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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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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James Hall&Rosetta Hall / 3학년5반 / 2017210276 / 김성근

닉네임
김성근
등록일
2019-12-13 13:10:23
조회수
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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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선교사 / Campbell, Edward L. / James Hall&Rosetta Hall / 3학년5반 / 2017210276 / 김성근


제임스 홀&로제타 홀 / James Hall&Rosetta Hall

I. 기본사항
I.I 제임스 홀
1. 이름: william James Hall / 윌리엄 제임스 홀
2. 생몰연도: 1860.1.16.~1894.11.24 / 캐나다 온타리오주 글렌뷰엘 출생
3. 학력: 1885 퀸즈대학교 의과대학 입학
1889 뉴욕 벨레뷰병원 의과대학으로 옮겨 졸업
4. 출신 및 소속: 미감리회 의료선교회
5. 한국선교기간: 1891.12~1894.11.24
6. 연표
1) 퀸즈대학교 재학당시 YMCA 지부 조직, 청년 운동
2) 1891.12 미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
3) 1892.3 북한지방 순회여행, 평양에 선교부 개척 주장
4) 1893.2 노블과 평양, 평안도지역 순회전도, 평양에 집구입
5) 1894.1 가족과 평양으로, 이주, 병원, 학교, 교회사업 시작 학교는 광성학교로, 교회는
남산현교회로 발전
6) 청일전쟁 때 부인과 부상자 치료에 헌신
7) 전염병으로 서울로 호송되어 치료중 소천
8) 홀기념병원(기홀병원)이 평양에 건립됨
7. 가족사항
Hall. Rosetta Sherwood(부인), Hall, Sherwood(아들)

I.Ⅱ 로제타 홀
1. 이름: Rosetta Sherwood Hall / 로제타 셔우드 홀
2. 생몰연도: 1866.9.19.~1951.4.5 / 미국 뉴욕주 설리반카운티 출생
3. 학력: 1889 펜실베니아여자의과대학 졸업
4. 출신 및 소속: 미감리회 의료선교회
5. 한국선교기간: 1891.12~1894.11.24
6. 연표
1) 1889.8 뉴욕 빈민가에서 자원 의료봉사 중 홀을 만나 약혼
2) 1890.10.13. 미감리회 의료선교사로 정동의 보구여관에서 하워드의 후임으로 활동 시작
3) 1892.6 약혼자 제임스 홀과 결혼, 보구여관에서 간호사 양성교육(박에스더-최초 의학 박사)
4) 1894.11.24. 청일전쟁 부상병 치료 중 전염병으로 남편 소천
5) 1897.1 홀부인이 보낸 기금으로 평양에 기홀병원 설립
6) 1917 서울로 이주, 동대문부인병원 의사, 약제사로 활동
7) 1920- 여자의학반 조직, 한국인 여자의사 양성
8) 1928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발전->고려대학교의과대학
9) 구세요영원 내에 로제타기념예배당 건립
10) 뉴저지 인식관에서 소천, 화장후 양화진에 뿌림
II. 선교사 소개
Ⅱ.Ⅰ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K. D 1860-1894)
1. YMCA YMCA란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의 약자로 세계적인 기독교 평신도 운동단체로서 1844년 6월 영국 런던의 히치콕로저스 상점의점원이던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가 12명의 청년들과 함께 산업혁명 직후의혼란한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 상태의 개선을 도모하고자설립하였다.
운동과 뉴욕 빈민가 선교 사업
1885년 온타리오 주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제임스 홀은 YMCA 지부를 조직하고 청년운동에 힘썼다. 1887년 ‘해외선교자원학생운동’의 인도지역 책임자인 포먼(J. Forman) 목사가 퀸즈대학에 와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 선교사로 지원하였고, 선교사 지원 학생들로 이루어진 ‘학생자원회’ 활동을 통하여 선교사로서의 꿈을 키워 나갔다. 같은 해 여름 매사추세츠 주 노드필드에서 개최된 무디 여름 수양회에 참석하였고, 그곳에서 국제의료선교협회 이사 도우넛(G,D. Dowknott)을 만나 뉴욕의 벨레뷰 의과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1899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미감리회에서 하는 뉴욕 빈민가의 선교사업에 참여하여 매디슨가의 의료선교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이곳에서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 출신의 여의사 로제타(Rosetta Sherwood)를 만나 이듬해 약혼을 하였다. 1890년 8월 약혼녀 로제타가 먼저 한국 의료선교사로 출발하였고, 그는 1년 후인 1891년 12월 미감리회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나왔다.

