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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43 / John McIntyre(미상, 스코틀랜드)

닉네임
이준호
등록일
2019-12-13 13:10:34
조회수
752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B043_이준호.hwp (3867136 Byte)
I. 기본사항

이름: macintyre John / 존 매킨타이어
생몰연도:
출신 및 소속: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만주선교사.
연표1872 봉천에서 로스(J. Ross)와 전도활동 시작1875 성서의 한국말 번역 시작1879 Notes in the Corean Language 저술1880 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es 저술1882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예수셩교요안내복음전셔> 간행(한국말로 번역된 최초의 성서, 식자공-김청송)하여 초기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에 공헌1883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사도행전 인쇄1887 신약 전체를 번역 인쇄 <예수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3,000부 출판
가족사항아내: Catherine Ross처남: John Ross

II. 선교사 소개: 존 매킨타이어 (John McIntyre, 스코틀랜드)

1. 활동배경
매킨타이어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출신으로 존 로스와는 처남의 관계이다. 그는1872년에 봉천에서 존 로스와 함께 전도활동을 시작하였고, 그가 했던 주된 일은 한글성경의 번역이다.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중국에서 한국선교를 본격적이고 체계적으로 준비하였다.

2. 동역자 존 로스
동역자이자 처남매지간인 존로스는 1872년 선교사로 부름받고 아내 스튜어트와 함께 그 해 8월 중국 지푸를 거쳐 그 다음달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부가 있는 영구에 도착하여 중국어와 만주어를 배우는 한편 만주 우장을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873년 사랑하는 아내가 첫 아이를 출산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큰 위기를 만났지만, 로스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고, 갓 태어난 아기를 영국에 있는 누이동생 캐더린 로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녀는 오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같은 선교지에 와 사역하던 총각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가 그녀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동을 받고 청혼하여 둘이 결혼했다. 이렇게 존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3. 최초 한글 성경번역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로스는 ‘말씀’만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 보았다. 즉 성경 번역, 한글성서 간행에 전력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복음주의자로,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절하고도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경번역의 일을 자신의 매제인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진행한 것이다.

로스는 특권층이 읽을 수 있는 한자성경이 아니라 절대 다수를 형성하고 있는 평민들을 위해 순 한글 번역이 더욱 시급함을 알았다. 그래서 하루 빨리 예수님을 전하는 방법은 한글로 복음서를 번역하는 일임을 알고, 권력에 시달리고 있는 압록강 너머의 한국인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복음서 번역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저본으로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로스와 매킨타이어 역은 독창적인 번역이라기 보다는 중국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라고 할 만큼 중국어 성경을 모체로 번역한 성경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가 1882년에 본국에 보낸 보고서와 1881년 매킨타이어의 보고서를 종합할 때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저본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번역 과정에서 헬라어 성경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 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한문 성경을 초본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성경과 대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번역과정은 1882년 7월 로스가 보낸 보고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한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성경 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4. 번역의 원리
로스와 매킨타이어 번역팀의 주된 목표는 성경 텍스트릐 메시지를 한국의 일반 독자들에게 정확하고 간단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경을 쉽고 회화적인 언어로 번역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한자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글을 쉽게 읽었기에 그들을 위해 한글 성경을 만들고 싶어했다. 특히 ‘유월절’, ‘세례’ 와 같은 일부 단어의 번역은 중국어나 헬라어를 모르는 한국 독자들에게 그러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번역팀에게는 난제였다. 한국 독자들은 안식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데 매우 혼란스러웠다. 안식일은 다른 날과 같은 날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어떤 사람들은 왜 안식일에 일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했다. 또 유월절은 독자들이 6월에 행해진 의식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도 있다. 그래서 로스 번역팀은 당시 한국 문화 상황에 맞게 적절히 적응시키는 일을 하였다. 아브라함은 중국어로 쓰여진 것을 한글로 읽을 때 “아백라한”으로 읽어야 하지만 이 이름을 로스 버전에서는 아브라함으로 번역되었다.


5. 한인교회 설립의 기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1884-5년 입국하기 이전에 1873년에 로스와 매키나이어가 간도의 고려문까지 전도여행을 했으며, 이듬해부터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1882년에 누가복음을, 1883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인쇄하고 1883년에는 신약 선체를 번역하여 <예슈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3000부를 출판하였다. 그후 서상륜을 비롯하여 이성하, 백홍준 등은 성경을 파는 매서인으로 활동하였다. 1883년 서상륜은 몰래 성경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들어왔으며, 1884년 봄에 서상륜은 인천에 보내 온 6000부의 복음서를 인수하여 지방으로 다니면서 배포하였다.

강화도조약과 조미조약 등 개항이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조지 낙스와 길버트 리드 등 주변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선교 움직임이 일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는 아직 한국의 교회사학계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다우스웨이트와 존 로스, 그리고 매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접한 의주 사람들에 의해 조용히 선교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1883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를 대신해 디우스웨이트 목사가 조약에 의해 개방된 항구들을 방문해 몇몇 한국 관리들과 외국 공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어로 인쇄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기독교 출판물을 반포했다.” 그가 방문한 항구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 또 얼마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피스가 언급한 항구들은 당시 개항이었던 제물포, 부산, 원산 세 항구 중 아마도 중국쪽에서 접근하기 쉬운 제물포와 부산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매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서 세례를 받고 성경 번역에 참여하여 로스 역 성경 번역에 크게 기여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김청송, 서상륜 등 의주 출신들은 자신들이 만든 복음서를 들고 자기 고향과 서울에 잠입하여 성서를 반포하면서 선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으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한국인에 의해 놀랍게 복음이 확산되고 있었다. 자생적으로 전도가 이루어진 한국천주교와 마찬가지로 한국개신교 역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에 의해 복음을 접한 이들에 의해 한국인 공동체 가운데 복음이 놀랍게 확산되어 갔다. 이후 언더우드가 1889년 여행 중 의주에서 세례 받기를 지원하는 자들 “백여 명”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그곳에서 100여 명 가운데 33명을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 세례를 거행했다. 이는 매킨타이어 선교사가 뿌린 복음의 씨가 얼마나 놀랍게 성장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작성일:2019-12-13 13:10:34 125.176.65.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