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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55 / Mckenzie, Fredrick Arther / 3학년 5반 / 2017210296 / 서정범

닉네임
서정범
등록일
2019-12-13 15:32:44
조회수
840
첨부파일
 한국교회사 선교사 연구(McKenzie, Fredrick Arther).hwp (28160 Byte)
1. Mckenzie, Fredrick Arther의 약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박혜진,『내한 선교사 총람(수정 증보판)』(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371의 내용을 정리했음을 밝힌다.

Mckenzie, Fredrick Arther(이하 매켄지)는 캐나다에서 출생한 스코틀랜드계 선교사였다. 매켄지를 내한 선교사로 분류할 수는 있지만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반적인 선교활동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869년에 태어나 1931년까지 살았던 사람으로 영국 런던 의 기자로 활동했다. 그가 일반적인 선교활동을 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1904, 1906년에 내한을 하기는 했으나 한국에 정착하여 복음전파를 하는 선교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켄지는 1904, 1906년 두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기자로서 활동한다. 을사늑약(1905)을 기점으로 당시 대한제국은 국가의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만다. 한국이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을 때에 그는 한국에 들어와 일제의 침략정책을 취재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맹렬히 비난하고 한국 민족의 투쟁을 격려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의 저서로는 “The Tragedy of Korea(1908)”와 “Fight for Freedom(1920)”이 있다.물론 경술국치와 고통의 일제치하 36년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한국을 섬겼던 그의 헌신과 활동이 가지는 의의를 높게 평가해야할 것이다.
필자는 매켄지 선교사가 내한했을 때에 한국의 상황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활동이 가졌던 역사적 의의를 되돌아볼 것이다.

2. 일제시대 속 고통 받는 조선
1876년 조선과 일본이 맺은 강화도조약은 조선을 향한 열강의 침략의 문을 열게 되는 시작이었다. 많은 열강들이 조선에서 이득을 취하려 했으나,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나라는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어떤 것을 착취하는 정도의 목적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로 삼아 대륙으로 진출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매켄지 기자가 내한했던 1904, 1906년은 일본의 야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당시 조선 식민지화를 진행하던 중이었던 어두운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1894년 조선에서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다. 일본은 명분을 주장했지만 속내는 청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조선을 자유롭게 하여 식민지화를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나라 안팎의 어려움과 부정부패로 몰락해가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를 진행하여 국력을 키워가는 시점이었다. 두 나라의 상태는 이미 결과를 예고하고 있었다. 일본은 청나라를 패배시키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일본은 승리의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과 많은 배상금을 받아낸다.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명성황후(당시 민비)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을 부추겨서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야욕을 저지시키려 했다. 삼국의 간섭으로 일본은 주춤하여, 청나라로부터 받았던 ‘랴오둥반도’를 돌려준다.
이로써 일본의 야욕이 멈춰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은 제국건설과 대륙진출이라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는다. 1895년 일본은 당시 중전이었던 민비를 대궐로 쳐들어가서 참혹하게 살해한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이는 일본이 조선을 향한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게 있어서는 다른 나라의 낭인과 군사들에게 국모가 자신이 살고 있는 궁궐 안에서 죽임을 당한 치욕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고종은 대궐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대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하는 ‘아관파천’을 한다. 이제 조선을 두고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가 참가하여 일본과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러시아와 일본은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격돌한다. 이것이 바로 1904년에 있었던 러일전쟁이다. 여기에서도 일본이 승리하게 된다. 당시 서구 나라들은 청나라까지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러시아가 패배한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이제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열강에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용의주도하게 준비돼 온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작업은 청일전쟁 후 한층 더 강화되더니 러일전쟁 이후 자신들의 본색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 1』(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785.
본격적으로 식민지화에 앞서 일본은 한국에게서 외교권을 빼앗아간다. 이 사건이 바로 1905년에 있었던 을사조약(을사늑약)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 황제의 재가를 끝가지 받지 못했지만 일본은 강제적으로 이를 시행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 사건에 분노한 일본은 고종황제에게 책임을 물어 강제적으로 양위를 하게 했다. 식민지화를 모든 행정⸳사법 사무를 통감부에 감독 아래에 두는 정미조약을 맺으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기까지 한다. 그리고 1910년 8월 29일 결국 경술국치, 즉 한일합방이 일어난다. 이로써 정말 한국은 일본의 공식적인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를 하면서 수많은 수탈을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화를 진행하는 가운데도 고통을 주었다. 특히 청일전쟁의 경우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임에도 전쟁을 진행하는 장소가 한국의 영토임을 감안한다면 전쟁 가운데서 아무 관련도 없는 한국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겠는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에 당시 한국의 백성들만 고통을 받았다. 또 많은 경제적인 수탈과 물리적인 폭력 앞에 고통을 받았다.
일제의 식민지화와 지배라는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한국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계속 진행하고 계셨다. 특별히 한국의 이런 암울한 현실을 세계에 사람들을 통해 알리게 하셨다. 그 사람들 중에 매켄지도 있다. 그는 한국 민중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하였으며, 일제의 만행과 그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런 역할을 통해 세계 각국의 선교적인 지원과 기도를 받았으며, 그 도움으로 어둡고 암울한 시기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나갈 수 있었다.

