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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 게시판

제목

내한선교사 기말보고서/B112/Robert Sharp Alice Sharp

닉네임
강재영
등록일
2019-12-13 16:10:29
조회수
845
첨부파일
 기말보고서_3-6_B112_강재영.pdf (226908 Byte)
3-6반 2017210337 강 재 영 한국교회사 박 용 규 교수님

로버트 & 앨리스 샤프(사애리시) 선교사 부부
/ Sharp. Robert Arthur (1872-1906. M) & Sharp. Alice Hammond (미상. M)


I. 기본사항 내한 선교사 총람(수정 증보판), p463-46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서울, 2007
기독교대백과사전(제8권), p977,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서울, 1983


1. 이름: Sharp, Robert Arthur / 샤프
2. 생몰연도: 1872.3.18.-1906.3.5.
3. 출신 및 소속: 캐나다, 미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03.-1906.3.5.
5. 연표1872.3.18. 캐나다 온타리오 캐스토릴에서 출생1887. 블루클린의 유니언 선교사양성소 입학1900.-1903. 오벌린대학교(미국) 졸업, 재학 중 오하이오주 펜필드에서 목회 경력1903. 미감리교 선교사로 무어/벡커/크리켓트 등과 내한, 해몬드(Hammond)와 결혼1903.5. 미감리회 조선선교연회 무어 감독에게 목사안수 받음, 정동제일교회 목회 및 배제 학당에서 가르침1903.10.28.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브라운/에비슨/게일 등 동료선교사들과 함께 초대 이사로 선출1904. 공주선교부 책임자로 임명되어 서울에서 거주하며 순회전도1905. 공주로 이전, 주택을 세워 교육(영명학교의 시초), 공주/천안/홍성 등 선교구역 순회1906.3.5. 순회전도중 발진티푸스에 걸려 공주에서 소천
6. 가족사항부인: Sharp, Alice Hammond (미상)남편: Sharp, Robert Arthur (1872.3.18.-1906.3.5.)

1. 이름: Sharp, Alice Hammond / 사애리시(史愛理施)
2. 생몰연도: (1871.4.11.-1972.9.8.) (사)한국선교유적연구회(http://missionstay.or.kr/739) “공주 영면동산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아서”中 발췌(2019.11.22. 접속), 서만철 회장(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

3. 출신 및 소속: 캐나다, 미감리교
4. 한국선교기간: 1900.-1940.
5. 연표 1900. 미감리교 선교사로 내한, 상동교회에서 활동, 공주에 명선여학당(영명여학당) 설립, 여성사업, 교육사업에 종사 1903. 내한한 샤프와 결혼하여 서울에서 활동 1906. 남편 사후 귀국, 1908. 재내한 1909. 강경에 만동여학교 1935. 공주에 원명서당 설립, 공주성경학교에서 교육 1940. 일제에 의해 강제 귀환


II. 선교사 소개: 샤프, 로버트 아더 & 앨리스 하몬드(사애리시) 부부

1. 공주 선교부 책임자 및 황성기독청년회(YMCA) 초대이사 ‘로버트 아더 샤프’
로버트 아더 샤프 선교사는 웨슬리의 복음주의 열정을 계승한 전형적인 웨슬리안이었다. 한국기독교회사1, p525, 박용규,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9

주로 서울을 중심하여 평양과 제물포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교회를 개척했던 북감리교회가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주변 지방으로 선교구역을 확장하여 교회 조직의 정비와 함께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성장에는 물론 선교사들의 선교 열정과 한국 전도인들의 헌신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불안이 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을 승리한 일본의 침략세력에 의한 조선정부의 와해는 한국인들을 극도의 혼돈과 절망으로 몰아넣었는데, 이때에 교회는 세상에서 실망한 영혼들에게 새로운 삶의 용기와 희망을 심어준 것이다. 이 시기의 선교사들의 수효나 역량은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의 요구와 한인들의 복음 요청에 응답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형편이었는데, 천안공주지역에 처음으로 파송된 스웨러 선교사에 이어 1904년 샤프 목사(선교사)가 책임을 맡은 것이다. 한국감리교회의 역사(1884-1992), p225,229요약, 유동식,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 1994