2. 결혼과 평양 선교
1892년 3월 제임스는 존스(G.H Jones) 미국 북감리회의 개척 선교사. 1888년 5월 한국에 와서 20년간 서울과 인천, 강화 지역에서 활동했다. 1891년까지 배재학당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했으며, 1890년 집사목사로, 1891년 장로목사로 안수 받은 뒤 1892년 제물포 선교 관리 책임자로 부임하여 내리교회의 제2대 담임목사가 되었다.
선교사와 함께 북한지방 순회여행에 올라 개성, 서흥, 대동, 평양, 의주까지 여행한 후에 자신의 선교구를 평양으로 정할 것을 굳힌다. 같은 해 6월 27일 서울 올링거 목사의 주례로 로제타와 결혼하여 중국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평양 개척 선교사로 임명을 받아 같은 해 9월 평양을 또다시 다녀온다. 1893년 2월 노블(W.A Noble) 한국명 노보을. 미국 펜실베니아 스프링데일에서 출생. 와이오밍신학교와 드루신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와이오밍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 결혼하여 3개월 후인 10월 17일 한국에 선교사로 입국하였는데, 여기에는 1년전 한국에 와 활동하던 홀과의 우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3년동안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894년 홀이 사망하자 그의 후임으로 평양선교회 문을 열었다. 15년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북지방 교회를 돌보다가 서울로 이주하여 1933년 은퇴하기까지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선교사와 함께 또다시 평양 및 평안도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이 여행에서 평양 서문통에 한옥 한 동을 구입하여 북한지역 선교의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평양에 선교를 시작한 것은 감리교회가 처음이었다. 1894년 1월 김창식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였다. 구입한 한옥에서 교회, 의료, 교육사업을 동시에 시작하였는데, 교ㅛ회는 남산현교회로, 학교는 광성학교(광성소학교, 광성중·고등학교, 처음에는 격물학당)로, 병원은 평양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3. 선교 활동의 고난과 핍박
제임스 홀의 선교 사업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돈을 빼앗으려는 불량배들(발과 김낙구의 아들 김호영)의 행패도 당해야 했고, 1894년 5월에는 기독교에 반감을 갖고 있던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과 평안감사 신덕균이 홀의 조사인 김창식을 비롯한 장로교의 한석진 등을 연행하여 사형시키려는 사건도 일어났다. 평양 관아에서 음모가 꾸며지는데, 전 해에 돈을 거두려다 실패한 김호영이 나섰다. 그는 평양 관아의 하급관리였다. 김호영은 치안의 문제를 내세워 평안가마 신덕균을 부추겼고, 신덕균은 다시 평안도 관찰사 민병석에게 교인을 체포를 건의하였다. 중앙청치판도에 예민한 민병석은 선교사를 체포함으로 야기될지 모를 한미 양국간의 외교적 마찰이 두려워 교인들만 체포하였다. 명분은 이교를 수입하여 다수의 양민을 유혹하게 했다는 것이지만 교인들의 돈을 뜯어내려는 목적이 더 컸다. 서울에 스크랜턴에게 이 사건을 알려 영국 및 미국 공사관이 개입함으로 다행히 석방되었다.

