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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 B046 / Martin Stanley H. / 3-4 / 장희섭

닉네임
장희섭
등록일
2019-12-13 15:48:50
조회수
894
첨부파일
 내한선교사_3-4_B046_장희섭.pdf (215771 Byte)
마틴(민산해) 선교사 / Martin Stanley H. (1870-1941)

I. 기본사항

1. 이름: Martin Stanley H. / 마틴 / 한국명: 민산해(閔山海)
2. 생몰연도: 1870 - 1941 캐나다 뉴펀들랜드 세인트존스시 출생
3. 학력: 의학 전공
4. 경력 1915. 내한, 간도에서 의료선교사업(제창병원장)
한국의 독립운동에 많은 협조
1919.3.13. 간도 용정의 만세시위 운동 시 구미 각국에 폭로
1927 서울로 전임, 세브란스의전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
결핵 퇴치운동에 공헌
일제 말 강제 추방
1941 병으로 소천

5. 가족사항부인: Martin, S. H자녀: Martin, Margaret G.(Moore, M.M) / Edna(2녀)

II. 선교사 소개: 마틴 Martin Stanley H. (1870-1941)

마틴은 1870년 7월 23일 영국 뉴페랜드 성요한 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처음에는 무선전신 기사로 일하다가 뒤에 의학교를 졸업하고 M.B.C.M 학위를 받았다.
1915년에 캐나다 장로회의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간도 용정선교부로 파송되어 이곳에서 박걸 선교사가 설립한 제창(濟昌)병원의 병원장으로 있으면서 우리 교포들의 의료사업에 헌신 노력하였다.
그는 시편 107편을 마음에 품고 선교의 열의를 펼쳤던 사람이다. 시편 107편 20절에는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는 구절 이 있다. 민산해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까지 넓게 활동했던 사람이다. 일제의 총탄과 검에 상하고 죽어가는 조선인을 성경책과 왕진가방을 들고 치료하려 다녔다.
당시 제창병원과 그 부속 건물은 한국 독립 운동을 모의하기 위한 독립지사들의 집회 장소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숙박구실을 하였으며, 독립 사상을 앙양(昻揚)시키는 각종 문서 발행처 역할도 하였으므로 이 장소는 북간도에 있어서 초기 독립운동을 전개시킨 총본영이기도 했다. 마틴 의사 역시 한국의 독립운동에 여러모로 협조하고 고무하는 입장을 취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인 1918년 12월 15일에 마틴 의사는 외국인 선교사 및 한국인 목사, 그리고 용정 천주교회 신부까지 초대하여 다과회를 베풀고 캐나다에서 온 통보라는 전제하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세계 대전의 종식과 함께 세계의 종교는 통일할 수 있는 기운에 도달하여 이미 예수교도는 종교 통일운동을 착수하였다. 이제 강화회의에서 반드시 인류의 자유, 평등주의가 문제될 것이며, 그러면 한국 문제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이러한 그의 발언은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한국의 독립지사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마침내 간도지방 3.1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919년 3월 13일 간도 용정에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사주를 받은 연길 도태(道台)휘하의 맹부덕(孟富德)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시위군중에 총격을 가하여 17명의 사상자가 나고, 30여명이 부상하였다. 이 때 그는 사상자 및 부상자들을 제창병원에 입원시키고, 부상자 치료에 전력하였다. 사상자들에게서 빼낸 탄환이 모두 일제 권총 탄환인 것을 밝혀 중국군 안에 잠입한 일본군에 의해 한국인들이 무참히 살상되었음을 밝히기도 하였다.
1920년 10월 다시 일본군이 간도 일대 한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을 때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전거로 피해지역을 순회하면서 부상자 치료에 전력하였고, 이 참상을 촬영하여 구미(歐美) 각국에 보내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1927년 서울로 전임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겸 부속병원 의사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결핵 퇴치운동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마틴은 최동, 이용설 교수와 함께 한국 최초의 항결핵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며 결핵 치료와 계몽활동에 힘썼습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가을에 영미 영사관은 선교사들의 철수를 권고했다. 특히 반일활동 경력이 있는 마틴 가족은 최우선 고려 대상이었다. 1940년 11월 미국정부가 마리포사호를 인천항에 보내자 마틴은 아내 마거릿과 함께 귀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는 한국을 떠난 이듬해인 1941년 캐나다에서 별세하고, 1968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 독립장을 수여했고, 마틴은 외국인 선교사답게 독립유공자 7명중 한 사람이 되었다.
평소 가족들에게 “우리는 한국인이니 한국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로 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한 그의 유지를 따라 자녀 1남 2녀가 모두 한국을 위해 일하였는데, 아들(Greed)는 6.25사변 때 미 해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하였고, 장녀(Magaret)와 차녀(Edna)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작성일:2019-12-13 15:48:50 180.68.30.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