샤프 목사가 책임을 맡았던 공주지역은 옛날부터 행정, 문화사업에 있어서 남한지역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백제시대에는 수도로 번영을 누렸고, 조선시대에는 충청도의 수부로 문화산업이 발달하여 선교적 차원에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감리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이 일찍부터 남한지역을 순회하며 선교 거점지를 돌아보고 전도했다. 이 지역에 파송된 스웨어러 선교사와 맥길 의사가 있고, 샤프 목사(선교사)가 1904년도 충청구역 담당자로 파송된 것이다. 공주로부터 논산, 대구, 청주, 충주, 보은, 진천지역으로 계속 증가되는 교회사업을 돌보기 위해 샤프 목사가 파송되었지만, 공주지역은 맥길 의사가 계속 의료와 선교를 담당했던 것이 특징적이다. 한국감리교 교회성장사, p202-207요약발췌, 윤춘병, 감리교출판사, 경기도, 1997


1903년3월에 내한하여 그해 5월에 목사안수를 받은 후 서울에 머물면서 어학을 공부했다. 정동제일교회에서 목회하고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던 샤프 목사는, 1903년 10월 28일에 조직된 황성기독청년회(YMCA)에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초대 이사로 선출되어 YMCA운동의 한국 정착에 공을 세웠다. 공주에서 사역하며 1906년 2월 순회전도 도중에 장티푸스에 걸렸다. 샤프 목사는 1906년 2월 한겨울 추위에도 불구하고 강경과 논산지역에 전도하고 귀가하던 중 벌판에서 만난 진눈깨비를 피하려고 인근 초가 들어갔는데, 그곳이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른 상여를 보관하는 상여 집이었고 그 상여를 만진 것이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사)한국선교유적연구회(http://missionstay.or.kr/739) “공주 영면동산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아서”中 발췌(2019.11.22. 접속), 서만철 회장(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
그는 3월 5일 소천 할 때까지, 비록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개척단계의 공주선교를 발전단계에 올려놓은 공이 크다. 기독교대백과사전(제8권) p977,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 서울, 1983
그는 공주지역을 맡았던 능력 있는 선교사였다. 한국기독교회사1, p967, 박용규,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9

뿐만 아니라 공주선교부 사역 중 순회전도에 힘쓰는 가운데 부부가 세운 ‘영명여학교’는 아내 앨리스 샤프(사애리시) 선교사가 한국여성교육에 헌신하는 기틀이 되었다. 한국감리교 교회성장사, p414요약발췌, 윤춘병, 감리교출판사, 경기도, 1997


2. 근대여성교육의 어머니 ‘앨리스 하먼드 샤프’
1903년 미감리회의 선교사 샤프 목사 부부가 충남 공주에 상주하게 되면서, 1905년에 샤프 부인이 영명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영명학교의 특징은 실업교육에 치중하는 것으로, 1921년에는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공주 영명학교의 교사가 건축되었다. 한국감리교회의 역사(1884-1992), 284-285요약발췌, 유동식,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 1994

특히 부인인 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명성여학당(영명여학당)’을 설립한 후, 남편 사별 후 1908년 다시 내한하여 1909년 강경에 ‘만동여학교’와 1935년 공주에 ‘원명서당’을 각각 설립하였다. 한국 감리교회 외국인 선교사, p99-100, 윤춘병, 한국감리교회사학회, 서울, 2001
샤프 부인은 1908년 재방한하여 남편이 일하던 공주에 머물면서 여성 선교사업을 주관하며 평생을 한국 선교에 헌신하였다. 공주를 중심으로 충남지역에 복음이 확산되었으나, 홍성과 천안 등 극히 보수적인 지역에는 폐쇄적인 특성상 전도가 더딘 면이 없지 않았는데, 샤프 부인의 수고로 여성 사업의 진척이 있었다. 한국감리교 여선교회의 역사, p89-90, 이덕주,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 서울, 1991
그녀는 충청지역을 순회하며 20개 여자학교들을 설립했고, 교회들도 설립하여 여선교회 선교사역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쳤다. 그 결과 한국의 많은 여성 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NEWS M(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8994), “유관순 열사의 스승, 앨리스 샤프 선교사 기념사업“中, 신기성기자(승인일 2018년8월18일), 2019년11월22일 접속


그녀는 여성교육에 큰 관심을 보였다. 봉건적이며 가부장적인 한국사회를 이해하지 못했고, 교회에 남성들만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여성들이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그녀는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남녀평등사상을 교육하기로 결심하고 여학교를 설립하는데 집중했다. 논산, 공주, 천안, 부여 등 충청도 농촌마을을 순회하면서 똑똑한 여성이 있으면 주목하며 관찰했던 것이다. 기독교한국신문(http://www.c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10), “엘리스 샤프 선교사를 기억한다.”中, 승인일 2019년10월9일, 장보연교수(개신대 상담학), 2019년12월11일 접속


