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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ryan, Nelson Augustus(1889-? , SB) / Bryan, Frances Allison(1891-?)

닉네임
유주성
등록일
2019-12-13 10:30:10
조회수
948
브라이언 선교사 / Nelson Augustus Bryan (1889-1967), Frances Allison Bryan

I. 기본사항

이름: Bryan, Nelson Augustus / 브라이언 /
생몰연도: 1889.11.7.-1967.5.21
출신 및 소속: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기간: 1951.-1956.
연표
1889.11.7. 미국 테네시주 레바논에서 출생
1909-12 컴베랜드 대학교 (Cumberland University B.A.) 졸업
1913-17. 미국 밴더빌트 의과대학(Vanderbilt University, M.D.) 졸업 및 의학박사학위 취득
1917-1920 미해군 군의관으로 복무
1920. 와렌기념병원에서 의사로 봉직
1929-42 남침례교 의료선교사로 파송, 이후 중국에서 활동
1946-49 2차대전 이후 다시 중국에서 활동, 공산화로 귀국.
1951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내한 1956. 정년으로 은퇴하고 귀국
1967.5.21. 향년 77세로 미국에서 사망
가족사항
부인: Bryan, Frances Allison / (1891-)
아들: John, Nelson Augustus / 1920-
딸: Ann, Augustus / 1923-
딸: Sarah Frances, Augustus / 1925-

II. 선교사 소개: 브라이언(Bryan Nelson Augustus, 1889-1967)

1. 뛰어난 의료선교사, 브라이언.

미국 테네시 주 레바논 출신인 브라이언은 1889년 11월 7일 태어났다. 이 작은 아이가 훗날 중국과 한국 의료 선교에 큰 이바지를 할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2살이 되던 어느 날, 브라이언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회심을 통하여 브라이언은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써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타 학생들처럼 브라이언도 20살 때에 컴버랜드 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무엇을 정공하는 지는 자료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4년제 학교를 3년에 졸업한 것을 볼 때 그는 학교생활을 무척이나 성실하게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건은 그가 대학교 3학년 시절이었던 1991년에 터졌다. 당시 미국은 제1차 그리고 제2차 대각성운동을 통해 전국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특히나 19세기 말에는 무디, 빌리 선데이, 그리고 R. A. 토레이 등의 탁월한 부흥사들을 통하여 미국의 수많은 대중들이 변화되는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 시기와 맞물려 미국 전역에 수많은 집회와 수련회 등이 열렸는데, 브라이언도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당시 시대 분위기 상 수많은 수련회를 다녔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1991년 어느날, 브라이언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블랙 마운틴에 위치한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Blue Ridge Assembly에서 열린 한 수련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그를 중국 선교사로 부르시고 계시다는 거룩한 부르심을 명확하게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브라이언은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였고, 당시 중국에 필요하며 또한 선교하기에 최적화된 의료 선교사로 나갈 것을 결단하게 된다.

1912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의 준비 끝에, 1913년 브라이언은 밴더빌트 의과대학원에 진학을 하게 되고, 무려 4년 만에 의학박사과정을 수료하게 된다. 오늘날로 말하면 3년간의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브라이언도 해야 했는데, 그는 미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최전선의 경험을 쌓게 된다. 군대에서 복무했던 이 경험은 훗날 그가 한국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1920년부터 브라이언은 정식 의사로서 미국 버지니아 주에 위치한 와렌 기념 병원에서 의사로 경험을 쌓게 된다.

1929년 브라이언은 드디어 고대하던 의료 선교사로 떠나게 된다. 남침례교는 브라이언을 의료선교를 위해 중국 산둥성으로 파송한다. 그곳에서 브라이언은 1942년까지 사역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만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전쟁 후 1946년 중국으로 돌아와 의료 선교 사역을 이어갔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기 시작하자, 브라이언은 더 이상 중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나머지 미국으로 철수하게 된다. 그런데 중국에서 철수한 브라이언은 그의 선교 사역이 끝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절실히 필요한 사역지를 이미 예비해놓으셨고, 브라이언은 1951년 한국으로 파송 받아 1956년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환자들을 돌보며 한국에서의 남침례교 의료 사역의 토대를 일구어 냈다.

2. 중국 선교사, 이후 한국에 오다.