3. 일제시대 속 비극 제암리 사건
일본의 한국 지배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일본의 지배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많은 민중들의 운동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운동은 3.1운동이다. 한국의 독립을 바라며 일본의 지배를 반대하는 이 만세 운동은 한국 민중들의 민족적 긍지와 결의를 느끼게 한다. 이 민족적 평화적 만세 운동의 중심에는 바로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기독교회사 2』의 저자 박용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33명의 3⸳1운동 서명자 과반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로도 교회에 대한 박해는 예고된 것이었다. 강서사천교회 학살사건, 정주교회 학살사건, 강계교회 학살사건, 위원교회 학살사건, 서울 십자가 사형사건, 북간도 노루바위교회 및 서간도 각지교회 학살사건, 정주오산교회 피소사건,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전형적인 예이다. 이 중에서도 제암리교회 학살사건은 일제가 얼마나 무자비하게 기독교회를 탄압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1919년 4월 15일 2시경, 아리타 토시오 일본군 중위와 일단의 일본군은 35명의 제암리 교인들을 교회에 한데 모으고 문을 잠근 후 집중사격을 가해 모두 살해한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일제의 제암리교회 만행은 단순히 한 교회에 대한 학살 차원을 넘어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결집시킨 교회에 대한 보복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와 같은 일제의 만행은 전국에서 자행되고 있었다. 로버츠(Stacy L. Roberts) 선교사는 청주에서도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총살당하거나 구타로 숨졌다고 보고했다. 첫 3개월 동안 무려 5만 명 이상이 일경에 의해 처형당하거나 부상당했다. 3⸳1운동 직후 출간된 한국에 대한 진실(The Truth About Korea)에서 켄데일이 지적한 것처럼 당시의 일제 만행은 상상을 초월하여 진행되었다. 박용규,『한국기독교회사 2』(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166-67.


일제는 자신들을 반대하는 민중과 교회를 향해 이처럼 참혹한 일조차 서슴지 않았다. 제암리 사건은 일제의 교회에 대한 보복으로서 교회를 불태워 증거를 인멸하려는 시도였다. 그럼에도 일제의 참혹한 만행은 숨겨질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스코필드(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가 “제암리에서도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제암리로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나무위키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그리고 스코필드의 증언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매켄지였다. 그는 1919년 4월에 있었던 제암리 학살 사건에 주목해, 당시 그 현장을 목격한 캐나다인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 제국이 일으킨 학살 사건의 진상을 세간에 폭로하였다. “프레더릭 매켄지”에 대한 위키피디아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이처럼 일제는 자신들의 부당한 통치와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중과 교회를 강경하고 잔인하게 진압하려 했고, 이런 만행들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기자들을 통해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다.

4. Mckenzie, Fredrick Arther의 활동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기독교대백과사전 제5권』(서울: 기독교문사, 1982)에서 “매켄지”에 대한 내용을 정리했다.

메켄지는 기자로서 내한하여 활동을 했다. 앞서 밝힌 것처럼 1904, 1906년 두차례 내한하여 일본의 침략 정책을 취재했다. 그는 취재를 바탕으로 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1908년에 저술한 “The Tragedy of Korea”(제목을 번역하면 “한국의 비극”)와 1920년에 저술한 “Fight for Freedom”(제목을 의역하면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이 있다. 매켄지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종군기자로 내한을 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화를 가속하자 그 과정을 취재한 것이다. 을사조약을 비롯한 한국의 안타까운 현실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한국의 비극”은 한국을 향해 안타까워하는 그의 마음과 취재 내용이 잘 담겨 있다. 그는 종군기자의 활동을 마치고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거쳐서 영국으로 돌아갔고, 1905년에 그 때까지의 기록을 “도쿄에서 트빌리시까지 – 검열 받지 않은 편지”라는 저서로 간행 “프레더릭 매켄지”에 대한 위키피디아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 명령에 항의 하여 대한제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상을 취재해,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프레더릭 매켄지”에 대한 위키피디아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취재하며, “한국의 비극”이라는 저서를 기록했다.
매켄지의 대표적인 저서 중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은 이미 일제의 강점 아래 있던 한국의 참상을 다루었다. 특히 1919년에 있었던 3⸳1운동을 목격한 기록과 그 해에 4월에 있었던 제암리 학살 사건에 주목해 당시 그 현장을 목격한 캐나다인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증언을 토대로 일본 제국이 일으킨 학살 사건의 진상을 세간에 폭로하였다. “프레더릭 매켄지”에 대한 위키피디아 자료를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그는 일본의 억압과 수탈 속에서 신음하는 한국의 소리를 세상에 알리고자 헌신하였다.

5. Mckenzie, Fredrick Arther의 활동의 의의
매켄지의 활동의 의의는 무엇인가? 한국을 위하여 헌신했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대로 한국의 복음화와 회복을 위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헌신하고 섬겼던 이들이다. 매켄지는 언론인이었다. 그가 한국 땅에 정착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의 비극과 참상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세계인들을 향하여 외치는 스피커의 역할을 감당해주었다. 특히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정미조약과 군대해산 등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며, 풍전등화에 놓인 한국의 현실을 세계에 알렸다. 일제 강점 후에는 3.1운동과 여기에 대한 일제의 만행, 즉 민중과 교회를 향한 잔혹한 학살과 핍박을 알려주었다. 그의 헌신으로 세계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해 여론이 일제를 비난하지 않았다면, 일제는 더욱더 서슴없이 만행들을 빈번하게 저질렀을 것이다.
매켄지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한국 사람들의 민족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이라는 평화적 만세운동은 세계에 다른 나라들 가운데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런 운동의 흐름을 시작했던 것이 바로 한국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기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매켄지의 활동으로 당시 한국의 민중은 독립운동에 혼자가 아니며,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추친해 갈 수 있는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매켄지는 한국의 독립과 복음화를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헌신했던 수많은 선교사 중 귀한 한 사람이었다.
작성일:2019-12-13 15:32:44 58.234.6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