서 거사를 준비했고 이를 제지하는 서양 사관들과의 충돌로 인해 과열되며 교권을 쥐고 있던 학교의 면직 등의 징계로 상황을 정리하고 점차 와해되어 갔다.

4) 영동 지방 장관으로 분규 수습
이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서미두 선교사를 영덕지방장관으로 임명하여 가장 강했던 영덕 지방의 사태를 수습했으며, 이후 영동지방장관으로 재직하게 되었다. 장형일, 「救世軍의 役軍」, 羅敎育基金會, 1988, 54
그가 지방관의 임무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딸 도린 스미스(또린 스미드)가 죽게 되었다. 한국 나이로 5살, 병에 걸렸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당시 영동지방본영 뒷산에 묻혔다가 2000년 9월 양화진으로 이장되었다. 양화진 묘비,
딸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아픔 가운데서도 지방관의 임무를 잘 수행했다.

5)한국 구세군 사관학교 교장
1929년 7월 11일 참모 정위로 승진되며 구세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을 받아 교장의 일을 시작한다. 한국인 후진 양성에 박차를 가하며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했다. 언어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했으며, 1939년 4월 30일까지 재직한다. 여러 학생들의 결혼 주례도 집례하였는데 그를 무척 자상한 교장으로 회자한다. 이상정, 「구세군 사관학교 100년사」, 구세군 사관학교, 2010, 89


6) 교장의 기도
교장 재임시 그의 5가지 기도 제목이 있다. 이상정, 「구세군 사관학교 100년사」, 구세군 사관학교, 2010, 90

1. 죄악을 이기고 온전히 승리할 수 있도록, 이를 위해 성령세례를 받고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위하여
2.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3.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도록
4. 영적인 면에서 사관학생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5. 부흥을 위해서

7) 신사참배
신사참배의 시늉을 요구했던 사령관을 무시하고 성경적 기준으로 봤을 때, 신사 참배를 우상으로 생각하며 그는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일본 경찰의 감시로 인한 고통받게 된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장의 자리에 있던 서미두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그를 존경하는 많은 학생들 또한 신사참배에 대한 바른 인식과 태도를 가졌을 것이다. 사관학교 학생들의 은밀하고 집단적인 신사참배 거부 사건도 스미스 교장의 재임 시기에 있었으며, 그가 있었기에 모범이 되었고 학생들은 바른 가치관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경찰의 감시는 더욱 삼엄해졌고 그는 고통 가운데 시간을 보내게 된다.

7) 전장 서기관 이후
1939년 전장서기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감시로 인해 그는 ‘죽음의 감정’을 느끼는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무리 하게 된다. 그리고 1940년 한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파송을 받아 가게 된다. 뉴질랜드에서도 청년부 서기관을 시작으로, 뉴질랜드 구세군 사관학교장을 역임하여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쏟고 이후 다시 인도로 파송을 받게 된다. 1957년 은퇴를 하고는 뉴질랜드로 거주하며 여생을 보내게 되는데, 1978년 부인과 함께 잠시 내한을 하게된다.

4. 사진 및 기타자료

양화진 D-23 Doreen Smith의 비석 http://www.yanghwajin.net/yhj_db/db_out.php?index=171 , 12월 12일


제 5대 교장 참모정위 스미드(W. H. Smith) 1929. 07. 11. ~ 1939. 04. 30.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홈페이지 역대 총장 http://www.gufot.ac.kr/korean/viewforum.php?f=91 , 12월 12일


5. 참고자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홈페이지
아동양육시설 후생학원 홈페이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홈페이지

김흥수, 「내한 선교사 총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이상정, 「구세군 사관학교 100년사」, 구세군 사관학교, 2010
이상정, 「1926년 구세군 분규사건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7
장형일, 「救世軍의 役軍」, 羅敎育基金會,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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