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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117 / Snyder Lloyd H(미국 MS) Lowe Elsie

닉네임
김동한2017210342
등록일
2019-12-13 03:14:47
조회수
813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6_B117_김동한.hwp (1483264 Byte)
Ⅰ. 기본사항

1) 이름: Snyder, Lloyd H.(스나이더 / 申愛道(신애도) / 미국 / MS)
2) 생몰연도: 1886.09.09.-1957.11.14 미국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타시 출생
3) 학력: 1906 프랭클린 마샬대학 졸업
1907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수학
4) 경력: 1908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1908-10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영어 강사로 봉직
1911-14 서울 YMCA 간사로 봉직
1915-20 귀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 YMCA 간사로 근속
1921 텍사스주 학교에서 근무
1922 재내한,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 부교장 봉직
1926-35 교장으로 승진, 송도제일보통학교 설립자 겸임
1931-41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선출, 영어 교수로도 출강
1941.2 연희전문학교 재단법인 이사로 피택되어 활동
1941.12 일제에 의해 추방
1947 내한, 서울에서 활동
1948 귀국
6) 가족사항
부인 : Loew Elsie
5) 참고문헌: <<기백>>9권; KMYB; Methodists와 Korea, 1930-60; 연세대학교사; 감리교사; 감리교요람 60; 교육대관(경기도편, 1930); 기감중부연회록, 1933,34,37; 감연합년, 1935; 청년회운동사; 남감리교사; 연세대학교 100년사; 한국감리교회 외국인선교사.




Ⅱ. 선교사 소개

<교육자로서의 스나이더>
1886년 9월 9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타시에서 출생, 1906년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거쳐 1907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08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영어강사로 1910년까지 봉직하였으며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서울 YMCA 간사로 봉직하였다. 1915년 다시 귀국하여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 YMCA 간사로 1920년까지 근속하였으며 1921년 텍사스주 학무국에서 교사자격증을 획등, 이듬해 텍사스주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922년 재차 내한,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부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26년 이 학교의 교장으로 승진하였으며 같은해 송도제일보통학교 설립자를 겸임하면서 1935년까지 근속하였다.


<스나이더 선교사 당시 서울 YMCA 역사>
서울기독교청년회는 구한말 열강의 침탈야욕으로 인해 겨레의 앞날을 가늠하기 어렵던 참으로 어둡던 시기에 민족의 자주와 개화를 갈망하던 청년들의 열정이 거름이 되어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쇄국으로 국제정세에 어둡고 정쟁으로 민중의 삶이 외면되어 쇠잔하는 국운에 이 겨레가 소망을 잃어갈 즈음, 교육․계몽․선교의 기치로 YMCA가 개화구국운동에 새 지평을 열게 된 것은 민족사는 물론 교회사적으로도 크레 자리매김된 은혜스러운 사건이었다.
창립 이듬해인 1904년 여름에는 일단의 개화청년운동 지도력들이 활성기독교청년회에 합류하면서 서울YMCA는 민족YMCA로서의 면모를 갖추게되었다. 옥살이에서 풀려나온 독립협회계 인사들 즉 이상재, 홍재기, 김정식, 이원긍, 유성준, 안국선 등이 연동교회에 입교한 다음 청년회에 가입하였고, 또한 옥살이에서 풀려난 이승만과 학생운동가 신흥우도 YMCA운동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원산감리의 격리생활에서 풀려나 서울에 돌아와있던 윤치호와,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김규식도 이들과 함께 YMCA에 가담하였다.
초창기 서울YMCA의 역점사업은 실업교육과 선교 및 체육활동이었다. 먼저 실업교육으로 1904년 가을부터 인사동(태화사회관 자리)에 마련된 임시회관교실에서 시작된 1주 3일의 야학은 150명 가량의 학생들이 수강하는 대단한 성과를 올렸으며, 선교활동으로는 1907년 이후 종교위원장 이상재의 헌신적인 지도로 한해에 754명이 입신을 선서하는 기록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만국기도일’에는 1,200명이 넘는 청년들이 YMCA강당에 운집하여 ‘구원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체육활동으로는 1907년에 농구, 1908년에 스케이트, 1916년에 배구를 각각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하여 보급하였다. 서울YMCA 창립 이후 10여년 간 국내적으로는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 1910년 8월 ‘한일합방조약’ 등이 강제 체결되는 수치를 당하고 우리민족은 급기야 나라 잃은 민족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막 그 싹을 틔운 서울YMCA로서는 이에 조직적인 저항력이 없었으므로 민족계몽을 통한 국권회복의 미래를 준비하게 되었으나 일제는 YMCA의 이러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감시를 강화하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파견’의 주동인물인 이준, 전덕기, 이상재는 서울YMCA와 깊은 관련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이에 일제는 1910년 ‘105인 사건’이라 불리우는 데라우찌 총독 암살기도 조작시나리오를 통하여 YMCA지도력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105인사건을 계기로 해서 윤치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이승만과 김규식은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YMCA 회원들을 매수하여 서울YMCA를 일본YMCA의 통제하에 두려고 하였던 ‘유신회’사건 또한 서울YMCA를 전복시키려는 일본의 음모였다.


<행정가로서의 스나이더>
다른 한편 남감리교 연회 창천 구역에 소속되어 재정위원(1934), 협동회원으로 활약하며 1931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선출되었고 1941년까지 중임하며 연전에 영어담당 교수로 출강하였다. 뿐만 아니라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인하여 추방되기까지 활약하였다. 1947년 다시 내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이듬해(1948) 귀국하였다.


<스나이더 선교사 당시 연희 전문학교 역사>
연희 전문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등 일제가 일으킨 사상 탄압 사건에 주요 교수진이 검거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일제 말기에 학교 경영진은 일제와 일정하게 타협하며 학교를 유지하려 했으나, 일제는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 1942년 8월 ‘적산(敵産)’이라는 구실로 재단 이사회를 해체하고 총독부 관리하에 두었다. 1944년 5월에는 결국 폐교되어 경성 공업 경영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연희 전문학교가 다시 재건하였고, 1946년 8월 종합 대학교인 연희대학교로 개편되었다. 그 뒤 1957년 1월 세브란스 의학대학과 통합하여 현재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스나이더의 부인>
그의 부인(Elsie Lowe)은 1909년에 내한, 개성 호스톤여학교 음악담당 교사로 봉직하다가 1921년 스나이더와 결혼, 남편을 도우면서 개성의 고려여자관 음악교사로도 활약하였고 1948년 귀국때까지 함께 한국 선교에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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