브라이언은 대학교 시절, YMCA 집회에서 중국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고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그는 의과 대학원에 진학을 하여 의료선교사로 차근차근 준비하였고, 1929년 드디어 중국 선교사로 파송 받아 본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중국 사역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다. 20년이라는 중국 사역 기간 동안, 브라이언은 두 번이나 타의에 의해 중국을 떠나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중국으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냈다.

아마도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나서 어쩔 수 없이 그 나라를 떠나야 했던 브라이언은 지금껏 그랬듯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세 번째 입국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브라이언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국 상황에 가장 적합하고 준비가 되어있는 브라이언을 부르셨고, 그는 한국에서 아름답게 의료 선교를 감당하고 은퇴를 하였다.

브라이언이 군의관으로 복무했던 경험과 그의 의료 선교 경험은 모르긴 몰라도 6.25 한국 전쟁이 끝난 후 한국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브라이언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자였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내 뜻과 내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12살 때 회심했던 것부터, 20대 선교사로 헌신하고, 의사라는 좋은 직업을 마다하고 20년을 중국에서 사역하며, 이후에는 자신의 부르신 곳이 아닌 한국이라는 땅을 가슴에 품고 왔던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자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3. 미국 남침례교 한국선교회의 병원을 설립하다

미국 남침례교의 한국 진출은 다른 교파에 비해 상당히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1950년 최초의 남침례교 선교사 에버내티(J.A.Abernathy)가 내한한 이후부터 본격적인 남침례교 선교사업이 한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1950년은 마침 6.25라는 비극이 한국 땅에서 일어나던 해였다. 에버내티의 내한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사역의 확장을 이루어가던 중, 남침례교 선교사업도 6.25를 겪으며 큰 시련을 맞게 된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한국의 사정이 급격히 변화를 맞이하자, 에버내티는 본국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에버내티의 긴급한 도움 요청에 의해 본국 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는 다름 아닌 브라이언이었다. 브라이언은 공산화로 1년 전 중국에서 본국으로 귀국한 후 다음 선교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중국으로 부르심을 받은 에버내티는 마침 한국의 사정과 함께 의료선교사를 요청한다는 에버내티의 편지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다.

1951년 의료선교사로 부산으로 입국하자마자, 브라이언은 부산 충무로로 달려가 천막으로 가설 병원을 설치하고 구호사업과 무료진료를 시작하였다. 부산 충무로에서 시작한 침례교 의료선교 진료소는 이 후 부산 영도구로 이전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산 왈레스 기념 침례병원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1951년의 항도 부산은 6.25 전쟁 때의 피난민들이 마지막 집결지로 몰려들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브라이언 선교사는 오로지 혼자서 한국인 의사 한 명과 간호사 두 명의 도움을 받아 1951-1953년 3년 동안 하루에 600-700명의 환자를 진료하면서 사역을 감당하였다. 이후 1953년, 간호선교사였던 브레넘, 힐, 그리고 라이트 선교사가 합세한 후 의료사역은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남침례교의 의료사업은 부산 시민과 정부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고, 급기야 1953년 나요한 선교사가 충무로에 있는 2층 적산 가옥을 구입하여 의료진료소로 개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병원 건물에 대한 필요가 있자, 남침례교 선교사들은 본국에 지원 요청을 하였고, 1954년 본국에서 병원 설립과 건축을 위한 자금을 지원받음과 동시에 병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브라이언 선교사는 필요 자금이 채워지자마자 건축 공사에 전념하여 부산 영도구 영선동에 병원을 건축하게 시작했고 1955년 11월 15일 마침내 숙원사업이었던 남침례교 병원을 완공하였다. 병원이 세워지기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브라이언 선교사이었으나, 그는 1956년 4월 1일에 은퇴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라이트 의료 선교사(Robert. M. Wright M.D.)가 초대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병원은 대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 병원의 머릿돌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은 육체적 및 정신적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모든 생명들에게 헌납된 것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중국의 선교사로 일생을 살며 봉사하다가 죽은 윌리암. 엘. 왈레스 의사님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본 병원의 목적은 1.환자 치료 (Healing), 2.복음 전도 (Preaching), 3.의료요원 교육 (Teaching)와 같다. 테네시 주의 한 사람이 한국 기독교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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