3. 한국독립운동에의 기여 : 유관순 열사의 스승 ‘앨리스 하먼드 샤프’
샤프 부인의 헌신은 한국독립운동에도 선명한 족적을 남겼으니, 바로 그녀가 유관순 열사에게 기독교신앙과 민족정신을 전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린 유관순을 충남 병천에서 데려다가 자신의 양녀로 삼아 영명학교에서 중등과정을 2년간 가르친 후 더 나은 교육을 받게 하려고 자신이 일하던 이화학당에 교비 장학생으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NEWS M(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8994), “유관순 열사의 스승, 앨리스 샤프 선교사 기념사업“中, 신기성기자(승인일 2018년8월18일), 2019년11월22일 접속

특히 샤프 부인은 지령리교회의 ‘유관순’과 사촌언니인 ‘유예도’에게 주목했는데, 가정이 어려운 유관순을 친딸처럼 돌보며, 유예도를 먼저 이화학당에 추천했고 후에 유관순을 이화학당으로 보낸 것이다. 당시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면서, ‘정동제일교회’에 출석했다. 당시 정동제일교회는 청년들의 교회였고,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다. 그리고 3.1만세운동을 준비한 중요한 공간이었다. 유관순은 여기에서 민족의식을 키웠으며, 병천 아우내장터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관순의 사촌인 유예도도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종교조직과 학생조직은 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된 것이다. 기독교한국신문(http://www.c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110), “엘리스 샤프 선교사를 기억한다.”中, 승인일 2019년10월9일, 장보연교수(개신대 상담학), 2019년12월11일 접속


유관순 열사 외에도 샤프 부인을 통해 지도를 받고 교회와 민족에 헌신한 인물들이 다수 있다. 해방 후 자유당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고 중앙대학교(서울)를 설립한 임영신, 한국 최호 여자 경찰서장을 역임한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최초 한국인 여자 목사 전밀라 등이 영명여학교에서 그녀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찬송가 ‘사철에 봄바람 불어오며’, ‘어머니의 넓은 사랑’ 등 100여곡 이상을 작곡하여 한국 찬송가의 개척자로 불리는 구두회 교수도 주일학교에서 샤프 부인의 지도를 받은 인물이다. (사)한국선교유적연구회(http://missionstay.or.kr/748), “사애리시 선교사 유골 이장 사업”中발췌, 서만철 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2019년11월22일 접속


4. 주님의 사랑을 증거 하는 삶, ‘앨리스 하먼드 샤프’
이러한 공헌 외에도 그녀는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증거 했는데, 기록들과 제자들의 증언이 이를 말해준다.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샤프 부인의 모습을 ‘영명100년사’에서는 이렇기 기록한다. “사애리시 부인이 명선학당의 운영을 스웨어러 여사에게 맡기고 공주를 떠나던 날 교회와 학당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별의 슬픔 위에 남편을 잃고 자신의 소망을 버리고 떠나는 사애리시 부인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떠나는 사람이나 떠나보내는 사람들 모두가 가슴이 뭉클 하는 심정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샤프 부인은 기도 끝에 마침내 1908년 8월에 영명동산에 묻혀 있는 남편 곁으로 다시 와서 선교 활동을 계속한다. (사)한국선교유적연구회(http://missionstay.or.kr/748), “사애리시 선교사 유골 이장 사업”中발췌, 서만철 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회장, 2019년11월22일 접속


만세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의 등에 업혀있던 2살짜리 조카인 ‘류제경’은 후에 공주사범대학 교수를 지냈고 애국훈장애족장을 받은 인물인데, 그는 샤프 부인의 학비지원으로 학업을 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또한 그녀는 행방불명된 독립군 아버지를 둔 ‘오애리시’를 입양하여 키웠고 세브란스 간호학교에 입학시켰다.
샤프 부인이 101세의 나이로 요양원에서 소천 했을 때, 쓰던 방에 남겨진 유품이라고는 옷가지 몇 벌과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 한 대 뿐이었다고 한다.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다간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사)한국선교유적연구회(http://missionstay.or.kr/739) “공주 영면동산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아서”中 발췌(2019.11.22. 접속), 서만철 회장(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

20대의 나이에 선진국인 고국을 떠나 세계최빈국인 조선에 와서 평생을 주님과 이웃에게 드린 ‘샤프 선교사 부부’에 대해 알아보았다. 가슴이 먹먹하다. 성경을 통해 주께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자세와 중심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된다.

감사합니다.
작성일:2019-12-13 16:10:29 183.98.105.44