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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_3-4_B015_구윤본

닉네임
구윤본
등록일
2019-12-13 01:37:52
조회수
775
첨부파일
 듀푸이 무덤.jpg (50139 Byte)
듀푸이 라발렛트 선교사 / Dupuy, Lavalette (1883-1964)

I. 기본사항

1. 이름 : Dupuy, Lavalette / 듀푸이 / 한국명 : 두애란(杜愛蘭)
2. 생몰연도 : 1883.01.28.-1964.06.02. (미국 노드캐롤라이나 데빗슨 출생)
3. 출신 및 소속 : 미국, 남장로교
4. 학력 : 위드로프대학 졸업
5. 경력
- 노드캐롤라이나 사범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
- 1912년 남장로교 교육선교사로 내한
- 순천 매산학교 개설, 성경과목으로 총독부인가 못 얻음
- 군산으로 이전, 멜볼딘 여학교 교장으로 성경, 영어 교수
- 주일에 마을 순회전도, 달성경학교, 여전도회 사경회 개최
- 군산 확장주일학교 책임자로 농촌 전도, 교회 지도자 배출
-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 1948년 재내한 했으나 건강 악화로 귀국
- 1964년 5월, 81세로 소천
6. 가족사항 : 없음
7. 논저 : 없음

II. 선교사 소개: 듀푸이 (Dupuy, Lavalette, 1883-1964)

1. 여 선교사의 신분으로 한국으로 오게 된 듀푸이
이 선교사는 미국 남 장로교회 소속인 여 선교사이다. 미국 노드 캐롤라이나주의 데이비슨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에서 태어났다. 윈드로프대학을 졸업하고 노드 캐롤라이나 주립 사범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1년 순천(順川) 스테이션을 개설하기 위해서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 선교부에서 대거 선교사를 모집할 때 여자인 몸으로, 이에 응모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다.

2. 한국에 와서 한 일들
당시에 듀푸이는 교육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물론 혼자 온 것은 아니었다. 비거 (Meta biggar)양과 함께 미혼 여성으로 순천에 안착했다. 그리고 농어촌 선교와 새로 생기는 순천 매산남・여학교가 성경과목 문제로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해 문을 열지 못했다. 이때, 군산 스테이션으로 옮겨 군산 멜본딘 여학교에서 9년간 교육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가까운 마을에 나갔다. 그리고 주일학교 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달(月) 성경학교가 겨울에 개설될 때마다, 그리고 여전도회 사경회가 될 때, 그들을 돌보며 가르치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듀푸이는 대체로 교육적인 일에 몰두하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3.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 선교사, 듀푸이, 그 이후의 삶
대동아 전쟁으로 한국 내에서 더 이상 선교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녀는, 1940년에 한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가 라버남 교회에서 교회 프로그램과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교회 부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휴가 성경학교를 담당하여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에 집중했다. 1948년에 듀푸이 선교사는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다시 선교 활동을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건강 이상으로 한국에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녀는 1964년 5월 자신의 고향에서 별세했다.

Ⅲ. 듀푸이 선교사가 섬겼던 학교들의 상황들
한국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은 대체로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을 때, 들어온 사람들이다. 듀푸이 선교사도 마찬가지였다. 혈혈단신 여자의 몸을 이끌고 한국으로 오는 것은 듀푸이 선교사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듀푸이 선교사가 순천으로 오기 전에 한국의 상황을 언급하려고 한다. 물론 위에서 듀푸이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어떤 일을 했는지 대략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듀푸이 선교사가 오기 전과 오고 난 후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과거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 없는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듀푸이 선교사가 오기 전, 특히 매산학교와 멜볼딘 여학교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동시에 이 학교들이 왜 없어졌는지, 어떻게 학교를 유지했는지 그 정황들을 알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듀푸이 선교사의 활동을 앞・뒤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을지 추측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1. 순천 매산학교