4. 청일전쟁과 죽음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평양은 청일 양국 군대의 혈전장이 되어 수많은 사상자들이 나왔다. 홀은 김창식에게 평양 일을 맡기고 서울로 피하였다가 10월에 마펫과 함께 평양으로 귀환하여 밀려드는 부상자와 환자를 돌보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과로가 겹쳐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아내의 극진한 치료와 간호를 받았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11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내한한 지는 4년 만이요, 결혼한지 2년 만에 아내와 아내와 어린 아들, 딸(유복자)을 남기고 떠남으로 한국 감리교회에서의 첫 순직자가 되었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고 1894년 11월 27일 배재학당에서 노블 선교사의 주례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5. 결론
캐나다 오타리오 주 글렌 뷰엘에서 아버지 조지 홀과 어머니 마가리트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제임스 홀은 어릴 때부터 아일랜드 출신의 청교도적 장로교인이며 석공이었다. 경건한 신앙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에게 의료 기술을 선물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길 서원하였다. 제임스 홀은 대학 시절부터 준비된 선교사였다. YMCA 활동과 미감리교 뉴욕 빈민 구제 사업에 동참하여 사역을 하였다. 제임스 홀은 가난과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은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약혼한 아내를 따라 선교지를 중국에서 한국으로 바꾸는 따뜻한 남편이기도 하였다. 제임스 홀은 청일 전쟁의 긴박한 순간에도 한 명의 병자를 더 치료하기 위해 힘썼고 이로 인해 과로와 전염병으로 소천하게 되었다. 제임스 홀은 이름 없는 작은 나라에 들어와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최선을 다해 선교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서 한 영혼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Ⅱ.Ⅰ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1. 출생과 선교를 위한 준비
미국 뉴욕 주 설리반 카운티에 있는 리버티에서 아버지 셔우(R. sherwood)와 어머니(P.G Sherwwod)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장을 경영하였다. 그곳에 있는 체스넛리지학교와 뉴욕의 오스웨고 주립학교를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얻어 1년간 체이스넛리지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였다. 그곳을 방문한 미감리회 토번 감독과 그의 부인이자 의사인 챈들러의 인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의료선교라는 강연에 감동을 받아 의료선교사가 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6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889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감리교 여성 자선의 집에 지원하여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선교사업을 하면서 그의 남편이 될 홀을 만나게 된다. 로제타는 처음에 중국 의료선교사로 가려 했으나 하워드의 후임으로 한국에 나오게 되었다. 그 무렵 하워드에 의해 한국에서 시작된(1887) ‘보구여관’ 당시 한국 감리교의 의료선교에 대한 관리자였던 스크랜튼(Scranton, W. B.) 목사가, 한국에는 여성이 남자병원에 갈 수 없는 풍속이 있는 까닭으로, 한국 여성들만을 위한 병원설립기금의 청원을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승인되어 같은 해 10월에 미국 감리교 여의사인 하워드(Howard, M.)가 내한, 서울 정동(貞洞)에 있는 이화학당 구내에서 여성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보구여관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부인병원이었다. 한옥을 개조하여 병원으로 꾸몄기 때문에 입원실은 온돌방이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 하워드의 건강 악화로 1889년 귀국한 이후 중단 상태에 있자 한국의 선교사들이 미국 선교부에 여의사 파송을 급히 요청하여 1890년 8월 22일 교향 리버티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2. 보구여관 사역. 한국 의료계의 획기적인 사업 두 가지를 실시함
로제타 홀은 정동에 있는 스크랜턴의 집에 짐을 풀고 얼마 후 이화학당 근처의 한옥으로 숙소를 옮겼다. 보구여관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하여 첫날 4명의 환자를 시작으로 열 달 동안 2천 명 이상을 치료하였다. 한말 셔우드가 보여준 의료기술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맹장수술을 할 때는 세인들이 깜짝 놀랐다. 환자들이 죽음 일보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얻고 기쁨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 많았다. 보구여관에서 일하면서 셔우드는 한국 의료계의 귀중하고도 획기적인 사업을 두 가지 시작하였다. 첫째는 간호원 양성이고 둘째는 여자의학반의 창설이다. 이 두 가지는 한국 여성의료의 기초를 놓은 중요한 사업이었다. 보구여관 구석방에서 간호원 지망생들을 모아 교육을 시작하였는데 후에 한국인 최초의 의학박사가 된 박에스더 187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개신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의 집에서 잡일을 봐주던 아버지 김홍택의 영향으로 외국인 선교연이 닿았고, 그것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0세 때 이화학당에 입학하였고, 졸업할 무렵에는 보구여관에서 의사들의 통역을 할 수 있을 만큼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 그때 통역을 하면서 의사를 돕고 환자를 간호하며 약을 지었다.
의사 로제타 홀 교수는 수술이 있을 때마다,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남편과 떨어져 서울에서 지내던 그녀를 불러 보조자 역할을 하게 했다. 그녀는 보조자 역을 싫어했지만, 로제타 홀 교수가 언청이를 수술하여 고쳐주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게 된다. 이 무렵 그녀는 로제타 홀의 주선으로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녀 나이 17세였다. 남편은 로제타 홀 교수의 남편이었던 홀 박사의 조수였던 박유산이다. 19세 때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1896년 20세 때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 학생이 되었다. 미국 기독교 선교 여의사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유학이 가능했다. 유학 중 남편은 볼티모어의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나, 그녀의 졸업을 3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박 에스더는 1900년 졸업하고 귀국하여 보구여관에서 일했는데, 귀국 후 10개월 동안 진료한 환자가 3천 명이 넘었다. 1910년 4월 13일 폐결핵으로 인해 34세 때 세상을 떠났다.
가 첫 학생이었다.

