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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3-6 / B141/ Underwood.Richard F(1927-NP)

닉네임
이재선
등록일
2019-12-13 00:30:17
조회수
929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41_이재선.hwp (1354752 Byte)
내한선교사 - Underwood Richard F. 원득한 (1927~현재) 조사 과제

I. 기본사항

(원득한의 생애)서울에서 태어난 원 전 교장은 15세 때까지 한국에서 살다가 1942년 미국으로 들어갔다. 미국에서 고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는데, 광복 이후 한국으로 배치됐다. 한국과의 인연이 ‘운명’이라고 생각한 그는 미국에 돌아갔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해 재입대 하였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한국으로 복귀했다. 함흥, 원산, 흥남 등지에서 포로 심문을 담당했고, 휴전회담이 시작될 때는 문산에 배치돼 통역을 맡았다.

<사진 1.한국 전쟁에 참전한 언더우드 3세 원득한, 원재한, 원일한_KBS 명견만리>

한국전쟁 휴전회담에 통역장교로 활동했던 원일한, 언더우드 리처드(한글명 원득한) 형제가 전쟁용어 등 회담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들을 한국어로 조심스럽게 번역해 놓은 번역 노트로 ‘인권선언’, ‘포로교환’, ‘비무장지대’등 민감한 군사용어들을 적절한 한국어로 표기해둔 휴전회담 중 번역노트도 찾아 볼 수 있다.

<사진 2. 원득한, 원일한의 한국전쟁 휴전회담 중 번역노트.2012.영환.>

이에 더하여, 북한에 머물며 ‘스파이’ 역할까지 해본 경험은 한국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다. 1947년 원득한이 하사관으로 평양에서 3개월을 보냈다. 당시 서울에는 구소련의 연락장교가 여러 명 있었고, 평양에는 미군 연락장교 2명이 있었는데 원득한은 표면적으로 연락장교 차량을 운전하는 역할로 북한에 들어갔다. ‘운전병’ 신분을 활용, 원득한은 차량을 일부러 고장 내 수리공장을 찾아가 북한 사람들을 만났고, 이렇게 쌓은 친분을 통해 서류나 사진 등을 넘겨받아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그는 “그때 김일성까지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엔 김일성이 계급이 높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가 열심히 외쳐대면 들어주는 사람도 있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원득한이 군인 시절부터 한국인을 존중했던 일화 한 토막. 한 번은 서울 시내 좁은 길에서 자전거를 탄 한국인이 빨리 비켜주지 않는다고 미군이 밀어버린 적이 있었다. 바로 뒤에서 이 모습을 목격했던 원득한은 즉시 상부에 보고해 해당 미군이 징계를 받게 했다. 원득한은 “평양에 있을 때 내가 탄 차량이 다가가자 북한 아주머니가 논두렁으로 뛰어들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소련군은 길가에 한국인이 걸어가면 차로 치어서 논에 빠지게 하니까 차라리 먼저 뛰어드는 게 낫다’고 하더라”며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저질렀던 소련군보다는 낫겠지만, 미군이라도 한국인을 깔보는 듯한 행동을 할 때는 분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원득한은 제대 후 ‘직업’을 한국에서만 가졌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다. 서울외국인학교 교사로 출발, 1961년 교장에 오른 후 1992년까지 자리를 지키고 은퇴했다. 중간에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에 돌아가 1970년 럿거스대에서 교육행정학 석사를 따고 온 것을 제외하면 줄곧 한국에서 생활했다. 1970년대에는 연세대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이 서울외국인학교 쪽으로 진입하자 경찰 책임자를 따로 만나 학교에서 경찰을 몰아내고 연세대 학생들까지 지켜낸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시위하는 캠퍼스에 직접 들어가기 부담스러우니 우리 학교를 캠퍼스 진입에 이용하는 모양인데 그럼 우리도 시위를 하면 경찰을 철수시키겠느냐”는 게 그의 설득 논리였다.

은퇴 후로는 미국에 돌아가 살고 있지만, 원득한은 한국 생활의 추억을 항상 마음 깊이 간직하며 서울외국인학교 행사, 할아버지와 관련된 연세대행사 등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원득한의 가족사항)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한국명 원두우·1859∼1916) 사망 100주년을 맞아 연세신학공개강좌 ‘언더우드의 유산’에서 손자인 원득한은 “할아버지의 유산은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그 마음”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언더우드가(家)의 한국 사랑은 5대, 6대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이번 언더우드 사망 100주년 행사에는 모두 28명의 언더우드 후손이 모였다.

<사진3. 원득한(앞줄 왼쪽 세 번째)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 등 언더우드 선교사의 후손. 곽성호>

<사진4. 원두우 선교사의 손자, 증손자(녀), 고손녀까지 3대가 한자리에, 연세대>

아래의 사진은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 선교사의 3∼5대 후손들로서, 언더우드 3세 리처드 언더우드(Richard Underwood, 원득한) 전 서울외국인학교 교장과 언더우드 4세인 피터 언더우드(Peter Underwood, 원한석)와 부인 다이애나 언더우드(Diana Underwood), 원득한의 아들 프레드 언더우드(Fred Underwood), 원득한의 딸 마릴린 언더우드 버니(Marilyn Underwood Burney), 원득한의 딸 엘리자베스 언더우드(Elizabeth Underwood)와 그의 남편 데이비드 콜맨(David Coleman)을 비롯해 언더우드 5세인 원한석의 딸 멜리사 언더우드(Malissa Underwood)와 그의 사위 크레그 미첼(Craig Michell) 등이다.

<사진5. 언더우드 100주기’ 맞아 방한한 손자 리처드 언더우드, 연세대>

Ⅱ. 선교사 소개
1957년 선교사로 한국에 온 리차드 언더우드 Richard F. Underwood(원득한)는 한미재단 책임자로 1961년 까지 활동 하였다. 1961년에서 1962년까지 외국인 학교 교장으로 있었으며, 1963년 이후 서울 미연합장로회 선교부에서 선교사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Ⅲ. 사진 및 기타자료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 사망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그의 손자인 리처드 언더우드(89·한국명 원득한)는 고종황제가 할아버지에게 하사한 보검을 연세대에 기증함으로써 언더우드 가문의 한국 사랑을 이어갔다.

<사진6. 원득한 ‘언더우드 사망 100주년 기념식’ 맞아 연세대 방문, 문화일보 2016>

Ⅳ. 참고문헌

1. 문화일보, “할아버지, 총들고 高宗 곁 지켜… 난 6·25 터지자 자원입대”,2016년 10월 19일(水).
2. 연세뉴스, 연세대에 모인 언더우드家 후손, 2012,07,01.
3. 연세대 언더우드 기념관 언더우드 일가(원두우, 원한경, 원일한) 유품들_2012.1.25._영환
4.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316084&memberNo=24803186)
5.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atspress&logNo=221198802789&parentCategoryNo=&categoryNo=38&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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