매산 남・여학교의 전신은 은성학교였다. 순천스테이션의 개척자였던 프레스턴과 코잇이 1910년 봄, 금곡동의 사숙에서 개교했다. 그리고 이듬해 매곡동에 새로 교사를 지어 이전했다. 이때 학교는 남학교와 여학교로 구분되어 있었고, 이 규모는 서당 정도의 수준이었다. 당시 순천은 아직 스테이션이 조성되기 전이었으므로, 선교사들도 순회의 형태로 교회와 교인들을 지도했다. 또 선교사들이 아직 한국어가 서툴렀기 때문에,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에 순천지역 교회의 청장년들이 교사를 맡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당국의 허락을 받고 1913년 9월 정식으로 개교했다. 당시 은성학교는 제법 인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교과목은 성경을 비롯해 역사・기하・한문・공작 등이었다. 그리고 일본어도 있었다. 그리고 1913년이면 이미 남학교와 여학교가 별도로 설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사이 은성학교는 위기를 맞게 된다. 1915년 총독부가 <사립학교규칙>을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허락을 받은 학교에서는 성경을 가르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학교는 종교교육의 금지를 제외한 일본의 모든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1916년 6월 폐교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 후 은성은 1921년 매산의 이름으로 다시 개교하게 된다. 이 상황들이 듀푸이 선교사가 순천에 왔을 때, 일어났던 일들이다.

2. 멜볼딘 여학교

멜볼딘 여학교는 원래 ‘군산 여학교’였다. 이 학교는 군산 남학교 즉, 군산 영명학교를 세운 전킨의 부인인 메리 레이번에 의해서 출발된 학교였다. 1902년 가을부터 1903년 3월 말까지 전킨 부인은 군산교회의 주일학교 여자반을 맡아 가르쳤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들은 남학생들처럼 공부를 배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읽기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전킨 부인은 일요일뿐만 아니라 월요일 아침에도 한 시간씩 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것이 모태가 된 학교가 바로 군산 여학교였다. 당시 스트래퍼 선교사는 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시작했다. 스트래퍼 선교사는 먼저 언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전킨부인은 성경과 산수도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자 반은 2개로 나누어졌다. 상급반은 성경 구절 암송을, 하급반은 언문을 배웠다.
군산 여학교는 잠시 중단되었다가 1906년 겨울, 불 부인에 의해 재개되었다. 선교부는 1907년 안식년으로 귀국한 불 부인을 대신해, 다니엘 부인을 여학교 담당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여선교사인 줄리아 다이사트가 수업에 동참하였다. 이 당시에는 약 30명의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후 군산 여학교는 중단 없이 1940년까지 지속되었다.
1908년 선교부는 각 스테이션에 여자 기숙학교를 하나씩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목포와 광주, 군산에 여학교 건물을 새로 짓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1909년 선교부는 군산 여학교의 명칭을 ‘멜볼딘 여학교’로 바꾸었다. 사실 이렇게 학교 이름을 만든 것은, 전킨 부인과 불 부인의 모교가 바로 미국 남장로교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던 메리 볼드윈 여자대학이었다.
특히 불 부인은 안식년 기간에 미국으로 돌아가 모교 후배들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래서 이 대학 학생들은 군산 여학교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멜볼딘 여학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1911년 선교부는 여학생들에게 중등교육을 확대하기로 했다. 그래서 전주와 광주에는 4년제 고등과를, 목포와 군산에는 2년제 고등과를 설치・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렇게 결정한 이유는 그동안 여성들도 중등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멜볼딘 여학교는 1913년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여학교가 남학교였던 영명학교와 달리, 총독부가 제정한 <사립학교규칙>의 모든 표준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13년 불 부인이 멜볼딘 여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63명의 학생들이 인가받은 학교의 새로운 기숙사와 교실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원수는 점점 늘어나서 1914년에는 총 83명이 되었다. 이 학생 수는 영명학교의 63명을 넘어서는 숫자였다.
그 후 멜볼딘을 담당했던 선교사로는 1914년 버클랜드가 교장으로 부임했다. 1915년에는 다이사트가 임시교장을 맡았다. 이때, 해리슨 부인 마가렛이 실과 운영을 맡았다. 1916년부터1922년까지는 듀피가 교장으로 멜볼딘 여학교의 발전을 주도했다. 그리고 듀피 교장은 학생들이 완전히 자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Ⅳ. 사진 및 기타 자료

<듀푸이 선교사의 무덤이다> -첨부파일 참조
작성일:2019-12-13 01:37:52 1.239.33.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