3. 남편과 딸의 죽음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청일양국 군대의 혈전장이 되어 수많은 사상자들이 나왔다. 로제타는 남편과 함께 부상자를 치료한느 일에 헌신적으로 활약하였다. 남편은 평양으로 귀환하여 밀려드는 부상자와 환자를 돌보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만 과로가 겹쳐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쓰러져서,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로제타 홀의 일기는 남편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남편의 눈은 슬픈 듯 나를 바라보았고 띄엄띄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애써 나에게 하려던 말은 내가 평양에 간 것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말했다. 나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평양에 갔고, 그 분께서 그 뜻을 다 헤아려주실 거라고... 혹시 울음소리가 들릴까 싶어 안간힘을 쓰며 울음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베개는 눈물로 젖었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애원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사랑하는 남편을 데려가지 말라고...” 로제타 셔우드 홀 일기:1894년 12월 10일 일기
남편이 죽은 후 그 해 12월 두 살난 아들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남편의 유업을 잇기 위해 1897년 11월 다시 한국에 왔다. 한국으로 귀환한 로제타는 평양에서 여자병원인 광혜여원을 설립하였고 부녀자와 아동을 위한 의료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병원사업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또 한번의 비극을 맞이하는데 한국에서 낳아 기른 딸 마가렛이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딸의 시체를 김창식 목사의 등에 업혀서 평양서 양화진까지 걸어서 데려다 묻혔다고 한다. 당시 로제타 홀의 일기를 보면 “밤이 찾아오면 쓸쓸함도 함께 온다 간절한 그리움이다. 재잘대던 어린아이의 입맙춤과 작은 손이 없어진 지금, 그 아이가 없는 삶은 너무도 힘겹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데려가셨으리라” 로제타 셔우드 홀 일기:1900년 1월 18일 일기


4. 맹인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다.
처녀 때 본국에서 맹인용 점자사용법을 배운 적이 있는 그녀는 평양에서 의료사업을 할 때 오씨라는 보조원의 어린 딸인 봉래가 앞을 보지 못하므로 점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 후 본국에 가 있는 동안 뉴욕의 맹인연구소를 방문하여 점자법을 좀더 세밀히 연구하였다. 이때 연구한 점자법이란 뉴욕 포인트 시스템에다 한글을 적용하여 한국인 맹인들이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것을 위해 목두했었다. 1897년 광혜여원 방 하나를 내어 자신이 고안한 점자사용법을 이용하여 봉래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이것이 한국에서 최초로 실시한 맹인교육이었다. 봉래를 시작으로 지방에서 데려온 학생들을 모아 마가렛병동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평양맹아학교가 되었다. 1908년까지 하다가 그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어 다음해부터 맹인 전문가인 록웰 씨에게 인계하였다.

5. 선교의 열매와 죽음
그녀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관장하며 아들의 해주 구세병원 및 해주 구세요양원을 지원하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33년 구세요양원 내에 그녀의 이름을 딴 로제타기념예배당이 건립되었다. 1935년 건강이 쇠하여져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 1943년 은퇴하고 뉴저지에 있는 안식관에 들어가 말년을 조용히 보내다가 1951년 4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해는 화장되어 남편이 묻혀 있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다. 그녀가 쓴 남편의 전기 The Life of Rev.William James Hall(1897)은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 상황 및 구한말 국내정세를 알려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6. 결론
로제타 홀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에서도 선교를 향한 불붙는 마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국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의 헌신과 수고는 목회를 준비하는 필자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육신의 고통과 사별의 아픔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차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며 사역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였다.

III. 사진 및 기타자료 네이버 블로그‘물길손길’ 한국교회사 사진 자료


1. 왼쪽은 제임스 홀, 오른쪽은 로재터 홀 선교사



2. 로제타 홀의 수술 모습



3. 초기 홀 기념병원(평양에 설립되었던 여성병원, 1894 좌)과 광혜여원(우)



4. 평양맹아학교(1910)

5. 제임스 홀 선교사 장례예배 순서지 로제타 홀, 김현수 강현희 역 『로제타 홀 일기4』(서울: 홍성사, 2016) 181



6. 로제타 선교사 25주년 기념(좌) 및 노년의 모습(우)









IV. 참고문헌

[국내문헌]
The Life of Rev. William James Hall, 1897(노병선 역, 1897; 현종서 역,<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 도서출판 에이멘, 1994)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기독교백과사전 16권』(서울 용산구: 기독교문사)
감리교회사 Ⅰ
한국 감리교 인물사전
로제타 홀, 김현수 강현희 역 『로제타 홀 일기4』(서울: 홍성사, 2016) 181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내한 선교사 총람』(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수정 증보판 3쇄)

[관련논문]
“위생의복론”, <예수교신보>, 1907. 11. 13~11.27;“기초적 위생”, <기독신보>, 1916. 7 26~8. 22.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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