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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69 / Nash, William L. / 3학년 5반 / 2015210286 / 김우림

닉네임
김우림
등록일
2019-12-13 12:08:53
조회수
678
첨부파일
 선교사 조사(내쉬 윌리엄)(3학년 5반 2015210286 김우림).pdf (2282349 Byte)
내쉬 윌리엄 선교사 / Nash, William L. / 마가레트 선교사 / Light, Margaret

3학년 5반 2015210286 김우림

Ⅰ. 기본사항
<내쉬 윌리엄>
1. 이름 : Nash, William L. / 내쉬 윌리엄
2. 생몰연도 : ?
3. 출신 및 소속 : 미국 / YMCA
4. 한국선교기간 : 1921 – 1930
5. 경력
1921 YMCA 간사로 내한, 청소년과 학생사업 담당
서울중앙기독교 청년회 간사로 소년부, 학생부, 농촌부 간사
1923 시작된 농촌사업의 계획 추진위원으로 활약
1925 마가레트와 결혼
1925-30 서울중안 청년회 신흥우 총무와 평양청년회, 국제 YMCA와의 삼각관계에 얽힌
불화로 본국으로 소환
6. 가족사항 : Light, Margaret
7. 논저 : ?

<마가레트>
1. 이름 : Light, Margaret / 라이트 마가레트
2. 생몰연도 : ?
3. 출신 및 소속 : 미국 / 미남감리교회
4. 한국선교기간 : 1923-1930
5. 경력
1923년 내한. 철원에서 전도활동과 어학공부
1925년 내쉬 윌리엄과 결혼
1930년 귀국
6. 가족사항 : Nash William L.

Ⅱ. 선교사 소개 : 내쉬 윌리엄(Nash, William L.)

1. 한국 YMCA의 독립을 위한 해외 활동
한국 YMCA는 창설 당시 단독으로 YMCA세계 연맹에 가맹하지 못하고 중국, 한국 및 홍콩
YMCA 전체위원회를 통해 가맹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5인 사건 때 한국 YMCA는 전체위원회와 관계를 끊고 일본 YMCA와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이때 당시 총무 질레트는 국외로 추방당하고, 부회장 윤치호는 105인 사건 주모자로 몰려 투옥되고, ‘황성’대신 ‘조선중앙’이란 명칭이 강제로 붙여져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개명되는 동시에 1913년 4월 12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대표자 회의에서 양측 YMCA의 관계 조항을 헌장에 삽입하기에 이르러, 끝내 한국 YMCA는 일본에 예속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 YMCA는 이 관계 조항을 1914년 4월 2일 한국 YMCA 연합회 조직 총회 때 통과시켰고, 일본 YMCA는 1916년 7우ㅓㄹ 23일 제 5회 동맹 총회에서 통과시킴으로써 최종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 수치스런 관계 조항을 뒤엎고 한국 YMCA가 완전히 독립하여 단독으로 세계 연맹에 가맹하도록 여러 노력이 있었다. 최초로 이 문제를 꺼낸 것은 1922년 5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YMCA대표자 회의다. 이 회의를 통해 한국 YMCA의 독립을 건의하였다. 그리고 1922년 4월 4일 부터 9일까지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학생기독동맹대회에 대표를 파송했는데 그때 회장 이상재, 총무 신흥우, 간사 이대위, 내쉬 등과 이화학당의 김활란, 광주의 김필례가 참석했다. 이 결과 1923년 열린 한국 YMCA 연합회 제 3차 3년 총회에 보고되고, 1924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YMCA 세계 연맹회의에서 통과되어 한국 YMCA는 단독으로 세계 연맹에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2. 농촌운동의 기본 계획과 국제 제휴
제 1차 농촌 기초조사를 마친 YMCA 당국은 1924년 신흥우 총무를 미국에 파송하여 당시 YMCA 국제 위원회 총무 모트, 브로크만, 페니 등과 만나 레이크 플래시드에서 5인 회담을 했다. 이곳에서 5가지 합의를 보았다.
이러한 합의를 본 후 YMCA는 또 다른 회의를 가졌다. 1926년 4월 5일부터 9일까지 5일간 서울에서 한국 YMCA의 농촌 사업을 연구 촉진하기 위한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이다. 참석한 사람은 한국 Y측에서는 윤치호, 이상재, 신흥우, 구자옥, 홍병선 등 5명이다. 본래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 간사로 브로크만, 반하트, 내쉬, 그레그 등 4명도 참석했다. 그리고 농촌 사업의 전문 간사로 새로 파송되어 온 외국인 기술자로 에비슨 등 2명 그리고 YMCA 국제위원회를 대표하여 브로크만, 라이언 등 2명 총 13명이었다. 이것이 곧 간부 지도자들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 농촌 운동의 필요성, 목적, 재정 조달, 출판물 조달, 실무자 훈련,외국인 감사들의 임무 등에 대해 논의 결정했다.

3. 불화와 본국 소환
신간회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월남 이상재가 세상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과 언론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러나 이상재가 잠시나마 영도하던 신간회는 1931년을 기하여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YMCA는 국제위원회가 한국에 파송했던 농촌 사업 전문가들을 재정난으로 하나씩 소환하기 시작함에 따라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중에도 총책임자격이며 유력한 농정가로 활약하던 클라크마저 소환해 가려 하자 이에 당황한 신흥우 총무는 그 대신 내쉬를 소환해 가기를 원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YMCA 안에는 내분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외국인들이 반발했다. 신흥우 총무의 사업 정책에 대한 시비가 인 것이다. 이 시비에서 관북지방을 담당하던 번스는 관서지방을 담당하던 내쉬와 한 패가 되고, 서울 지방을 담당하던 반하트는 호남지방을 담당하던 에비슨과 한 패가 되어 신흥우 총무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외국인 간사들까지 남북으로 갈라진 셈이다. 곧 번스와 내쉬는 1930년 여름, 원산 명사십리 해수욕장에서 휴양을 하다 회합들 갖고, “신흥우 박사가 농촌 사업 정책을 공개적으로 토론하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대하여 반하트도 맞서게 되었다. 한편 YMCA 국제 위원회는 조사관을 파견하여 심각한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결국 1930년에 내쉬가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 결과 학생 사업, 소년척후대 사업, 농촌 사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Ⅲ. 윌리엄 내쉬의 편지(보고서)
1. The Korean Daily Vacation Bible School Movement for 1924
2. The Korea Mission Field(A Monthly Journal of Christian Progress)
3. Student Conference of the Korean Y.M.C.A. National Council
4. Winning the Students in Government Schools

Ⅳ. 참고 문헌

[단행본]

김승태, 박혜진 편. 『내한 선교사 총람』. 서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윤춘병. 『한국 감리교회 외국인 선교사』. 서울: 감리교본부 교육국, 1989.

이만열. 『The Korean Mission Field』.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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